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52화 (750/1,567)

752화. 제자는 괜찮습니다! (2)

“저기…….”

“…….”

“청명아?”

“…….”

“하하. 네가 이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어색하구나. 그렇지 않니?”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 따윈 없었다. 현종의 등에선 식은땀이 배어났다.

장문인 처소에 앉은 청명은 몸을 반쯤 돌려 벽에 걸린 매화 족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종이 내심 한탄했다.

‘저건 왜 가져다 놔 가지고.’

그냥 벽만 있으면 뚫어져라 보기도 어색하고 심심할 텐데 쓸데없이 족자가 걸어 둬서 청명에게 고개를 돌릴 명분을 줘 버렸다.

“그…… 하하. 매화가 참 예쁘지 않느냐?”

“네, 예쁘네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하는 청명을 보며 현종이 억지로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

일단 입을 떼며 슬쩍 주변을 보니 현상도 현영도 그저 뚱한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그 과정이야 어쨌든 청명이 가는 걸 금했던 건 현종이었으니 해결도 직접 하라는 듯했다.

‘망할 것들.’

한숨을 푹 내쉰 현종은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청명을 바라보았다. 뺨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양새가, 영 쉽게 해결될 것 같질 않았다.

“그…… 청명아.”

“예?”

고개는 돌리고 말해야지. 응?

“너도 알다시피, 세상일이라는 게 예측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시시때때로 변하고…… 그렇지 않느냐?”

“그렇지요, 장문인.”

그나마 온건한 대답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현종이 화색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러니 어쩌겠느냐. 문제가 생겼으니 해결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 화산에서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 너 아니더냐.”

“사숙이겠죠.”

“……너라니까.”

“에이, 사숙이죠.”

이 새끼, 눈치는 빨라 가지고…….

현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 그렇지. 내가 백천이도 믿지.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둘 순 없구나. 너도 알다시피 아직 다들 미욱하지 않으냐.”

“…….”

“너희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동의를 구하며 돌아보니 장로들은 뚱한 표정으로 영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현종이 도끼눈을 뜨자 둘 다 찔끔하여 떨떠름하게 말을 보탰다.

“그…렇지요. 아직 그놈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에이. 말이 바른 말이지. 그놈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청명이가 나서 줘야 일이 제대로 굴러가는 거지!”

움찔.

그 순간 현종은 귀신같이 보았다.

아주 슬쩍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청명의 귀가 미묘하게 펄럭이는 것을.

‘지금이다!’

“나 역시 그렇구나.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 아이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일이 너무 커졌구나. 이럴 때는 역시 네가 나서 주어야지! 화산제일검인 네가!”

노련한 현종의 눈에는 보였다. 청명의 입꼬리와 광대가 금방이라도 볼록 솟아오를 듯 움찔움찔하는 것이.

‘거의 됐다.’

“청명아. 그러니 네가 한번 나서 주지 않겠느냐?”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완전히 원위치시켰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입가에 산뜻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돼, 됐…….’

“장문인.”

“그래. 그래, 청명아!”

기쁘게 화답하는 현종에게 청명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제자는 괜찮습니다!”

“……응?”

“사숙이 잘 알아서 하겠죠.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장문인이 그리 신뢰하고 보내셨는데, 잘해야죠.”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이 슬쩍 엉덩이를 뗐다.

“그럼 저는 백매관 청소가 남아 있어서 이만.”

“자, 잠깐만!”

설마 했더니 정말 나가 버릴 듯 일어섰다. 현종은 기겁하여 아예 그의 허리춤을 잡고 늘어졌다.

“왜 이러십니까, 장문인!”

“아, 앉아 보거라! 일단 앉아서! 응? 청명아 일단 앉고 이야기하자!”

“저는 더 할 이야기가 없는뎁쇼! 이러지 마십시오! 바지 내려갑니다.”

“그럼 앉으면 될 것 아니더냐!”

“에잉!”

결국 청명이 못 이긴 척 도로 앉으니 그제야 현종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청명의 허리춤을 놓았다.

“아니, 네가 이러는 이유도 내 이해하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았느냐.”

“아니, 장문인!”

“으, 응?”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현종이 움찔했다.

“애초에! 예? 제자들이 저 없이 역경을 겪어야 성장하고 자립심을 기를 수 있단 게 장문인의 말씀이셨잖습니까!”

“그, 그랬지.”

“이게 그 역경 아닙니까! 역경! 자립심을 키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현종이 멍하니 청명을 보았다.

“그러실 거면 애초에 시작을 하질 말지! 무슨 일이든 저들끼리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시고, 상황 좀 바뀌었다고 또 쪼르르 달려가서 해결해 주고!”

“맞지.”

“그렇지.”

현상과 현영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금세 현종의 핏발 선 눈 흘김에 꼬리를 말았다.

현종은 한숨을 쉬며 한층 더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청명아. 아이들만 생각하면 내 이러지 않는다. 네 말대로 그 위험을 딛고 더 성장해 오기를 바라겠지. 그런데 그곳에 양민들이 잡혀 있다고 하지 않느냐. 이들은 꼭 구해 내야 한다.”

하지만 청명은 쉬이 넘어가질 않았다. 오히려 거의 잡아먹을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니, 그런 것도 포함해서 역경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죠! 그래야 자립심이 길러질 것 아닙니까! 만만한 일만 해결해서야 자립심은 언제 길러진답니까.”

현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허허. 오늘따라 참 더럽게 맞는 말만 하는구나.

“장문인.”

“으응?”

“제가 가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장문인의 큰 뜻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

“화산을 위해서는 눈물을 참고 이러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저 역시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화산을 위한 것입니다.”

“……정말?”

“예! 제가 사심을 한 올이라도 품었다면 벼락을 맞아 죽…….”

쿠르르릉.

갑자기 하늘에서 들려온 천둥소리에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창 쪽을 획 바라보았다.

“……구름이 없는데?”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이…….”

청명만이 뺨을 파르르 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 진짜 이럴 거요, 장문사형?

- 제발 양심 좀 챙기거라, 이 새끼야! 양심!

청명이 안색을 싹 바꾸고 차분하게 말을 바꿨다.

“……조금은 있습니다, 사심. 하지만! 사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

“아무튼 저는 안 갈 테니, 장강으로 간 사숙이랑 사형들을 믿고 맡기시지요.”

“처, 청명아!”

청명이 결국 벌떡 일어나 문을 열자 현종이 다시 몸을 날렸다.

“에이! 놓으십시오! 장문인으로서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체통이 밥 먹여 주더냐!”

“에헤이! 놓으시라니까요! 바지 늘어납니다!”

“내가 잘못했다, 청명아! 사람들은 살리고 봐야 할 게 아니냐!”

현종의 처소 밖으로 연신 고성이 새어 나오자 문밖에서 가만 듣고 있던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옆에 선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예, 사숙.”

“귀 막아라.”

“……예.”

“쯧.”

벽에 기대앉은 청명의 삼방(三方)을 현자 배가 꽁꽁 에워쌌다.

“자자, 청명아. 일단 진정하고.”

“오죽하면 이러겠느냐.”

“화산에서 다른 제자들까지 끌고 가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그렇지. 한참 걸리지.”

“홀로 빠르게 가서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란 걸 알잖느냐.”

“그렇지, 그렇지. 청명이밖에 없지.”

협박처럼 보이는 설득을 이어 가던 현상과 현영이 가운데 선 현종을 흘겼다.

‘자꾸 맞장구만 치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하십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라는 불만이 확연하게 어려 있었다.

현종이 결국 한숨을 쉬며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청명아. 사람이 살다 보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실수를 하면 수습도 하는 법 아니더냐?”

“싸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고!”

“그렇지. 그렇지.”

현영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렇지가 거기서 왜 나옵니까!”

“어…….”

현종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지 않느냐. 네가 최고인 것을 어떡하느냐.”

청명의 볼이 살짝 실룩였다.

그 여세를 몰아 장로들이 최선을 다해 박수를 쳤다.

“옳지. 옳지! 믿을 건 청명이밖에 없지!”

“그래, 청명아. 장문인께서도 악의가 있어서 그러신 게 아니잖으냐. 그런 결정을 내리실 수 있었던 것도 위기 때는 네가 나서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위험할 땐 네가 다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니 과감한 결정도 할 수 있는 것이지.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결정이 다 네가 무척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미다.”

일단 청명의 얼굴이 반쯤 녹은 듯 보이자 장로 둘은 노련하게 그 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허. 이를 어찌할꼬. 청명이가 나서지 않으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이 없는데.”

“화산이 망하겠구나, 화산이 망하겠어. 장문인이 판단 한 번 잘못 내려서 화산이 망하겠어.”

“총기를 잃으셨네, 쯧쯧쯧.”

열심히 맞장구에 박수까지 치던 현종이 약간 묘한 시선으로 좌우의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놈들이 듣자듣자 하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명아. 네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그렇지. 청명이가 마음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넓지!”

청명의 이목구비는 아주 정신이 없었다. 귀는 자꾸 빨개지고 눈은 웃는 걸 참느라 부릅뜬 채였고, 콧구멍도 벌름거리고, 자꾸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도 눌러야 하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크흐흠!”

크게 헛기침을 한 청명이 결국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쩔 수 없네요.”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장문인께서도 잘해 보려고 하시다가 이리된 건데 그걸 따져 묻는 건 제자의 도리가 아니겠죠.”

그럼 여태 한 건 뭐였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현종의 깊은 인내심 덕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사태만은 면했다.

“그, 그렇지. 역시 우리 청명이는 도기(道器)로구나.”

“헤헤. 그러고 보니 제가 화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장문인께서 그런 말을 하긴 하셨죠.”

“내가?”

“네.”

“미쳤었…….”

“아하하하하! 아이구, 우리 장문인 많이 피곤하신가 보다!”

현상과 현영이 거의 동시에 현종의 입을 막아 뒤로 끌어당겼다.

“읍읍!”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는 격언을 지켜 내지 못한 현종의 눈에 물기가 어룽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쩍 배를 내밀었다. 그러자 청명의 품 안에 있던 백아도 옷깃 사이로 고개를 쭉 내밀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

이제 하다못해 미물까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상황이 급하니 일단은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 그래. 청명아.”

“그리고 다음부터는 좀……. 하아……. 아뇨. 말해 뭐 하겠습니까. 제가 이해해야죠.”

“읍! 으읍! 읍!”

“다음부터는 한층 더 현명한 결정 부탁드리겠습니다, 장문인.”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거라.”

“하하하. 장문인도 기쁘신 모양이다. 이리 어깨춤을 출 만큼 좋으실까. 하하. 가만히 좀 계십시오! 하하하하!”

혼란과 기쁨이 난무하는 현장을 일별한 청명은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탁.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한 얼굴로 나온 그를 보며 운암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사숙. 제자, 장강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얼른 다녀오거라.”

“네. 히히힛!”

어느새 멀어진 청명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 발걸음이 흡사 경쾌하게 나는 듯했다. 그때 운암의 등 뒤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때려치워! 다 때려치워라, 이놈들아! 저놈 가지 말라고 해!”

“아, 가만히 좀 계십시오!”

“거 사람이 나이 들수록 철이 없어지네, 에이!”

세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소리를 들으며 운암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얘들아.”

“예, 사숙.”

“귀 막으라고…….”

“……예.”

우여곡절 끝에, 심술을 양볼에 빵빵하게 밀어 넣은 망종 놈이 장강을 향해 빛살같이 출발했다.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