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42화 (740/1,567)

742화. 누가 뭘 건드렸다고? (2)

소정복은 본능적으로 등에 맨 표물 상자를 움켜잡았다.

표사에게 있어서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고, 절대 뺏겨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뭘 어쩔 도리가 없다.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은 달아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게 특표가 나르는 표물인 모양이로군. 북경의 고관대작들이 비싼 물건을 맡긴다지?”

“흐흐. 하나만 있어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을 만큼 귀한 물건들을 주로 나른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구경이라도 해 보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수적들이 음흉하게 웃어 대자 소정복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는 양손을 내밀어 정중히 포권 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은하표행의 특표. 소정복입니다.”

“맞군.”

사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은하표행과 장강 영웅들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례가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더 해 드릴 터이니 굳이 문제를 빚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제라…….”

잠깐 말을 곱씹던 사내가 하핫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릴 어떻게 하겠다는 듯이 들리는군?”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

살짝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소정복이 손바닥에 흥건히 고인 땀을 바지춤에 닦고 말을 이어 갔다.

“쭉 좋은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을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은하상단은 물론 화산파 역시 수로채와 관계가 나쁘지 않은 걸로 알고…….”

“화산파?”

사내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그러니까, 네 뒤에 은하상단과 화산파가 있으니 큰코다치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물러서라?”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례는 제가…….”

“사례라 좋지. 나도 그리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니야. 그래 준다면 나도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감사합니다.”

소정복이 얼른 품 안에서 전낭을 꺼냈다.

돈보다는 표물을 보호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은하상단이라면 사정을 듣고 이 정도 돈은 보전해 줄 게 분명하다.

하나, 일은 소정복의 생각만큼 그리 쉽게 풀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아, 그게 아니지.”

“……예?”

“그 정도 돈으로는 평범한 사람의 목숨 값 정도밖에는 안 되지. 은하표행의 특표쯤 되면 비싼 몸이 아닌가?”

“……그럼……?”

“어려울 것 없지. 지금 등에 짊어지고 있는 그 상자 정도면 심심한 사례가 될 것 같군.”

소정복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해를 못 하는군.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정하는 거지.”

사내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소정복을 향해 다가섰다.

“자, 어쩔 텐가? 내놓을 텐가? 아니면…….”

소정복은 표물이 든 상자를 움켜잡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그가 받은 교육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도 분명 존재했다.

잠시 후, 그는 결국 한숨을 쉬며 등에 짊어지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앞으로 내밀었다.

“음?”

“가져가십시오.”

은하표행의 철칙.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

표물이 귀하지만, 표사는 그보다 더 귀하다. 표물 때문에 문제가 벌어질 것 같으면 미련 없이 포기하라.

“하핫. 특표는 표물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다더니, 다 헛소문이었던 모양이야?”

“목숨보다 귀한 게 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맞는 말이야. 마음에 드는군.”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소정복이 내민 상자를 받아 뒤로 넘겼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수적이 달려와 받아 챙겼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다행이로군.”

툭툭.

바로 앞까지 온 사내가 소정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흡사 칭찬하는 듯 조롱하는 손짓이었다.

“자네와 나는 통하는 게 많은 것 같아. 특히나 목숨을 중요히 여긴다는 점이 비슷하지.”

“…….”

“그러니 자네도 이해할 것이라고 믿네.”

“예?”

파앗!

순간 사내의 소매에서 마치 매의 발톱과도 같은 거무튀튀한 삼지조(三指爪)가 튀어 나왔다. 그는 그 삼지조를 빛살처럼 소정복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다.

콰드드득!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소정복의 입에서 참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날이 세 치는 될 듯한 긴 발톱이 그의 옆구리를 꿰뚫고 박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끅……. 끄윽…….”

고통에 덜덜 떨며 소정복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괴로워하는 소정복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째서……?”

“생각해 보게나.”

사내가 달래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이대로 자네가 살아 돌아간다면 쪼르르 달려가 상부에 고할 게 아닌가? 그럼 당연히 이 일이 화산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

“그럼 그 화산파가 가만히 있겠는가? 물론 나는 화산파 따위를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란 말이지.”

“그, 그런…….”

우드드득!

사내는 소정복의 옆구리에 박아 넣은 삼지조를 아예 콱 비틀었다. 옆구리에 박힌 세 개의 날이 살과 내장을 갈라 냈다.

“어어……. 억…….”

눈이 뒤집힐 만큼 커다란 고통에 소정복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었다.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몸이 크게 휘청였다.

“장강의 물고기들도 굶주렸을 테니 보시한다고 생각하시게. 그동안 돈은 원 없이 벌었을 테니 미련은 없을 테지.”

“화, 화산이 반드시…….”

“아아, 그래.”

텅!

사내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소정복을 가볍게 밀쳤다. 힘없는 몸이 비틀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난간에 걸렸다.

“그리 믿고 가게나.”

마침내 옆구리에서 삼지조가 뽑혀 나왔다. 소정복의 몸은 힘을 모두 잃고 배 아래로 추락했다.

풍덩!

새하얀 포말이 일더니 이내 붉은 피가 수면 위로 번져 나갔다.

멀쩡한 몸이어도 이 넓은 강 중앙에 빠진다면 살아날 길이 없을 텐데, 저토록 큰 부상을 입은 몸이라면 그 결과야 빤한 것이다.

“흐음.”

사내는 삼지조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몸을 돌렸다.

“꼭 실력도 없는 놈들이 뒷배를 믿고 설친단 말이지. 강 위에서는 오로지 실력만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수적들이 낄낄대며 웃어 젖혔다.

“타주(舵主).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음?”

“다 보지 않았습니까.”

“흐음.”

타주라 불린 사내는 묘한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저 입만 없앤다고 될 일이 아니지. 이들을 어찌 한다…….”

“다 죽입니까?”

수적들이 병장기를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다.

승객들과 선원들이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사람 하나가 강에 떨어져 죽는 걸 본 셈이니 그 공포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 죽여 강에 던진다고 해도 시체 두엇이야 떠오르겠지. 그럼 누군가는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테고…….”

잠깐 고민하던 사내가 피식 웃었다.

“배를 통째로 끌고 간다. 이국(夷國)에 노예로 팔면 돈이 좀 되겠지. 반항하는 이만 죽여라.”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적들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아아아악!”

“살려 주십시오! 저는 집에 가족들이 있습니다!”

“보, 보내 주세요, 제발!”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즐겁게 감상하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수적에게 손짓하여 표물 상자를 다시 받아 든 그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 중얼거렸다.

“귀한 걸 운송하려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설마 날로 돈을 벌 생각은 아니었겠지? 응?”

울려 퍼지는 비명 속에서 사내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꾸르르르륵.

돛을 편 두 배가 한참 멀어진 강의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끄윽…….”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소정복은 머리만 내민 채로 연신 물을 토해 내었다.

‘알려야……. 알려야 해…….’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자맥질하여 강가로 향하던 소정복은 이내 맥없이 다시 물속으로 잠겨 갔다.

“푸아아앗!”

필사적으로 용을 썼지만 의식이 자꾸만 툭툭 끊어지고 멀어져만 갔다.

‘화산에……. 알려…….’

이윽고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소정복의 몸이 차디찬 장강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떠내려갔다.

* * *

화산의 산문 앞.

“아우, 더럽게 춥다.”

“으으. 새벽 산 추위는 적응도 안 돼.”

번을 서던 청자 배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학을 익힌 몸이라고는 하지만, 산속의 겨울은 살을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간밤에 눈이 내릴 때는 좀 덜 춥다 싶었는데 눈이 그치고 나니 칼바람이 겨드랑이를 연신 찌르고 할퀴었다. 안 그래도 산세가 험해 바람이 심한 화산이다 보니, 느껴지는 추위는 실제보다도 더했다.

“여기도 이렇게 추운데 북해는 얼마나 추운 거야?”

“말도 마라. 북해에 다녀온 사형들은 요즘도 여름 무복 입고 다니시더라.”

“진짜?”

“얼마 전에 조걸 사형은 계곡물에서 수영도 하던데? 따뜻하다고?”

“……그건 그냥 미친 거 아닌가?”

“…….”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북해에 다녀와서 그렇구나 할 텐데 조걸 사형이면 북해에 안 다녀와도 그럴 것 같지 않아?”

“……듣고 보니.”

예전이었다면 굳이 이 이른 새벽부터 추위를 견뎌 가며 번을 설 필요는 없었겠지만, 이제는 화산을 오가는 이들이 워낙 많아지다 보니 필수가 되었다.

그러니 춥기는 해도 번을 선다는 것 자체에는 딱히 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이 지루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

“으, 교대 시간이 언제지?”

“금방이야.”

“차라리 이 시간에 수련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번 서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이 시간이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다섯 번은 펼쳐 볼 수 있는데.”

“뭐야? 다섯 번밖에 못해? 그렇게 느려서 어디 파리나 잡겠어? 나는 이 시간이면 열 번은 펼친다.”

“쯧쯧쯧. 멋모르는 소리 하네. 하수는 빨리 펼치는 데 집착하고, 고수는 정확하게 펼치는 데 집착하는 거다. 내가 너처럼 대충 검을 쓰면 열댓 번을 펼쳐 볼 수 있어.”

“아아, 고수? 그래서 저번에 나한테 그렇게 발리셨나?”

“그때는 내가 몸이 안 좋았다니까! 야, 다시 붙어.”

“얼마든지.”

옥신각신하며 으르렁대고 있는데, 문득 한 명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응?”

“왜?”

“저기 누가 오는 것 같지 않아?”

“이 시간에 오긴 누가 온다고. 아직 해도 안 떴구만.”

“아니, 저기 봐.”

그가 가리킨 건 화산의 제자들이 이용하는 절벽 쪽 길이 아니라 그 옆에 난 완만한 길이었다. 얼마 전에 재정비를 해서 넓혀 둔 곳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과연 그쪽에서 거뭇한 형체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시간에 화산을 오르는 이가 딱히 좋은 의도로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타종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바로 그때 선두에서 선 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소단주님?”

은하상단의 소단주 황종의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른 시간이 무슨 일이십니까?”

“안에 말씀 고해 주게나.”

“예?”

설명을 할 여유도 없는 듯 황종의는 땀에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없이 심각한 표정이라, 청자 배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문제가 생겼네. 이른 시간이라 예의가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네. 지금 바로 장문인을 봬야겠네.”

고개를 끄덕인 청자 배 중 하나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른 새벽의 화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