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화. 누가 뭘 건드렸다고? (1)
촤아아아!
날렵하게 생긴 쾌속선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모습에 선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수, 수적이다!”
“어, 어떻게 하지? 다 죽는 거 아니야?”
갑판에 있던 이들이 혼비백산하여 떨어 댔다. 그 모습을 본 선장 마병(馬倂)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침착하십시오!”
“…….”
“장강에서 수로채를 만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우리 배는 수로채와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별일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괜찮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저 산에 산적들이 가득해도 표행을 떠나는 이들이 산을 오르는 것처럼, 장강에서 수적을 만난다 해서 꼭 사달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저들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니 모두 한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승객들을 안심시킨 마병은 선원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뭐 하는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아라!”
“예! 선장님!”
“닻을 내리고 배를 세워라! 지금 당장!”
“예!”
선원들이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병은 다가오는 쾌속선을 슬쩍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가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장강은 워낙 넓고 길기에 관의 영향력이 모두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장강에서 배를 모는 이들은 다들 수로채의 위협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수적을 보고 당황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이곳은 수로채가 출몰하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길 따라 흘러가면 그만인 강 위라고는 하나, 배를 정박할 곳은 있어야 하는 법. 그러다 보니 수적들도 자신들의 수채가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열여덟이나 되는 채가 장강 하나에 공존하기 때문에 다툼을 피하기 위해 서로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키는 편이다.
마치 녹림칠십이채가 다른 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적어도 마병이 알기로, 이곳은 수채가 위치한 곳이 아니었다.
‘새 수채가 생긴 것인가?’
마병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크게 움직였다.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수채라면 별 탈 없이 해결할 수 있겠지만, 모르는 수채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더구나 새로 생긴 수채라면 자신들의 흉악함을 과시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마병은 어깨에 힘을 주며, 다가오는 쾌속선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배가 속도를 줄이니 쾌속선도 그에 호응해 속도를 맞추며 옆으로 달라붙었다.
쿠우우우웅!
옆면이 서로 부딪히며 배가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우와아아악!”
“어어엇!”
사람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공포심이 어렸다.
쾌속선이 완전히 배 옆으로 붙는 순간 갑판 위로 갈고리를 단 동아줄 십여 개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텅! 텅!
바닥에 떨어진 갈고리는 드르륵 소리와 함께 끌려가다 배의 난간에 걸쳐졌다. 흡사 십여 명이 배의 난간을 움켜쥔 듯한 모양새였다. 동아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갈고리의 날이 섬뜩하게 서 있는 걸 보며 사람들은 모두 긴장감에 차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올라라!”
거친 목소리와 함께, 동아줄을 탄 무인 여럿이 갑판 위로 속속들이 올라왔다.
장강의 색을 닮은 푸른빛 무복.
가슴에 새겨진 흑룡의 표식.
손에 들고 있는 아미자(峨嵋刺: 작살)와 삼지창.
수적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마병은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앞으로 나섰다.
“저는…….”
“쉬잇.”
그 순간 그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아미자의 끝이 겨눠졌다.
“닥치고 있어라. 주둥이를 찢어 버리기 전에.”
“…….”
마병은 일단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빠르게 갑판 위로 올라온 수적들의 얼굴을 살폈다. 절망적이게도 그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겠구나.’
그는 긴장이 어린 눈으로 수적들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보통 결정권이 있는 이는 나중에 등장하기 마련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립한 수적들의 뒤쪽 난간 너머로 싸늘한 인상의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음.’
그러자 뒤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소정복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마지막에 나타난 사내는 앞서 올라온 수적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는…… 느긋하게 동아줄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물 위, 그것도 끊임없이 흐르는 물 위다. 당연히 두 배를 연결한 동아줄도 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그 출렁이는 동아줄 위를 마치 평지처럼 걷고 있지 않은가?
소정복도 경공에는 일가견이 있다 할 수 있는 유령문 소속이니 저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리 없었다.
‘강하다.’
그의 등골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흐음.”
퉁.
가볍게 갑판 위로 뛰어내린 사내가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차가워 보이는 사내다. 게다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칼자국이 인상을 더욱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눈빛을 받은 이들은 모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배 전체를 쭉 둘러본 사내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네가 선장인가?”
마병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예! 제가 이 배의 선장인 마병입니다! 장강의 영웅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웅?”
사내가 짧게 되묻자 마병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왕의 가호 아래 장강의 질서를 지키시는 분들이니, 어찌 영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핫.”
그 아부가 마음에 드는 듯 사내는 나지막이 웃었다.
“잘 아는군.”
“예. 장강을 오가는 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일입니다. 장강의 영웅들이 계시니 저희가 이 험한 장강을 보호받으며 오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지켜보던 소정복은 마병의 언변에 감탄했다.
잔뜩 겁을 먹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장은 질서와 보호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는 결국 보호비는 낼 터이니 큰 사고 없이 넘어가자는 의였다.
사내도 그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을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니 우리가 관리하는 영역을 지나는 이들은 당연히 감사를 표해야겠지. 그렇지 않은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법도를 모른다면 어찌 감히 장강의 물길에 몸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용왕께서 진노하실 것입니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니 마병은 안도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성의는 준비했는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미욱하여 이곳에 영웅들이 계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내어 주신다면 금방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린 그리 느긋한 사람들이 아니야. 나야 그렇다 치고, 저놈들은 지루함을 도통 참질 못하는 편이지. 괜한 피를 보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자고.”
“아, 알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마병은 뒤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배에 탄 승객들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상황을 설명했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조금씩은 성의를 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승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낭을 열었다.
생돈을 뜯기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반발심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수적들이 들고 있는 날카로운 병기를 보면 그 반발심도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다들 전낭에서 돈을 꺼내어 선원들에게 건넸다.
소정복은 그 광경을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로군.’
우려하던 것과는 달리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소정복도 이젠 녹림의 산적들과 웬만큼은 친분이 생긴 터라 이런 광경이 아주 낯설진 않았다. 보통 산적이나 수적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사람들을 죽이며 돈을 갈취해 댈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지역이나 수로에서 살인강도가 반복적으로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곳을 피하기 마련이다. 그럼 수적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바닥은 각자의 영역이 확실하다 보니, 영역을 옮기려면 충돌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지나는 이들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뜯는 것이 낫다. 당장 버는 돈을 조금 줄더라도 지속적으로 통행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때 선원 중 하나가 소정복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보시오. 승객들이 가난한지 금액이 영 좋질 않소. 미안하지만 조금 많이 내 줄 수 있겠소?”
“……알겠소이다.”
소정복은 품 안의 전낭에서 은자 하나를 꺼냈다. 은자는 소정복에게도 큰돈이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키느니 돈으로 해결하는 게 낫다. 이번 표행으로 받을 돈이 이보다 훨씬 많기도 하고.
“여기 있소.”
그가 건넨 은자에 선원의 얼굴이 밝게 피었다.
“고맙소이다.”
선원들이 걷은 돈을 선장에게 가져간다. 돈을 한곳에 모은 선장이 자신의 전낭에서도 돈을 꺼내 자루 안에 담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다가가 자루를 수적에게 공손히 건네었다.
“작은 성의입니다. 장강의 영웅들께 충분한 사례가 될 것이라 생각지는 않으나, 하룻밤 시름을 달랠 술값은 될 것입니다.”
“흐음.”
사내가 손을 뻗어 자루를 받았다. 그러더니 액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뒤쪽에 있는 수하에게 가볍게 집어 던졌다.
툭툭!
그는 손을 뻗어 마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선장의 얼굴을 기억하지.”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이리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장강은 잔잔하지만 바람이 불 때는 더없이 거칠다는 걸 기억하게. 바람이 불지, 불지 않을지는 그대들에게 달린 일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용무를 마쳤으니 그만 떠날 생각인 모양이었다.
모두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돈은 갈취당했으나 목숨을 건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웬만한 문파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이 장강 한복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사내가 막 몸을 돌려 난간을 넘으려는데 뒤쪽에 있던 수적 하나가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음?”
순간 눈에 이채를 띤 그가 천천히 다시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고 다시 긴장하는 사람들을 쭉 훑어본 사내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이거…… 유명하신 분이 타고 계신 것을 몰라 뵀군.”
그 시선 끝에 놓인 소정복이 순간 몸을 굳히며 입 안 살을 씹었다.
“그 유명한 은하표행의 특표가 있을 줄이야. 그냥 갔으면 굉장히 섭섭할 뻔했어.”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평지에서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딱히 난처할 일도 없다. 그의 발은 누구보다 빠르니 굳이 상대하지 않고 달아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곳은 넓고도 깊은 장강 위. 아무리 발이 빨라도 무용지물이다.
물속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수공을 전문적으로 익히는 수적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표……. 특표라. 귀한 물건을 전문적으로 나른다는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 운이 좋은 모양이야. 하하핫.”
사내가 천천히 소정복을 향해 다가왔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수적들이 일제히 그 주변을 둘러싸듯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