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귀신이 나올지, 괴물이 나올지. (1)
우우우우우웅.
강과도 같은 내력이 육신을 타고 흐른다.
세상에서 가장 청정하며 맑고 깨끗한 내력이 대맥을 타고 흐르다가 기경팔맥으로 뻗어 나가, 마침내는 전신의 세맥을 하나 남기지 않고 채우기 시작했다.
“후.”
들이쉬고, 내쉬고.
운기토납이란 호흡을 통해 외기(外氣)를 받아들여 자신의 무학에 걸맞은 내기(內氣)로 변환해 축적하는 과정이다.
청명의 육체를 채우고 있던 내력이 자하신공의 흐름에 편승해 전신을 타고 휘돌았다. 육합공으로 쌓아올린 더없이 맑디맑은 기운과 혼원단과 자소단으로 흡수한 외기.
지금껏 끊임없이 정화해 왔음에도 아직 완전히 뒤섞이지 못해 세 갈래로 나뉘어 있던 기운들이 자하(紫霞)의 흐름으로 조금씩 흡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시냇물과도 같은 흐름이었다.
다만 너무도 맑고 청아하여 그저 몸 안을 타고 흐르는 것만으로도 육체의 모든 탁기를 정화하고, 청명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듯했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내력이 육신을 타고 흐를 때마다 시냇물은 점점 더 불어난다. 이내 커다란 강처럼 변한 기운이 도도히 흘렀다.
이 자줏빛 강은 앞으로 더욱더 커질 것이다. 언젠가는 커다란 대하(大河)가 될 것이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커다란 바다가 될 것이다. 종내에는 저 하늘을 잔뜩 물들이는 자줏빛 노을처럼 세상 전체로 뻗어 나갈 것이다.
“후우.”
마침내 운공을 마무리한 청명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훔치는 그의 표정이 살짝 묘했다.
“이거…… 진짜 굉장하네.”
그는 위쪽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아니, 이 좋은 걸 지금까지 혼자 익히고 있었단 말이지? 거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소!”
- 야 이 새끼야! 내가 익히라고! 어? 아오! 진짜……!
“아아, 시끄럽고.”
손을 휘휘 저어 버린 청명은 턱을 괴고 상념에 빠졌다.
‘그냥 진즉에 익힐걸 그랬나.’
자하신공(紫霞神功)은 확실히 대단하다.
과거 그에게 검존의 위명을 안겨 주었던 자하강기보다 적어도 반 배 이상 더 높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신공이다. 확실히 천하제일신공 자리를 노려 볼 만했다.
소림의 역근세수경(易筋洗隨經)이나 무당의 상청태극신공(上淸太極神功),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이 천하제일을 다툰다고 하나, 이 자하신공 역시 결코 그 두 문파의 신공에 뒤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끄응. 문제는…….”
청명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무학에는 그 나름의 특색(特色)이 있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 문파를 대표하는 신공은 그 문파의 무학을 펼쳐 내는 데 가장 걸맞은 특색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자하신공도 화산 무학을 펼쳐 내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화산 제자들이 익히고 있는 신공을 자하신공으로 바꾸기만 해도 적어도 반 배 이상은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숙련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만큼 자하신공은 대단한 무학이었다. 이런 강력한 신공을 제한 없이 풀어도 되는가 하는 꼰대 같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문제는…… 자하신공이 아니라 청명에게 있었다.
“아, 이거 아쉽네.”
청명의 내공은 천하에서 가장 맑은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은 자소단과 혼원단의 기운들을 모조리 합일시키지 못해 완벽하게 청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도 꾸준하게 가장 맑은 내력의 양을 점점 늘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 모든 내력을 자하신공으로 일통시킨다?
“당장에야 말도 안 되게 강해지겠지.”
서로 뒤섞이지 못하는 내력을 합일(合一)시키고, 그 내력들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내력들을 다름 아닌 자하신공으로 운용할 수 있을 테니 그 효율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청명의 내력에도 색(色)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청정(淸淨)이라는 특색을 지닌 그의 내력이 일정 이상 평범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끄응……. 이게 이렇게 되나?”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매화공이나 칠성공, 육합공처럼 그 운용이 복잡하지 않은 무학들이야 청명이 찍어 누를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런 신공들을 운용하면서도 청명의 내력이 가진 특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하신공은 그런 무학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제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자하신공의 강력함과 내력의 정순함을 동시에 유지하기는 힘들다. 결국은 택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쩌지?’
청명은 턱을 괸 채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자하신공의 화후(火候)를 높여 나간다면 언젠가는 그의 내력이 모두 자하신공의 색에 물들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다. 과거 청명은 자하강기만으로도 매화검존의 별호를 손에 넣고, 실질적인 천하제일검의 자리에 올랐다. 거기에 자하신공과 지금까지의 경험, 그리고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거대하게 쌓아 올린 토대를 감안한다면 못해도 과거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매화검존에서 두 배란 말이지.’
예전의 청명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경지다. 다시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연한 증거였다. 그러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결과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천마는 못 이길 거라는 게 문제지.”
청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망할 놈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두 배 더 강해진다고 해서 천마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놈은 인간이 아니니까.
‘어떻게 한다?’
이대로 그냥 자하신공을 익혀 나간다면 안정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다. 이건 바닥을 다지는 일이다. 아무리 잘못된다 해도 과거의 두 배 이상은 무조건 강해질 것이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노려 볼 수 있다.
하지만…… 자하신공과 그의 내력이 가진 특성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사실상 그건 바닥을 없애는 일이다.
까딱하다가는 자하신공의 장점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과거의 그가 도달했던 경지조차 다시 손에 넣지 못할 수도 있다. 망가진 무학이란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그야말로 꿈의 경지다.
너무도 까마득해 차마 바라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천마의 그림자를 잡을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끄으으응. 대박 아니면 쪽박인데…….”
청명은 짜증 섞인 손길로 치렁치렁한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헝클었다.
“아오,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복잡해? 좋은 무공을 손에 넣었으면 그냥 익혀서 세지면 되는 건데 뭐가 이리 생각할 게 많냐고!”
머리카락이 뽑히도록 머리를 괴롭혀 대던 청명은 이내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털썩.
“끄응.”
팔짱을 끼고 옆으로 누운 청명은 멍하니 허공을 보다 피식 웃어 버렸다.
“나도 많이 컸다.”
매화검존의 두 배를 쪽박이라고 표현하다니.
“내가 옛날에 딱 두 배만 더 강했으면…….”
그럼 화산은 몰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형제들을 좀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고, 청명 역시 죽지 않았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랬다면 화산은 저 천마를 막아 냈다는 명성과, 천하제일검인 청명의 힘을 바탕으로 소림조차 뛰어넘는 천하제일문이 되어 강호를 호령했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멍하니 그 광경을 그려 보던 청명은 쓰게 웃었다.
“그걸로 될 리가 있나.”
적당히 죽고 적당히 살아남아, 남은 이들만이 영광을 누린다? 그런 반쪽짜리 영광에 대체 누가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엔 단 한 톨도 놓치지 않는다.
손에 쥔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손으로 막지 못한다면 보자기로 칭칭 감으면 그만이다. 그로도 안 된다면 진흙을 발라 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손안에 들어온 이들은 단 하나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 별수 있나.”
그럼 조금 무리하는 수밖에.
청명이 시선을 슬쩍 돌려 불쑥 솟아 있는 봉분을 바라보았다.
“왜? 미친 짓 같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도 옛날 같았으면 이런 짓 안 한다. 무학은 도박이 아니지. 착실하게 쌓아 나가야 하는 거야.”
그가 아닌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이런 선택을 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놈의 대가리를 깨 놨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할 수 있거든.”
청명은 화산파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당장이야 자하신공을 착실히 익히는 것보다 더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더 강해지지 못해 채우지 못한 부분은…….
그의 시선이 대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누구 하나 나서서 구박하는 이가 없음에도 수련을 하는 이들의 동작에는 허술함이 없었다.
청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채우지 못한 부분은 저놈들이 채워 줄 거다. 좀 못 미덥긴 해도 그 정도는 하겠지.”
- 옛날 사형보다야 천 배 나아 보입니다만?
“이 새끼가?”
청명이 봉분을 확 걷어차려 발을 들어 올렸다가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끄응. 그래,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청명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앉았다.
과거의 그는 사형제들을 믿지 못했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그들이 대신해 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에게 사형제들이란 지켜 줘야 할 이들이었지 그를 지켜 주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다르다. 과거 청자 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한 지금의 사형제들에게 등을 맡길 수 있다.
“그러니까…….”
그의 두 눈에 단호한 의지가 어린다.
“어디 한번 해 보자. 귀신이 나올지, 괴물이 나올지.”
청명이 천천히 자신의 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토대는 자하신공이다.
그는 이미 매화검결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변형하여 화산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 결이 다른 문제다.
이건 매화검결과는 달리, 오로지 청명만을 위한 무학이어야 한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익힐 수도 없고, 익혀서도 안 되는.
청진이 말했던 것처럼 후대에는 전하지 못할, 오로지 청명 하나만을 위한 신공.
‘굳이 명명하자면 자하청명신공(紫霞靑明神功)…….’
- 안 돼!
- 그러지 마! 이 새끼야!
“와, 씨.”
아니, 되게 뭐라 하네. 이름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긴 솔직히 좀 구리긴 했지.’
그럼 이름은 나중에 정하고.
청명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작정 만들어 낸다고 될 일이 아니야.’
지금 당장 봐야 할 손해는 최소화하고, 뻗어 나갈 가능성은 최대한 넓혀야 한다.
완벽하게 정해진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내일의 청명은 오늘의 청명보다 더 강하고, 더 나아질 테니까.
그러니 신공도 청명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
‘완벽하려 들지 마라.’
완벽은 가능성의 부재와도 같다. 그가 선택해야 할 것은 당장의 완벽이 아니라 무한히 뻗어 나갈 미래였다.
천천히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고요히 또 고요히.
천천히 자연과 동화되기 시작한 그의 어깨로 바삐 날아가던 산새들이 내려앉아 지친 날개를 쉬었다.
해가 중천에 올라 다시 붉은 노을이 지고, 어두운 밤이 세상을 물들일 때까지 청명의 감은 눈은 다시 떠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