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화.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어! (4)
한 손에 차를 든 현종이 천천히 걸어 나와 대청마루에 앉았다.
어디선가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서늘한 바람이 손끝을 스쳤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쥔 채 현종은 인자한 얼굴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하구나.’
청정도량이라. 오늘의 화산은 그 말에 더없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맑디맑은 공기가 고요한 깊은 산중에 내려앉아 있다.
현종의 마음도 실로 평온하게 가라앉는 것만…….
‘어?’
잠깐만.
고요?
현종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고요하다고?’
화산이?
고개가 획 하고 돌아갔다. 다시 귀를 기울여 봐도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자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항상 들리던 사람 죽어 가는 비명 소리도 없다.
마치 화산이 통째로 비어 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이건 고요한 게 아닌데.’
……그래, 을씨년스럽다. 이 큰 화산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은가?
‘이럴 리가 없는데?’
물론 화산이라고 항상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저 청명이 놈이 제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어도 그래도 간간이 조용한 순간이 찾아오곤 하니까.
하지만 지금 청명이 놈이 이 화산에 있지 않은가?
청명이와 고요함이 공존한다는 것은 물과 기름이 뒤섞이고, 해와 달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나 같은 상황이다.
‘서, 설마?’
모골이 송연해진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놈이 화산을 빠져나간 것은 아니겠지?”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감시를 몇이나 붙여 놨다. 화산에 남은 이들이 그놈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자리를 비우고 사라진 걸 확인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그러니 일이 벌어졌다면 벌써 누군가 와서 보고를 했을 터.
“……그럼 화산을 빠져나간 건 아니라는 말인데.”
잠깐 고민하던 현종의 낯이 굳어졌다.
“아니. 아니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
그는 고요고 뭐고 찻잔을 팽개친 채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단숨에 백매관까지 들이닥쳐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마침 백매관의 거실에 모여 수군대던 청자 배들이 현종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자, 장문인!”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현종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장문이이인!”
“장문이이이인! 무서워 죽겠습니다!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무서워서 소화가 안 됩니다!”
당황한 현종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청명이! 청명이가 이상합니다.”
“약 먹은 것 같습니다!”
“곧 죽을 것 같다니까요!”
“뭐?”
이건 뭔 소리야? 약을 먹고 곧 죽다니?
“처, 청명이는 어디에 있느냐?”
“제 방에…….”
“비켜 보거라!”
놀란 현종이 허겁지겁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청명아!”
청명의 방문을 확 열어젖힌 그는 이내 움찔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뭐……. 뭐 이…… 이게 뭔…….”
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방이 지독하게 깨끗했다. 저 청명이 놈이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 깨끗한 방 안에 잡티 하나 묻지 않은 단정한 차림의 청명이 앉아 있었다.
“아, 장문인.”
“으, 응?”
“오셨습니까.”
현종을 보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현종의 얼굴은 더 희게 질렸다.
정자세로 인사를 한다고?
저 청명이 놈이?
하도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꺾으며 인사를 해 대서 ‘저놈은 사실 목이 앞으로 굽혀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청명이가 저리 바른 자세로 인사를 한다고?
그것도 저리 정중하게?
‘기, 기분 나빠.’
소름이 돋았다.
다른 놈이 저런다면 ‘이놈이 이제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하고 기뻐했겠으나, 청명이 어디 보통 놈이던가?
“뭐, 뭘 하고 있었느냐?”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장문인.”
스스로를 돌아봐?
네가?
- 아니! 내가 지금 달리기도 바빠 죽겠는데, 예? 성찰? 자아성차아아알? 그거 할 시간 있으면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죠! 지금 종남 새끼들이고 무당 새끼들이고 이 시간에도 칼을 싹싹 갈고 있을 텐데!
‘……분명 그랬는데.’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현종이 두 눈을 끔뻑이다가 청명의 옆에 펼쳐진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건 무엇이더냐?”
“아, 이건…….”
청명이 서책을 들어 보이며 공손히 답했다.
“도덕경입니다.”
“……뭐?”
“도덕경입니다, 장문인.”
청명의 손에 들려 있을 때 어울리지 않을 물건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그중 가장 어울리지 않을 물건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도경과 불경이었다.
그런데 그 도경이 지금 청명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그건 뭐 하러……?”
설마 백매관에 불 지르려는 건 아니겠지?
그때 입을 열었다. 실로 진중한 목소리였다.
“그동안 제가 수양에 너무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화산은 도문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도문의 제자, 즉 도사라면 검뿐만 아니라 도를 닦는 것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제 부족함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장문인.”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기꺼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청명이 놈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기껍기는커녕 전신에 소름이 돋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지옥에서 올라온 아수라가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헤헤 웃는 꼴을 보는 게 덜 괴이하지.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란 말인가?
“그걸 봤다고?”
“예. 장문인.”
“……청명아.”
“예.”
현종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살짝 언성을 높였다.
“이, 이런다고 내가 너를 보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이런 연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분명 수작질이다.
절대 사고를 치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 주어 지금이라도 오검을따라가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현종의 생각과는 달리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문인. 제자의 뜻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말투 뭐냐고! 그냥 평소처럼 이 새끼 저 새끼 하라고, 인마!
“그럼 따라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더냐?”
“도의 시작은 사람입니다.”
“…….”
“그리고 문파의 시작은 신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
무섭다.
너무 괴이하니 이제는 정말로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윤종이 진지할 때나 꺼낼 만한 말이 지금 저 청명이 놈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제가 정말 화산을 위한다면 사형제들을 믿어 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알량한 재주를 믿고 그들을 믿어 주지 못했습니다.”
“…….”
“이제야 미욱한 제자가 장문인의 깊은 뜻을 깨닫습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도의 시작인 것을. 제자가 아직 집착을 버리지 못했음을 아시고 장문인께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어찌 보답을 해야 할…….”
“그, 그만! 그만!”
결국 참다못한 현종이 청명에게 달려가 손을 와락 붙들었다.
“처, 청명아! 내가 잘못했다! 이러지 말거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장문인. 이 역시 제게 가르침을 주시려고…….”
“하, 하지 말라고오오오오오오!”
일평생 처음 겪는 공포를 직면한 현종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
현종은 부쩍 퀭해진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잠깐 그러다 말 것이라 생각했다.
일부러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곧 속내가 드러날 테니까. 애초에 사람이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하루 흘러서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청명이 놈은 여전히 괴이했다.
삭삭삭삭.
빗자루를 쓸고 산문 앞을 쓸고 있는 청명이 놈에게 청자 배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처, 청명아, 이러지 마라! 우리가 할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형들. 제가 화산의 막내인데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마, 막내는 소소지!”
“소소는 지금 화산에 없잖습니까. 그러니 배분상 제가 허드렛일을 하는 게 맞습니다.”
“처, 청명…….”
“사형들께서도 제게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예, 사형.”
“너한테?”
“예, 뭐가 이상하십니까?”
청자 배들은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차라리 때려라, 제발!’
‘진짜 왜 이러는 거냐고!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토할 것 같다. 소화불량이 낫질 않아.’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현자 배들의 표정 역시 괴이하게 뒤틀렸다.
“무슨…….”
현상이 답지 않게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역시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요?”
“…….”
“너무 충격을 받아 머리가 이상해졌다든가.”
“거 말조심하십시오! 이상해지다니! 반듯하고 좋기만 하구만!”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해 봤느냐?”
“문제는 뭔 문젭니까. 애가 반듯해지면 좋은 거지.”
청명이 제 수염을 몽땅 뽑아다 가발을 만들어 써도 귀엽다고 할 현영의 눈엔 그 기괴함이 보이질 않는 모양이었다.
‘반듯함이라.’
현종의 퀭한 눈에 절망의 빛이 돌았다.
청명을 사람으로 만드는 건 화산의 장문인인 그에게 가장 큰 목표이자 과업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화산을 과거와 같은 명문으로 만든다는 사명보다 더 힘들 일이기에 지금까지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그리고 현종은 모르겠지만, 청명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당대를 넘어 화산의 전대에서도 가장 큰 목표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지상 과제가 이루어진 현장을 보며, 정작 현종은 생각처럼 기쁘지도 보람차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벽력탄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아니, 그걸 아예 손에 들고 있는 것 같다.
“크흠. 애가 조금 힘없어 보이기는 하는군요.”
“그렇지? 네가 봐도 이상하지?”
“보약이라도 한 제 해 먹여야…….”
“…….”
현상이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명이 놈도 청명이 놈이지만, 이놈도 정말 큰일이라 생각하면서.
“장문인.”
한숨을 쉰 현상이 현종을 보며 말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보내시는 게…….”
“그…건 안 될 말이다.”
“청명이 놈이 사고를 치긴 하지만, 그 사고가 화산에 해가 된 적은 없었잖습니까?”
“단순히 청명이가 일을 키우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이러다 내가 물러나고 운암이나 백천이가 장문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거라. 청명이 녀석에게 하나하나 결정을 미루게 될 것 아니더냐?”
잠깐 그 광경을 그려 보던 현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현종만 해도 뭔가를 결정할 때, 청명이 놈의 의견이 없으면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어리고 배분이 낮은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차라리 녀석이 장문인이 된다면 모를까.”
“예에?”
“뭐라고요?”
“……아니. 모를까, 모를까. 시키겠다는 게 아니고.”
“휴우. 난 또…….”
“저는 장문인이 이번에야말로 화산을 말아먹을 각오를 하신 줄 알았습니다.”
저 현영마저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이게 참 안 될 일이긴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럴 일이 없으니 다른 이가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명이 녀석이 없이도 중한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하니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다. 특히나 운암이보다 백천이 녀석이 그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청명이를 보내지 않으신 거로군요.”
“그래. 백천이 역시 내 뜻을 알 것이다.”
현종이 단호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잘해 내겠지.’
청명이 없이 녀석들을 보낸 게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떠난 제자들 걱정에 속이 편하질 않지만…….
“청명아아아아아!”
“백매관은 우리가 치운다니까! 제발! 제발 그 걸레 내려놓거라!”
“아, 하지 말라고오오오!”
그런데 얘들아.
미안한데…… 지금 여기가 더 개판이다.
빨리 좀 돌아오거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