소설리스트

화산귀환-753화 (751/1,567)

753화. 제자는 괜찮습니다! (3)

“……갔어?”

“예, 장문인.”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끄으응. 날이 갈수록 다루기가 힘들어지니 원.”

그 넋두리에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청명이 놈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장문인이 놈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시는 것이지요.”

“……그렇더냐?”

현종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예전의 현종은 청명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제 발로 화산에 입문하겠다고 찾아온 어여쁜 아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은연중에 청명이 무언가를 해 주고, 무언가를 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현종 역시 마찬가지다.

“장문인. 이번에는 장문인께서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현상이 넌지시 말했다.

“애들을 위해서 같이 가지 말라 하셨다가, 이번에는 가서 도와주라 하시니, 청명이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만도 하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내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잖으냐.”

“……장문인.”

“내 나름으로는 모두에게 좋은 방향을 찾아보려 했던 것인데, 마음 같질 않았구나.”

“그래도 이번 일은…….”

“과하지 않느냐?”

“예?”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현상이 반문하자, 현종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저 아이가 제대로 쉬는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

그 말에 현상과 현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번에 새벽 수련을 시작하며 새삼 깨달았다. 녀석은 화산에서 가장 빨리 수련을 시작하고 가장 늦게 수련을 끝내더구나. 그러면서 일과 시간에는 아이들의 수련을 봐주고 틈틈이 타 문파와의 일을 조율하고, 심지어는 화산이 벌이는 사업까지 거의 주관하고 있지 않느냐?”

현영이 하나하나 떠올려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요.”

실무자들은 따로 있지만, 그 모든 일이 청명을 빼놓고는 돌아가질 않는다.

“그 일을 다른 이들이 나눠서 하려면 열이 있어도 부족하다. 그런 와중에 문파 밖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일일이 녀석에게 기대면 청명이는 대체 언제쯤 쉴 수 있느냐?”

“…….”

현영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리되어 버려 실감을 못 했구나.’

돌이켜 보면 청명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도저히 한 사람이 맡을 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딱히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녀석이 맡은 일이 점진적으로 늘어나 여기까지 왔다는 점과, 평소 청명이 보여 주는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모습들 때문일 것이다.

처마에 누워 술이나 홀짝이는 모습을 보며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산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청명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제 일을 해내야 한다. 이건 화산을 위한 일이 아니다. 청명이를 위한 일이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신공을 익히는 와중에도 재경각을 들락대는 녀석을 봤을 때다.”

“…….”

“신공을 익히는 건, 무인의 입장에서는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고 더없는 기회다. 그런데 녀석이 제 무학에만 힘을 쏟아도 모자랄 마당에 화산의 대소사까지 똑같이 챙기려 들더구나. 나는 그게 옳은 일이라 보지 않는다.”

확실히 뭔가가 뒤틀려 있다.

화산에 대한 청명의 애정이 더없이 크다는 것이야,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모를 이가 누가 있으랴.

하지만 현종이 보기에 화산에 대한 청명의 집착은 상식 이상으로 과도하다. 게다가 최근 들어 그 경향이 좀 더 심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선조의 유진을 수습해 온 이후로, 좀 더 많은 것을 보려 들고 있지.’

다른 이들이 같은 변화를 보였다면 기꺼운 일이겠지만, 청명만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이미 과도하다.

“청명이를 보내지 않으신 까닭에 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까?”

“이번에 출정을 떠난 이들을 그 녀석이 특별히 더 챙긴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니더냐. 조금 떨어뜨려 놓으면 청명이도 자신을 챙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점차 그런 일을 늘려 가고 반복해 간다면 청명이도 조금쯤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여겼지.”

“장문인…….”

현상이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현종을 가만 보았다.

장로란 직책을 맡은 이상 누구보다 현종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했는데 저기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하면…….”

그때 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명이를 다시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아니, 하다못해 그럴 거면 본대와 함께 보내시지.”

“……예감이 좋지 않다.”

“예?”

현종의 얼굴이 굳는다.

“수적들이 사람을 잡아 노예로 파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는 하나, 이번처럼 배 한 척을 통째로 나포한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겠느냐?”

“…….”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다. 그건 용인될 수준을 넘은 일이다. 천하에 소문이 퍼졌고, 관에서도 수적을 소탕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겠지.”

“……하면 장문인께선 이번 일이 단순히 돈을 노리고 벌어진 일이 아니리라 보시는 겁니까?”

“내 여기에 앉아서 장강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내다볼 수는 없다. 한데 이번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자칫하면 장강으로 간 아이들이 크게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장로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현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은 그저 우려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으니 출정 준비를 서두르도록 해라.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한다.”

“예, 장문인.”

문파를 비우고 제자들을 이끌고 나가는 일을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리저리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많은 제자들이 자리를 비워도 화산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이 문제가 없도록 조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그러니 우선은 청명이를 미리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어려운가.’

현종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청명이라면 이런 현종의 속내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뾰로통하게 군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제 나름의 항의였을 터.

‘하나 청명아…….’

문파는 사람의 인생이 될 수 없다.

청명으로 인해 화산이 명성을 얻고 훌륭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종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청명으로 인해 화산이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화산으로 인해 청명이 안식을 얻는 것이었다.

현종이 결국 참다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구나.’

아직은 너무도 어려운 길이다. 아직은.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겠지. 녀석을 위해서라도.”

고개를 내저은 현종은 남쪽 방향을 내다보았다. 눈가에 걱정이 가득했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에 긴 숨이 밀려 나왔다.

* * *

파아아아아아앗!

쉬지 않고 달리는 청명의 속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평소 오검을 이끌고 달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한 걸음에 산을 넘고, 두 걸음에 강을 뛰어넘었다.

“헤엑, 헤엑, 헤엑! 화, 화산신룡! 같이 가십시다!”

뒤를 따르는 유령문주 도운찬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유령문은 무위는 약할지언정 그 신법만은 천하일절로 알려져 있고, 도운찬은 바로 그 유령문의 문주다.

그러니 당연히 신법으로 맞붙는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신법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한다는 개방의 천리신개(千里神丐)정도나 그보다 빠를까.

하지만 지금 도운찬은 앞서서 달리는 청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숨이 금세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단전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되게 빠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저 어마어마한 속도를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내력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물론 지금 화산신룡의 명성은 사해를 울리고 있다.

이미 화산신룡은 후기지수 따위로 분류되지 않는다. 화산신룡이 무당과의 비무에서 무당의 장로와 싸워 이겼다는 사실은 이제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이니까.

그렇다 보니 그 무위에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지만, 그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이건 그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화, 화산신……. 화산신룡!”

몇 번이나 연거푸 부르니 그제야 섬전처럼 달리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왜요?”

“조,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시면……. 너, 너무 빠릅니다!”

“이게요?”

그러자 청명은 영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문주님 때문에 적당히 달려 드리고 있는 건데.”

“……이, 이게요?”

사색이 된 도운찬을 보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죄송한데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까 가서 만나시죠.”

“……예?”

“그럼.”

청명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달려왔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화, 화산! 신…….”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청명의 모습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사람인가?”

충격에 발까지 멈춰 버린 도운찬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어떻게 됐느냐?”

“……비슷합니다.”

백천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며칠 조사해 보았건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게 나오지 않는다.

“상인들은?”

윤종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수적들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해를 끼친다든가 하는 일은 알려진 게 없는 모양입니다. 일전에 배 한 척이 통째로 실종되어서 관련된 조사가 벌어지고는 있지만 그 외에 다른 정황은 보이지 않습니다.”

“실종?”

“배가 가라앉는 건 때때로 벌어지는 일 아닙니까. 장강 한가운데서 배가 가라앉으면 아무리 자맥질에 능한 선원도 강가까지 못 돌아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눈여겨볼 일은 아니다.

백천은 슬쩍 앓는 소리를 내고는 당소소를 보았다.

“양민들 역시?”

“네. 약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 모양이에요. 장강에 사는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강변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나가는 이들인데 어차피 이런 이들의 주머니 사정이야 빤하니 수적들도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고요.”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산적은 양민을 노리지 않는다. 애초에 먼 길을 가기 위해 노잣돈을 들고 산을 넘는 이들은 양민이라 볼 수 없는 이들이다. 평범한 양민들은 평생 태어난 곳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리 생각하면 수적들이 강변에 사는 양민들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도 빤하다. 어차피 털어 봐야 남는 게 없는 일이니까.

물 위에 돈 짊어진 이들이 배를 타고 넘치게 돌아다니는데, 뭐 하러 물 밖의 가난한 이들을 털겠는가?

“수채에 대한 소문은?”

“그것도 잘 모르는 모양이더라고요. 장강이라고는 해도 워낙 주변으로 험지가 많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얼마 안 된대요.”

“그렇지.”

장강은 빼어난 경관으로 무척 유명하다. 그 말인즉슨, 사람이 살기 어려운 험지가 펼쳐져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적들은 그런 험지만 골라서 수채를 세우는 데다가, 주기적으로 살림살이들을 배에 싣고 옮겨 다닌대요.”

“그럼 본거지랄 게 딱히 없다는 말이구나.”

“네. 그런 것 같아요.”

생각보다 더 골치가 아팠다. 어떤 수채가 특표들을 노렸는지는 고사하고, 당장 수채가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니.

‘산적들과 비슷할 거라 여겼건만, 완전히 착각이었군.’

하기야 거꾸로 생각하면 산채를 그리 쉽게 찾아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편에 임소병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개방은 어떻다 하더냐?”

“개방의 정보도 강 위까지는 닿을 수 없는 모양입니다. 물길 위에서 벌어진 일은 본인들도 알 도리가 없답니다.”

“……응?”

백상이 송구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어찌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게, 개방의 정보력은 전 중원에 퍼져 있는 거지들에게서 나오는 건데, 거지가 배를 탈 일이 있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백천이 백상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구나.”

골치가 다 지끈거렸다.

“수적들이 가끔씩 상선은 물론이고, 관선까지도 습격하는데 왜 소탕이 안 되나 했더니.”

이 넓디넓은 장강에서 심심하면 자리를 바꾸는 수채를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어찌한다?’

실종자의 종적을 찾는 데에도 실패했다.

이리 찾아도 안 나온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정말 물에 빠져 죽었거나, 아니면 포로가 되어 수채로 끌려갔거나.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특표를 습격한 수채를 특정하고, 그 본거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사형.”

“응?”

그때 윤종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 생각에, 이런 식으로는 어렵습니다.”

“…….”

“애초에 물 밖과 물 위를 오가는 수적을 찾는 게 가능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가만 듣던 조걸이 양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두르더니 투덜거렸다.

“에이. 내가 부자면 배만 타도 수적들이 알아서 찾아올 텐데. 돈이 없으니 내가 수적을 찾아다녀야 하네.”

그런데 돌연 백천이 조걸을 획 바라보며 빠르게 물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돈이 없어서 아쉽다고요.”

“아니, 그 전에.”

“예? 아……. 제가 부자면 수적들이 알아서 찾아올 거라고…….”

잠깐 중얼대던 백천이 화색을 띠더니 씨익 웃었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계속 시름에 잠겨 있던 얼굴이 어느새 환했다.

“계획을 바꾸자.”

“어떻게요?”

“조걸이의 말대로다. 우리가 찾을 수 없다면 저쪽에서 찾아오게 해야지.”

순간 제자들은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백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청명이 놈의 것과 비슷했다.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