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화. 누가 뭘 건드렸다고? (4)
장문인의 처소에서 나온 황종의와 도운찬은 운암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처소에서 기다려도 올 청명이지만, 굳이 이리 운암을 따라 나서는 이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청명에게 전하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는 하지 못할 말도 있을 수 있으니까.
거침없이 걸어가는 운암의 뒤를 따르던 도운찬이 슬쩍 입을 열었다.
“운암 도장님.”
“예, 문주님.”
“청명 도장은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어찌……라고 하시면?”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는 듯 운암이 되묻자 도운찬이 조금 덧붙였다.
“일전에 천우맹의 개파식 때 잠시 뵙기는 했습니다만, 그 이후로도 시일이 좀 지나서 말입니다. 청명 도장은 여전하십니까?”
“…….”
그 ‘여전’이라는 말에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른 이들에 대해 그리 말한다면 그저 안부를 묻는 것에 지나지 않겠으나, 그 대상이 청명이라면 아무래도 의미가 아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운암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그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때 저 앞에서 한 무리의 화산 제자들이 운암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사숙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더냐, 이 새벽에?”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음.”
백천, 조걸, 윤종.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모두 장문인의 처소로 가 있거라. 장문인께서……. 아니, 아니다. 너희도 그냥 나를 따라오거라.”
“예?”
영문을 모르는 세 사람에게, 운암은 일이 어찌 된 모양인지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세 사람의 얼굴이 금세 아연해졌다.
“그래서 지금 청명이를 데리러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렇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도요.”
“어떻게든 제가…….”
세 사람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어렸다. 오히려 그 모습이 황종의와 도운찬 두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숙! 사람 좀 더 불러옵니까?”
“아직 해도 뜨기 전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겠느냐? 그놈이 그래도 경우는 아는……. 아니다. 아무래도 좀 더 불러야겠구나.”
“그놈도 백매관에 있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필요하면 옆방 놈들을 불러 쓰죠.”
“……청명이 놈 옆방에서 지내는 것도 지독한 형벌인데 어찌 그런 일까지 맡기겠느냐.”
“제 방이 청명이 옆방인데요?”
“넌 괜찮다.”
조걸은 뭔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려 들었지만 백천은 조걸과 놀아 줄 때가 아니라는 듯 단호히 고개를 젓고 운암을 향해 말했다.
“가시지요, 사숙.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사숙만은 확실하게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고맙구나.”
백천과 윤종, 조걸이 마치 운암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걷기 시작했다. 황종의야 황당하다는 듯 허허 웃어 버렸지만, 도운찬의 눈빛은 전혀 달랐다.
‘이거…….’
느껴진다.
정확하게 뭐라고 짚어 낼 수는 없지만, 이 세 사람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분명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젊은 무인들 특유의 활기가 크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뭐라 해야 할까…….
‘깊어졌다?’
이전의 이들을 보고 있으면 빠르게 흐르는 계곡물이 연상되었다. 더없이 맑고 깨끗하며 거침없는 모양새였다.
물론 지금도 그런 느낌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뭔가 크게 자리한 안정감이 함께 느껴졌다. 마치 산을 타고 쾌활하게 흐르던 물이 평지를 만나 더 크고 너른 강이 된 것처럼.
‘장문인도 이전과는 달리 느껴지더니, 이들 역시 그사이에 이리도 성장했단 말인가?’
도운찬은 그 변화에 새삼 놀랐다. 하지만…….
“일단 제가 어깨를 조질 테니 사형이 다리를 조지십시오.”
“그보다 뒤통수부터 까는 쪽이 현명하지 않을까?”
“진검 뽑아도 됩니까? 검집으로 때려서는 씨알도 안 먹힐 텐데.”
“그건 고민을 좀 해 보자꾸나. 필요하다면 뽑아야겠지.”
착각인가?
음, 착각이구나.
도운찬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백매관에 도착한 그들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맴돌았다.
스르릉.
“아니, 걸아. 그렇다고 검을 미리 뽑으면 어떻게 하냐?”
“……맞은 뒤에는 늦습니다.”
“일단 진정하고.”
가장 선두에 선 백천이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더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려 숨을 들이켠 그 순간.
컹! 컹컹! 컹!
왈! 왈왈왈왈! 왈왈!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잖이 당황한 도운찬과 황종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갑자기 웬 개 소리가…….”
“여기에 개도 키웁니까?”
“…….”
어쩐지 맥이 탁 풀려 버린 백천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들어가시죠.”
“예.”
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모두의 고개가 일제히 옆으로 삐딱하게 꺾였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꿈인가?’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앞만 바라보았다.
그들이 익히 아는 그 청명이 놈이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삐딱하게 앉아선 식탁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세상 나른해서 금방이라도 한숨 자 버릴 것 같은 얼굴인데, 이쯤이야 사실 늘상 짓고 다니는 표정이니 딱히 새로울 게 없었다.
그리고 새벽부터 손에 버젓이 들린 새하얀 호리병도 그리 색다를 게 없다. 저놈의 손에서 술병이 떨어지는 날을 세는 게, 그렇지 않은 날을 세는 것보다 더 빠를 테니까.
문제는 저 청명이 놈이 아니라 바로 그 앞에 있는 무언가였다.
‘저게 뭐지?’
도운찬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작고, 새하얗고…….
‘고양이?’
아니, 아닌데. 고양이도 아니고…… 개도 아니고.
‘담비?’
그래. 아무리 봐도 담비인 듯했다. 그런데 눈처럼 새하얀 담비가 짐승답지 않게 검은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앙증맞고 작은 앞발이 풍덩한 옷 밖으로 쏙 빠져나와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깜찍했다.
등 한복판에 새겨진 매화문양이 누군가가 저 짐승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 준 옷이라는 걸 확연히 증명하고 있었다.
‘옷 입은 담비라니.’
이것만으로도 황당하기 그지없을 텐데, 더 당황스러운 건 그 옷 입은 담비의 현재 상황이었다.
‘왜 담비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지?’
아니, 그 전에 담비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 지는 자세를 취할 수가 있나? 그걸 사람이 시킬 수는 있고?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눈으로 보면서도 사실 믿을 수가 없다.
“거 씨, 또 팔 내려오지?”
끼이이잉.
“그래. 내려 봐, 내려 봐. 날도 추워지는데 슬슬 목도리 하나 필요하다 싶었지.”
슬그머니 내려오던 담비의 팔이 다시 격하게 위로 올라간다. 완벽한 정자세를 갖춘 담비가 바짝 엉덩이를 올리자 술을 꼴꼴 넘긴 청명이 인상을 왈칵 구겼다.
“내가 관리 똑바로 하라고 했어, 안 했어?”
끼잉.
“아니. 뭔 놈의 개새끼들이 낮밤을 모르고 짖어 대? 내가 해 떨어지면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 안 그래도 화산에 개가 하도 돌아다녀서 심란한데, 자다가 개 소리에 깨야겠어? 어?”
“…….”
그 광경을 보던 도운찬과 황종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모르겠다.’
‘이해하려 들지 말자.’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들의 상식을 깔끔하게 벗어났다. 대체 어떤 생각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뭐? 영물? 영물은 얼어 뒈질. 개도 감당 못 하는 게 뭔 영물이라……. 뭐라고, 인마? 네 일? 네가 화산에서 밥 처먹고 하는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거라도 해야지! 원래 일하지 않는 짐승은 먹지도 못하는 거야! 확 그냥!”
그래. 옳은 말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일을 해야 밥을 먹지.
하지만 그 말이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술이나 홀짝이는 놈의 주둥이에서 나오니 뭔가 느낌이 기묘했다.
더구나 그 말을 듣는 쪽도 기괴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기상.”
머리를 박고 있던 담비가 벌떡 일어났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듯 몸을 일자로 세운 담비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청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내가 지켜본다.”
하악!
“다음에 또 사람 자는데 개 소리 들리면 그날로 개고 담비고 다 아작 나는 거야. 알았어?”
담비가 고개를 위아래로 격하게 끄덕거렸다.
“위치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비가 도도도도 달려 백매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개들의 비명이 구슬프게 울리기 시작했다.
“쯧. 꼭 이렇게 말을 해야…….”
혀를 차며 고개를 획 돌린 청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언제 왔어?”
“…….”
“어. 소단주님도 오셨네요? 응? 문주님도? 오늘 무슨 날인가? 이 이른 시간부터.”
“…….”
“이야, 반갑네요.”
“…….”
이곳에 올 때까지는 참 할 말이 많았다.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많던 할 말이 조금도 생각나질 않았다. 사람이 너무 황당한 걸 보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일로?”
“아, 그게…….”
말문이 막히고 만 두 사람은 자연스레 운암을 돌아보았다.
운암이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청명아.”
“네?”
“……문제가 생겼다.”
“……그러니까.”
눈이 웃고 있다. 그래, 분명 눈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꼬리가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게다가 부자연스럽게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양이, 누구도 저 표정을 ‘미소’라 부르지 못할 듯싶었다.
“누가 뭘 건드렸다고?”
“……들으셨다시피…….”
청명이 눈을 질끈 감으며 묻자 황종의가 조심스레 답했다.
“수적들이 표행을…….”
“……그러니까…….”
청명이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초승달처럼 휘어 있던 눈은 어느새 독사처럼 반질거리고 있었다.
‘……오줌 지리겠네.’
‘오늘따라 쟤 눈동자가 왜 저리 작아 보이냐.’
‘역시 사파로 갔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성공하지 않았을까? 저 새끼는 왜 굳이 여기로 온 걸까?’
고작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적성에 대한 의심을 하기에 충분했다.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아 대었다.
“장강 수적 새끼들이 지금 내 돈줄……. 아니, 우리 형제들을 건드렸다 이 말이죠, 지금?”
불쑥 잠깐 튀어나왔던 청명의 본심을 모두가 애써 외면했다.
“그렇다. 아무래도 상황을 같이 논의해 봐야 할 것 같구나.”
“논의? 논의는 무슨 논의요?”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남의 돈줄……. 아니, 친구에게 손을 댔으면 지들은 모가지를 내놓는 게 강호의 율법이지! 논의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그냥 당장에 싹 잡아다가 물속에 수장시켜 버려야지!”
“…….”
“수로채?”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댈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아니, 산적 새끼들 해결해 놓으니까 이젠 수적들이 난리네. 오냐, 그래. 어디 장강 한번 피바다로 만들어 보자. 물고기들 아주 배 터지겠네.”
누가 도사이고, 누가 강도인가.
모두가 그런 근본적인 의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걸쳐 둔 암향매화검을 움켜잡았다.
“문주님.”
“예?”
“아직 실종된 사람이 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청명의 얼굴이 살짝 스산해졌다.
“서두르죠. 빨리 가면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청명은 두말없이 백매관을 나섰다. 말없이 그 뒷모습을 보던 화산의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