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35화 (733/1,567)

735화. 다 너희 잘되라고 하는 거다. (5)

사그락. 사그락.

가벼운 발걸음에 풀 밟히는 소리가 고요한 산자락에 노랫소리처럼 퍼져 나갔다.

“흐음.”

맑은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현종은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렸다.

‘좋구나.’

이른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단련된 몸을 가진 강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안을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서면, 그 힘겨움은 모두 사라지고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다른 이들이 깨지 않은 시간에 수련하러 나서면…….

순간 현종이 맥이 탁 풀린 얼굴로 저 앞쪽을 보았다.

‘끄응. 늦었구나.’

파아아아아아앗!

검이 유려하게 허공을 누볐다.

허공으로 솟아올라 검을 떨치는 유이설의 등 뒤로 새벽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종은 잠시간 그런 유이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잠깐 바닥에 내려서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앞쪽으로 검을 두어 번 휘둘러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아비의 무덤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못하던 아이다. 가늘게 떨리는 조막만 한 손으로 현종의 손을 움켜잡고 화산으로 들어오던 그날이 아직도 눈앞에 그린 듯이 선한데, 벌써 저렇게나 커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좋구나.’

과거의 유이설은 항상 외로워 보였다.

화산 안에 여러 사형제들이 있었지만, 유이설은 그들과 도통 섞이질 못했다. 언제나 지금처럼 홀로 검을 휘두르고, 홀로 무언가를 쫓았다. 화산 안의 누구도 함께 걸어 줄 수 없는 길을 혼자 고집스럽게 걸었다.

현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이제 유이설에게는 곁을 지켜 주는 사람들이 있다. 당소소가 있고, 청명이 있고, 백천이 있고, 조걸과 윤종이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검을 휘두르는 유이설은 더 이상 그때처럼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현종이 그녀의 뒤를 비춰 주는 달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 있느냐?’

이제는 편히 눈을 감아라. 네가 원한 것은 다 이뤄졌을 테니.

온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유이설이 수련하는 양을 지켜보던 현종은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어디보자……. 그럼 다음 인적 드문 곳이…….”

건너편 봉우리를 보며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야 할 것 같았다.

“…….”

현종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압!”

파아아아아앙!

힘 있는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이 더없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아오. 씨! 이게 왜 안 되지? 청명이 놈이 할 때는 쉽게 됐는데!”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본 이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더니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력을 잘못 배분했나? 아닌데……. 그럼 이런 식으로 뒤틀리지 않을 텐데. 아, 아니다. 손목에 힘을 너무 많이 줬나? 끄응…….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선을 죽죽 그어 대며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르겠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펼쳐 보면 알겠지! 원래 무학은 몸으로 익히는 거 아냐!”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인석아! 이해하고 펼쳐야지!

“으라차아아아아!”

검을 종횡으로 죽죽 긋던 그는 몇 번이고 같은 검초를 반복했다. 현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혹 도와줄 방도가 없는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됐다!”

어?

“으하하하하! 이거구나! 무릎이었어, 무릎!”

……됐다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오른 이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면 되는 걸! 에이, 진즉에 해 볼걸!”

현종은 두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무어라 입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해결했으면 된 거지. 방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자, 그럼 다음!”

검이 다시 빠르게 허공을 누비기 시작했다.

우거진 수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현종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도 참.’

환한 웃음을 띤 조걸을 보고 있으니 절로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한때는 무학에 통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조걸이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이 꼭두새벽부터 홀로 수련할 만큼 무학에 전념하고 있다.

그저 수련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기꺼운 게 아니다.

사람의 삶은 두 번 오지 않는다.

한 번뿐인 삶,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해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특타 칭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이긴 하구나.’

윤종이면 몰라도 조걸이 이리 이른 새벽부터 수련을 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어찌 보면 제자들 중 가장 빠른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는 이도 조걸이다.

‘남몰래 열심히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없었겠지.’

너무도 당연한 일이건만, 평소 조걸의 언행을 보고 있으면 그런 사실을 놓치게 된다.

‘열심히 하거라.’

현종은 속으로 응원을 건네며 흐뭇하게 돌아섰다.

“그런데…….”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서글퍼졌다.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더럽게 부지런하네.

기특한 놈들.

“으음. 이게 안 될 리가 없을 텐데. 다시 해 본다.”

응, 그래. 백천이.

참 열심히 하는구나. 이 장문인은 기쁘단다.

쉭! 쉭쉭!

타압!

소소야.

왜 검을 휘두르다 말고 침을 던지느냐.

응, 그래……. 물론 네가 꼭 화산의 무학만 써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화산이 꽉 막힌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련을 할 때는 검을 써야 하지 않겠니?

당소소가 쪼르르 달려가 바위에 박힌 침들을 뽑아 회수했다. 그러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검을 날카롭게 휘두르다 말고 빙글 돌며 침을 쏘아 댔다.

“아, 씨! 여기서 왜 자꾸 침이 나가! 검만 수련할 거라고!”

어……. 일부러 던진 게 아니었구나.

어…….

저건 또 뭐야.

현종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검을 든 윤종이 꿈쩍도 하질 않는다. 뭔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나 싶어서 잠시 지켜봤더니 일 각이 다 되도록 같은 자세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자나?’

아니,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저 자세로 검을 들고 잘 수는 없지.

그럼 대체…….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윤종이 천천히 검을 내렸다.

“음, 이게 그렇게 되는 거로군.”

뭘?

뭐가 인마? 그냥 검만 들고 서 있었는데, 대체 뭘?

“그럼 이건…….”

윤종이 검을 옆으로 휘두르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휘둘러지던 검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춘다 싶더니, 윤종은 다시금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다.’

뭐……. 각자에게 맞는 방식이 있는 거지.

허허. 허허허.

“으라차아아!”

백상아. 너 재경각에 전념하겠다고 했었잖니.

“오오오오!”

종회야.

그래. 청자 배에 윤종이랑 조걸이만 있는 건 아니었지. 그래.

“흐으으음!”

운암아?

응? 운암아? 너 언제부터 이렇게 수련을 했니? 운검이도 아니고?

가는 곳마다 사람이 있으니, 현종은 이제 번번이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섰다.

이쯤 되면 이른 수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온 산자락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차지하고 앉아서는 수련을 해 대고 있지 않은가?

‘화산의 미래가 밝은 건 좋은데.’

나는 어딜 가야 하나, 나는…….

벌써 방을 나선 지 반 시진이 다 되어 간다. 기껏 큰마음 먹고 새벽 수련을 하러 나섰는데 이래서야…….

“끄응. 차라리 아래로 내려가자.”

위쪽은 어린놈들이 다 차지하고 앉았으니 그는 적당한 중턱을 노릴 수밖에.

한참 동안 산을 타고 내려온 현종이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긴 없…….”

“아니! 그게 아니라지 않느냐!”

움찔.

지척에서 터져 나온 호통 소리에, 현종은 목을 쭉 빼고 주위를 살폈다.

‘여기도 있네.’

이럴 거면 그냥 연무장에 모여서 해라, 얘들아. 대체 왜 굳이!

하지만 선객이 있는 걸 알고도 그는 곧장 몸을 돌리지 않았다. 방금 들은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했기 때문이다.

물론 화산 제자들의 목소리야 모두 익숙하지만, 조금 전의 목소리는 그 정도가 아주 달랐다.

“아니, 시킨 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힘을 사알짝 주라고! 사알짝! 그냥 살짝이 아니라!”

“젠장맞을, 살짝이랑 사알짝의 차이를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놈이 그래도!”

티격태격하는 걸 듣고 있던 현종은 슬그머니 다가가 수풀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새된 소리를 질렀다.

“엄마! 깜짝이야!”

“으헉! 말 좀 하고 오십시오, 말 좀!”

검을 들고 어정쩡하게 선 현상과 현영을 보며 현종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너희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이 새벽부터.”

“그야 뭐……. 크흠.”

현영은 겸연쩍은 얼굴로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귀 끝이 불그스름한 걸 보니 뭔가 창피한 모양이었다.

현상이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매화검결이 영 어렵다고 도와달랍니다.”

“매화검결?”

현종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수련하겠다고 새벽부터 나와서 이러고 있었단 말이냐? 낮에 할 일도 많으면서.”

“할 일이 많기는 뭐가 많습니까.”

현영이 툴툴거렸다.

“그리고 할 일이 많아도 어린놈들 수련 시켜 놓고 우리는 노는 게 말이나 됩니까. 떳떳하게 굴리려면 우리도 할 건 해야지요.”

“왜 우리냐, 이놈아.”

“그럼 사형은 놀 겁니까?”

현종은 허허 웃어 버렸다. 하지만 동시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현영의 손에 검이 들린 걸 보니 오만 감정이 교차해서였다.

‘그랬었지.’

현영은 일찌감치 무학의 길을 포기하고 화산의 살림을 맡았다. 하지만 그건 현영이 무학을 익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고는 그 일을 해 줄 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나, 어쨌든 화산이 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게 아니라면 현영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그냥…… 새삼스러워서 말이다.”

“새삼스럽기는.”

현영이 자꾸 퉁명스레 툭툭 쏘아 댄다. 하지만 현종은 현영의 저런 반응이 악의가 있을 때 나오는 게 아니라 쑥스러울 때 나온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뭐…… 옛날 같으면 모를까. 이제는 백상이도 있고, 재경각을 도와주는 애들도 두엇 있고, 은하상단에서 파견 나온 이들도 있어서 손이 막 부족하고 하지는 않으니까…….”

“허허. 그래, 그래.”

“끄응! 예! 그래서 그냥 남는 시간에 수련 좀 합니다! 됐습니까?”

“누가 뭐랬느냐? 허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현종을 보며 현영이 눈을 흘겼다.

아오. 장문인만 아니면.

“네가 고생이 많구나.”

현종의 말에 현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장문인.”

잠깐 머뭇거린 현상은 이내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저 이런 기회가 찾아와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

“예. 일전에 만인방이 쳐들어왔을 때, 저희가 선두에 서서 제자들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일이지.”

“예, 장문인.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저희보다 강해진다면 과연 저희가 선두에 설 수 있겠습니까?”

말없이 듣던 현종이 현상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뜻을 알겠구나.”

“힘이 부족해서 제자들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주제에 고집을 부려 앞에 서서 제자들의 짐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신공과 검결이 있으면, 그래도 한동안은 저희가 제자들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종이 애틋한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았다.

“현상아.”

“예, 장문인.”

“나는 적어도 십 년 동안은 저놈들에게 앞자리를 내어 줄 생각이 없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사람은 표정이 조금 달랐다.

“저도 껴도 됩니까?”

“너는 좀…….”

“에이, 그건 좀…….”

두 사람의 떨떠름한 표정에 현영이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수련하러 왔으면 잡담하지 말고 수련이나 하십시오! 사형은 아까 가르치던 것 마저 가르치시고!”

“……그게 배우는 사람의 태도더냐?”

“아, 그럼 오늘부터 용돈 없이 살아 보시든가!”

“바, 바로 시작하자꾸나. 어서!”

화들짝 놀라 재빨리 시범을 보이는 현상을 보며 현종은 허허 웃었다. 하지만 웃음의 끄트머리는 살짝 씁쓸했다.

‘이런 기회가 찾아와 다행이라.’

그래. 그렇구나.

현종은 시선을 저 위쪽으로 옮겼다.

높게 솟은 화산의 봉우리 너머로 아침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참으로 다행이구나.’

참으로 눈이 부셨다.

현종은 웃으며 슬쩍 두 사람을 보다 끼어들었다.

“거기서는 힘을 빼야지, 인석아!”

“훈수 두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죽겠는데.”

“보자꾸나. 내가 보여 주마!”

“아, 저리 가시라니까요!”

이른 새벽의 여린 햇살이 비춰 오는 화산의 중턱에서 세 사람이 툭탁거리는 소리가 정겨이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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