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화.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어! (5)
“후욱! 후욱! 후욱! 후욱!”
땀방울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고, 젖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새하얀 백의 차림의 백천은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보보마다 단호함이 의지로 굳건했고,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더없는 결의를…….
“아, 잠깐! 잠깐만요!”
“응?”
백상의 고함 소리에 백천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고개만 뒤로 돌렸다.
“아, 아니! 좀 멈추시고!”
“으응?”
그제야 백천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멈추자마자 백상과 당소소가 그 자리에서 철푸덕 쓰러지듯 엎어졌다.
“헤엑! 헤엑! 헤에에엑!”
“아이고……. 아이고, 죽는다.”
한참을 헐떡인 백상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형! 누가 쫓아옵니까?”
“…….”
“청명이 놈도 없으니까 간만에 우리끼리 느긋하게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꽁지에 불 붙은 망아지처럼 이리 달리십니까?”
그 말에 백천이 어색한 얼굴로 촉촉하게 젖은 이마를 훔쳤다.
“이게 그…… 습관이 돼서 그렇구나.”
그러자 조걸과 윤종도 어색한 얼굴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천천히 가면 마음에 안정이 안 됩니다…….”
“뭐 끌고 가는 것도 없으니 괜히 조급하고……. 뭐라도 좀 끌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백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나?’ 하고 바라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나마 세 사람은 좀 나은 편이었다. 유이설은 ‘왜? 빨리 가는 게 뭐가 잘못됐는데요?’라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이러면 청명이 놈이 없는 게 의미가 없잖아?’
있으나 없으나 똑같이 굴 거면 대체 왜 떼어 놓고 왔는가?
“상황이 급박한 건 알겠지만, 이렇게 거품 물고 달릴 필요는 없잖습니까.”
“안다. 아는데…….”
“예?”
백천이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천천히 가면 마음이 불안하고 안심이 되질 않는구나.”
“…….”
“후딱 가서 빠르게 일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그런다.”
조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뭐가 자꾸 불안하고 초조해서 미치겠습니다. 뒤에서 누가 자꾸 따라오는 것도 같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신경쇠약이라도 온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세 사람을 보며 백상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뭔 원귀를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기껏 청명을 떼 놓고 왔는데도 이 사람들은 청명의 그림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형. 이렇게 계속 과하게 달리면, 저는 물론이고 소소도 퍼집니다. 좀 여유를 가지시고…….”
“아니!”
그때 밑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상이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헐떡대던 당소소가 어느새 고개를 번쩍 들고 이를 갈아붙이고 있었다. 그 이글대는 눈빛을 보면 범도 꼬랑지를 말고 오줌을 지리며 달아날 판이었다.
“이대로 가요!”
“사, 사질! 그러다 숨넘어가.”
“넘어가면 넘어가는 거고.”
당소소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응?”
“요즘 슬슬 저를 의원으로만 써먹고 검수로는 별 기대 안 하는 거!”
백천과 윤종이 움찔했다. 그녀의 칼날 같은 눈빛이 다름 아닌 그 둘에게 꽂혔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 발씩 뒤처지는 거지만, 이게 계속되다 보면 나중에 제가 짐이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소소야. 우리는 너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 너는 소중한 우리의…….”
“내가 그 꼴을 볼 것 같아요? 계속 달려요! 네 발로 달리다 안 되면 기어서라도 따라갈 거예요. 정 안 되면 뒤에서 머리채라도 잡고 늘어질 거예요!”
백천이 입을 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화산에 훈훈함이 어디 있냐.
“끙!”
당소소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출발하시죠!”
“아니다. 역시 조금만 쉬었다 가는 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사숙! 악착같이 따라갈 테니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출발하세요!”
“아, 아니. 너 말고.”
“네?”
당소소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상이 ‘난 때려 죽여도 더는 못 달리니까 두고 가든, 삶아 먹고 가든 니들 마음대로 해라’라는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당소소가 세상 한심한 얼굴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뭐! 왜! 나는 사무직이란 말이다!”
“……저 박쥐 같은 놈.”
백천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필요할 때는 재경각 사무직이었다가, 불리할 때는 당당한 화산의 검수다. 아주 대단한 간신 나셨다, 그렇죠?
‘예전에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기야, 생각해 보면 화산에 예전 같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지.
잠깐 생각에 잠겼던 백천이 슬그머니 윤종에게 시선을 던졌다.
“뭘 보십니까?”
“아니…….”
윤종의 질문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화산에 남은 놈들이 고생깨나 하고 있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윤종이 피식 웃고 말았다.
“고생하겠죠. 말려 줄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장문인에 사숙조들도 계시니 큰일이야 나겠습니까?”
“사고까지야 치지 않겠지만, 따라오지 못해 뿔이 난 그놈이 몽니를 얼마나 부릴지 생각하니 섬뜩하구나.”
“하하하. 그건 그러네요.”
마주 보며 웃던 화산의 제자들이 어색하게 웃음을 거두고 이미 까마득히 멀어진 화산 쪽을 슬쩍 보았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꾸나.”
“예, 사숙.”
“출발하자!”
“아, 아니! 조금만 쉬었다 가자니까요!”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이 녀석아. 얼마 안 남았다. 이제 곧 장강이다.”
“……하루 꼬박은 달려야 도착인뎁쇼?”
“하루면 금방이지.”
“예?”
그 순간 백상은 깨달았다.
청명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청명이 없어지니 확실히 알겠다. 이제 화산의 문제는 청명이 놈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휴!”
백상이 비척이며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헤엑! 헤엑! 헤에에엑! 아고, 죽겠네 진짜!”
헉헉대면서도 뒤로 열심히 따라붙는 백상의 기척을 느끼며 백천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 속도를 좀 더 높여 가자!”
“야, 이……!”
뒤에서 뭔가 험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백천은 굳이 신경을 두지 않았다.
* * *
“장강이네요.”
“음. 그렇구나.”
겨우겨우 장강에 도착한 백천이 긴 숨을 내뱉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장강의 경관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큰 강을 볼 일이 거의 없는 섬서 출신 화산파 제자들에게는 더더욱.
평소라면 이 넓디넓은 강을 보며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겠으나, 지금은 이 더없이 넓고 긴 강을 보며 즐거움보다는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이곳을 샅샅이 수색해야 한다는 건가?’
막막하다.
장강은 중원의 절반을 가로지를 정도로 길고, 그 폭은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 넓다. 이 너른 곳을 그들만으로 수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백상아.”
“…….”
“백상아?”
대답이 돌아오질 않아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평소처럼 옆에 서서 재빠르게 대답을 하는 백상이 아니라 바닥에 대자로 엎어져 경련하는 백상이었다.
“……괜찮니?”
“……사형만 아니면 진짜 콱…….”
“응?”
“끄응.”
백상이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먼지 범벅이 된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요?”
“……유령문의 제자들이 실종된 곳이 어디쯤이라고 했더냐?”
백상은 내가 알게 뭐냐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거 못 들으셨습니까? 장강 어딘가겠죠.”
우득.
백천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헌앙한 이마에 핏대가 솟은 걸을 보며 백상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그러니까…… 구강. 예. 그 구강쯤이라고 했습니다. 포양호 쪽으로 넘어가다가 변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
“아, 맞습니다! 구강이라고 했다니까요. 다른 이들이 실종된 부분도 이 근처가 맞습니다.”
“누가 뭐랬냐?”
백천이 주먹을 풀었다.
뭐 백상이 화날 만했던 건 사실이니까.
“쉴 틈도 안 주고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머리가 돌아가나. 그럴 거면 숨 돌릴 시간이라도 좀 주고 묻든지. 에이, 저 피도 눈물도…….”
그래서 백상이 들릴락 말락 한 크기로 구시렁거리는 것도 백천은 애써 무시했다.
“포양호라……. 그럼 제대로 왔군.”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물을 보며 백천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장강은 곳곳이 거대한 호수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호수들은 수적들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지역이었다.
우선 호수이니만큼 유속이 빠르지 않아 배들이 쉽게 달아날 수 없다. 그리고 호수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곳도 강폭이 일반적인 강보다 몇 배나 넓은 데다가 호수 역시 바다가 따로 없을 정도로 드넓어 수적들을 뒤쫓는 것 역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포양호 주변을 수색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사숙. 넓어도 너무 넓습니다. 이 넓은 곳을 저희끼리 수색할 수 있겠습니까?”
“다짜고짜 찾아다니면 죽도 밥도 안 되겠지.”
윤종의 물음에 백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
“예.”
“미리 개방에 연통을 넣어 뒀으니, 구강의 개방 지부에게 협조를 구해라. 혹여 최근 부상자를 수습한 이가 없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예, 사숙. 알겠습니다.”
“백상이는 조걸을 데리고, 주변 상인들을 통해 수소문해 보거라. 이 일이 우리에게만 벌어진 건 아닐 것이다. 혹여 최근에 수적들에게 당한 상인들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사형.”
“응?”
“제가 개방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얘 데리고는 일 못 합니다.”
백상의 말에 조걸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사숙.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제가 평소에 얼마나 사숙을 공경하고 따르는데요!”
“너는 지금이 공자님의 시대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공자님이 너를 봤으면 중원의 삼대유파가 불가 도가 속가가 아니라 불가 도가 유가로 바뀌었을 거다.”
그 말에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상상이 펼쳐졌다. 공자님이 부채를 들고 조걸의 대가리를 사정없이 깨 버리는 모습을 그려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거 정말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겠네.
“아무튼 그게 안 되면 차라리 저를 개방으로 혼자 보내 주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개방과 동맹에 가까운 관계라지만, 그쪽은 정보 단체입니다. 저희가 힘없고 돈 없을 때야 사정을 봐주었어도, 이제는 적당히 대가를 지불하는 게 옳습니다. 돈이 관련된 문제니 제가 가겠습니다.”
“음.”
“그리고 상인들을 수소문하는 일은 저보다 상가의 자식인 조걸이가 나을 겁…….”
“예?”
“설마요.”
“에이, 농담도.”
갑자기 쏟아지는 가당치도 않단 반응에 백상은 가만히 조걸을 보았다. 조걸은 어느새 한 발짝 멀어져서 먼 산을 보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지.’
가엽지도 않다.
“하면 그리하자꾸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걸이 구시렁대며 윤종 옆으로 붙었다.
“그럼 그건 윤종이가 하는 걸로 하고. 사매는 소소를 데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포양호 주변에 수채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 없는지 확인해 보거라. 특히 원래 있던 수채가 아니라 새로 생긴 수채가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예.”
유이설이 대답하자 당소소가 그녀 옆으로 바짝 붙어 팔짱을 끼고 당겼다. 무표정한 유이설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양민들에게는 유이설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소소가 있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숙. 그럼 사숙께서는 어디로 가실 계획이십니까?”
“나는…….”
백천이 고개를 돌려 장강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강으로 한번 나가 봐야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미리 겪어 둬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아무튼 한시가 급하니 지금 바로 움직이거라. 정보를 얻음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이 실종자를 찾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고.”
“예, 사숙!”
“네, 사형.”
“움직이자.”
화산의 제자들이 다들 흩어지자 백천은 천천히 몸을 돌려 장강 쪽을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애초에 생각한 것보다 일이 조금 더 심각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백천이 천천히 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모두 지쳤기 때문일까, 아니면 청명이 없어서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장강에 도착한 화산의 제자들 중 누구도, 멀리서 그들을 감시하는 어두운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