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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43화 (741/1,567)

743화. 누가 뭘 건드렸다고? (3)

황종의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몇 번이나 들어와 본 적 있는 익숙한 방이었다.

기본적으로 화산파 정도 되는 문파는 외인을 맞이하기 위한 접객청이 따로 있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니 문파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장문인의 처소는 외인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종은 굳이 접객청을 따로 두지 않고, 웬만한 대소사를 자신의 처소에서 처리했다. 때문에 황종의도 장문인의 처소에 몇 번이나 들어와 본 것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현종이 없는 처소에 앉아 이리 오래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에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방 안의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소탈하구나.’

새삼스럽다.

화산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가 청명을 알게 되고, 황문약을 따라 화산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처음 화산에 올랐던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다 쓰러져 가던 화산의 외양이 천하 어느 문파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해졌음에도, 이 방만큼은 그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없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방을 치장하는 족자 하나 보이질 않는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방의 주인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한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참으로 대단하시구나.’

사람이란 보통 자리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종은 잊혀 가던 섬서 작은 문파의 장문인일 때나, 천하를 호령하는 천우맹의 수장, 대 화산파의 장문인일 때나 바뀐 것이 없었다.

숱한 사람을 상대하는 황종의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새삼 현종에 대한 존경심이 물씬 피어올랐다.

“장문인께서는…….”

하지만 옆에 앉은 유령문주 도운찬에겐 그런 광경을 보고 감탄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는 초조한 얼굴로 장문인께선 언제 오시느냐 하며 운암을 연신 재촉해 댔다.

“곧 오실 겁니다.”

“……이 새벽에 어딜 가신 것입니까?”

“죄송합니다. 장문인께서는 보통 이 시간에 개인 수련을 하시는지라……. 제자를 보냈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왜 이 새벽부터…….”

황종의가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불만을 토로하던 도운찬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원칙으로 따지자면 이 새벽에 산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들이 무례를 저지른 것이 맞다. 그런데 주인이 어디 갔냐고 닦달까지 해 댄다면 이는 정말 과도한 무례였다.

“휴우…….”

도운찬이 예의를 모르는 자라 이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초조하고 다급하다 보니 간단한 예의조차도 차릴 겨를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뿐이었다.

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던 바로 그때였다.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현종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황종의와 도운찬, 그리고 그들을 수행하러 온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객이 들 것이라 생각하지 못해서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어찌 무례라 하십니까, 장문인. 이 새벽에 허락 없이 산문을 두드린 무례를 탓하지 않으시는 것만 해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종의와 도운찬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현종이 마주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받고는 재빨리 걸어 상석에 가 앉았다.

“앉으시지요.”

“예, 장문인.”

자리에 앉은 도운찬은 재빨리 입을 열려 했다. 마음이 워낙 다급하다 보니 현종의 말을 기다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금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

정좌를 하고 앉은 현종에게서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져서였다.

분명 강압적이지는 않으나 부드럽게 사방을 내리누르는 듯한 힘이…….

‘그러고 보니 풍채도 더 좋아지신 것 같지 않은가?’

천우맹 개파식 때에 만난 것이 마지막이니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겠으나 사람이 이렇게 변할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은 아닐진대, 그 의아한 변화에 도운찬이 두 눈을 끔뻑였다.

그때 현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 이른 시간부터 저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심상찮은 일이 생긴 듯한데, 그 연유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예, 장문인. 그게…….”

황종의가 시선을 슬쩍 도운찬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이 일은 도운찬이 직접 설명하는 것이 나을 듯해서였다. 그러자 도운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은하표행의 특표들이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종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지금…… 습격이라 하셨습니까?”

“예. 그게…….”

그때 황종의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다소 격앙된 도운찬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첨언을 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습격이라기보다는 방해를 받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운찬이 막막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중원 남부로 표물을 전달하기 위해 장강을 건너는 표사들이 수적들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

“벌써 당한 아이들이 다섯이 넘습니다. 그중 셋은 표물을 뺏기고 목숨은 건져 왔지만, 둘은 행적이 묘연합니다. 아마도…….”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장강을 건너다 행적이 묘연해졌다면 그 결과야 빤하다. 저 넓은 장강에 던져진다면 그 시신을 찾는 것이 힘든 것이 당연하니까. 혹여 요행히 살아 있다 한들, 큰 부상을 입어 복귀를 할 형편이 아니라는 의미일 터.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도 대충 상황을 짐작한 현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단 말입니까. 그동안은 딱히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황종의가 침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첫째는 은하표행의 특표가 너무도 유명해졌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표물의 수를 늘리기 위해 저희가 조장한 면도 있습니다만, 그걸 감안하고도 은하표행이 귀한 물건을 옮긴다는 소문이 너무 많이 퍼졌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일리가 있다는 듯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표물의 양이 많아지고 그 지역이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은하표행의 표행은 북경에서 사천 등지로 향하는 표물이 주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많은 고관들이 물건을 맡기는 통에 남경과 항주, 심지어는 광주까지 표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황종의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사천으로 가는 표행은 굳이 장강을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보통의 표행이라면 물길을 타고 가는 것이 빠르지만, 유령문의 문도들은 해로보다 육지를 주파하는 것이 더 빠르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굳이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으음, 그렇지요.”

“하지만 남경이나 항주, 광주는 장강을 건너지 않으면 중원을 반쯤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장강을 건너야 하지요.”

현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은 동해부터 하남의 동정호까지 이어진다.

항주는 위치상 거의 동해에 붙어 있다. 장강을 건너지 않고 북경의 표물을 항주에 전하기 위해서는 중원의 절반이나 되는 거리를 빙 둘러 향해야 한다.

이건 과도한 낭비였다.

“표물을 운송하기 위해서는 장강을 도하해야 하는데…… 수적들이 그 표물을 노린다.”

“예, 그렇습니다.”

현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황종의와 도운찬을 바라보았다. 황종의의 얼굴은 차게 굳어 있었고, 도운찬은 아예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내 상황은 알겠소이다. 그럼 두 분께서는 이 일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겠소이까?”

현종의 물음에 황종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장문인.”

“말씀해 보십시오.”

“아무래도 장강수로십팔채에서 은하표행을 표적 삼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인즉슨, 앞으로도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겠지요.”

“은하표행은 단기간에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 배상액을 일반적인 표행보다 몇 배 더 높게 책정했습니다. 지금까지야 벌어 둔 돈이 있으니 크게 무리가 없지만, 이런 일이 몇 번 더 벌어진다면 더 이상 배상액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황종의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하여 장강을 건너지 않고 우회하여 표물을 운송하는 방식도 생각했으나, 아무리 고려해 봐도 그건 어렵습니다. 장강을 우회하며 늘어나는 비용 같은 건 감수할 수 있지만, 은하표행이 급격하게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인 신속함을 잃게 됩니다.”

“……신속하지 않은 특표는 더는 특표가 아니다.”

“정확합니다. 그리되면 북경의 고관들도 더는 은하표행에 물건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현종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 일에 은하표행의 존폐가 걸려 있을 수도 있다.

“결국은 장강을 피해 없이 건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장문인.”

현종은 도운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으음. 문주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장문인.”

도운찬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했다.

“제자들이 다쳤습니다.”

“…….”

“심지어 그중 몇 놈은 생사조차 불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나…… 장문인. 이것만은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처음 이 표행을 시작한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설사 우리가 표물을 잃더라도 나서서 그 표물을 되찾아 줄 곳이 있다. 그곳이 화산이다.”

“…….”

“장문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십시오.”

현종은 잠깐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타닥. 타닥.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등불 타들어 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현종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여…….”

모두가 긴장한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사업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 가며 사업을 지속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순간 황종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쯤에서 은하표행을 접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종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압니다.”

정광 어린 두 눈이 눈앞의 두 객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유령문은 화산의 친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표물을 잃은 것도, 큰 손해를 본 것도 아닙니다. 화산의 친구가 타문의 공격으로 다치고 실종되었다. 지금 가장 중한 건 바로 이것입니다.”

“자, 장문인!”

도운찬이 순간 감읍하여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서 달라 어찌 말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내 제자들을 공격한 놈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지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현종이 먼저 나서서 이 말을 해 준 것이다.

“화산은 친우의 일을 눈감고 넘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아니어야 합니다.”

현종의 얼굴은 다른 여지도 없어 보일 만큼 단호했다.

“화산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문인!”

“감사합니다, 장문인.”

“다만!”

현종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화산의 장문인이라고는 하나, 이 일이 불러올 여파를 감안한다면, 저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문파의 중진들과 제자들을 불러 상의하고자 하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장문인! 당연한 일입니다.”

도운찬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현종의 말이 옳아서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운암아, 가서 제자들을…….”

“장문인.”

“음?”

현종이 무어라 더 지시하기도 전에 도운찬이 다급하게 말했다.

“화산신룡은 제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가서 먼저 상황을 전하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

“안 되겠습니까?”

“그…… 안 될 건……. 예, 안 될 건 없는데…… 굳이?”

현종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자 황종의가 도운찬을 거들고 나섰다.

“여기에서 직접 듣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

현종은 슬쩍 청명이 놈이 이곳에 와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보일 반응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시지요.”

“예, 장문인.”

“운암아.”

“예.”

“이분들을 청명이에게 모셔다 드리거라.”

“예, 장문인.”

지체할 것 없이 몸을 일으키는 두 사람을 보던 현종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예?”

“몇몇 놈들을 같이 데려가거라. 괜히 전각 다 부서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도운찬과 황종의의 머릿속엔 같은 생각이 스쳤다.

‘변한 게 없는 모양이네.’

‘참…… 초지일관하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사실이 다행이다 싶은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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