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5)
십육 일 차.
“끄으으으…….”
현종이 거의 반쯤 기다시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몇 쌍의 눈동자가 뒤에서 지켜보았다.
“……딱히 달라진 건 모르겠습니다만?”
“이상하다.”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이 헛소리는 쉴 새 없이 해 대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인데.”
“……굉장히 이상한 소리지만 맞는 말이네요.”
백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이렇다 할 변화는 안 보이는데.’
청명은 이제 곧 눈으로도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장문인의 모습에서는 그런 기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백천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자. 놈이라고 항상 맞을 수는 없으니까.”
“예.”
이윽고 방의 불이 꺼졌다. 백천을 비롯한 오검은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섰다.
십칠 일 차.
“끄으…….”
이불을 걷어 낸 현종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우드드득!
“끅.”
허리가 비명을 질러 댔다. 딱히 몸을 혹사시킨 건 아니건만, 그래도 늙어 버린 몸뚱이에는 부담이 큰 모양이었다.
허리를 콩콩 두드린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이 얼마나 더 버티려나.’
아직 의욕은 잃지 않았다. 몸속을 바늘로 찔러 대는 고통이야 말로 다 할 수 있겠냐마는, 그 정도 고통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화산이 망해 가던 때 홀로 이 방에 앉아서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아 내던 고통, 그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의 육체가 정신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타고난 몸이 자하신공을 감당하기엔 허약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하루 나아지는 게 없으니 점점 나락으로 빠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나.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지.’
현종은 자신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몸뚱이가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설령 신공을 익히다가 입마가 와서 쓰러진다 해도, 그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화산 장문인으로서의 책임감은 둘째 치고, 그와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수련을 참아 내는 사제들이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진기를 도인하는 청명이 놈의 얼굴을 봐서도 못 하겠다는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죽기 살기로 버텨 내야 한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쉰 현종이 몸을 일으키고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손을 뻗을 때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삐걱거렸지만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이불을 개고 의복까지 갈아입었다.
‘늦지는 않았겠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지만 청명이 놈의 수련은 해 뜨고 나서 시작하는 법이 없다.
익숙하고도 섬세한 손길로 방 안을 모두 정리한 현종이 문 앞에 섰다.
‘기운을 잃지 말자.’
몸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그는 화산의 장문인이다. 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 제자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더라도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가자!”
자신을 다독이듯 짧게 외친 현종이 문을 잡고 벌컥 열었다.
그리고.
콰드드득!
“엥?”
현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손을 보았다.
앞으로 쭉 뻗은 그의 손에 뜯겨 나온 문이 대롱대롱 잡혀 있었다.
“……아니, 이게 왜……?”
문에 박혀 있던 경첩들은 통째로 부러져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덜렁거리고 있었다.
“거, 문은 왜 부수고 그러십니까?”
“으응?”
어느새 채비를 마치고 온 현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부서진 문과 현종을 번갈아 보았다. 현종은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뼈마디가 쑤셔서요.”
“…….”
“…….”
현영이 낮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문짝은 왜 뜯으신 겁니까?”
“내가 뜯은 게 아니라 이게 절로 뜯어졌구나. 아무래도 경첩이 낡아서 그런 모양이다.”
“경첩이 낡다니요. 이번에 건물 짓고 수리하면서 다 새로 갈았는데.”
“그래? 그럼 불량인 모양이지.”
“쯧쯧쯧. 이래서 경첩 하나도 일일이 확인을 해야 하는데. 거 은하상단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검수를 좀 더 철저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그 옆에다 두십시오. 애들 시켜서 다시 달라고 하겠습니다. 얼른 가시지요. 늦으면 또 청명이 놈 입이 댓 발은 나옵니다.”
“……그렇지.”
현종이 막 한숨을 쉬며 한마디 하려는데, 현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청명이가 참 착하지 않습니까? 예의도 바르고.”
뭐?
현종은 순간 멍한 얼굴로 현영을 보았다. 제 귀도 의심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다 못해 귀신이 따로 없는 현영이, 오늘따라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헛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다른 놈들이 수련에 늦으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깨 놨을 텐데, 그래도 어른이라고 입만 삐쭉 내미는 것 보십시오. 욕은 할 만할 텐데 말입니다. 얼마나 착합니까.”
“……욕은 할 만해?”
“어른이고 나발이고 잘못하면 욕먹어야죠.”
“…….”
“그런데 욕도 안 하는 걸 보십시오. 세상에, 얼마나 착하고 귀엽습니까. 하하핫.”
현영아. 아무래도 네 머릿속에서 ‘착하다’의 개념이 조금 비틀어진 것 같구나. 어쩌다 그리되어 버렸느냐, 사제야…….
“……일단은 가자꾸나.”
“예, 마침 저기 사형도 옵니다.”
“그래.”
현종이 시선을 돌려 아직 하늘에 머물러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어두운 길을 가는 제자들을 은은하게나마 저 달처럼 비춰 줄 수 있을 테니까.
이십 일 차.
“괜찮으십니까?”
“……네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죄송합니다.”
걱정하는 제자 하나를 물리며 현영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끄으응. 어떻게 날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아무렇게나 퍼져 앉은 현영을 보며 현상이 눈을 찌푸렸다.
“애들 있는 데서 체면 상하게.”
“지금 체면이 중요합니까? 당장 뒈지게 생겼는데. 사형은 힘들지도 않습니까?”
“허허. 힘드냐니……. 나는 잘 모르겠구나.”
“예?”
현영이 놀라 바라보자 현상이 빙긋 웃었다.
“그냥 뒈지면 딱 편하겠다. 뭐 그런 생각뿐이구나.”
“…….”
“……내가 다 늙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자하신공이고 나발이고 그냥…….”
“에헤이! 에헤이! 애들 있는데!”
되레 현영이 현상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입이 터진 현상은 도무지 정신이 잡히질 않는다는 얼굴로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무학이고 나발이고 그냥 땅이나 파먹고 살 것을, 내가 뭐 한다고 화산에 들어와서는 말년에 염병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차라리 고향에 있던 영영이한테 장가들어서 오손도손 땅이나 파먹고…….”
“귀 막아! 귀 막아 이놈들아!”
현영의 고함에 제자들이 일제히 양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았다. 한숨을 내쉰 현영은 장문인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장문인.”
“……그런데 현영아.”
“예?”
“현상이 말이 썩 일리가 있지 않느냐?”
“…….”
현영은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사형들이 모조리 노망이 나고 있단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때 백천이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 말했다.
“장로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끄응. 굳이 그럴 것까진 없다.”
“제가…….”
“아니, 됐다. 내 힘으로 일어나마.”
“그러지 마시고, 제가…….”
“에잉, 됐다니까.”
현영이 가볍게 백천을 밀쳤다. 정말 가볍게, 그저 투정하듯 손을 내민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으아아악!”
퍼억! 퍼억! 퍼억! 퍼억!
당황한 현영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아니, 현영뿐 아니라 그 광경을 본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었다.
돌연 집채만 한 거인의 발에 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백천이 가공할 속도로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몇 번이나 처박히며 튀어 오르더니 저 먼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저 아래에서 백천의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현영과 절벽 쪽을 번갈아 보았다. 먼저 입을 뗀 건 현상이었다.
“아, 아니……. 그 부축 좀 하겠다 했다고 애를 절벽으로 날려 버려? 이놈이 진짜 미쳤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형!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저는 그냥 정말 살짝 민 것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저 힘 좋은 놈을 저리 날려 보냅니까!”
“……어?”
듣고 보니…….
현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저놈은 왜 저런 거냐?”
“……그러게요?”
두 장로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절벽 쪽을 보았다.
그 괴이한 광경을 지켜보던 화산 제자들의 등에 슬금슬금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십오 일 차.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으냐?”
“……사숙. 그때 난 상처는 이제 다 아물었습니다. 괜찮다니까요. 아주 멀쩡해 보입니다.”
“아니, 나 말고!”
“네?”
윤종의 말에 울컥하여 얼굴을 붉힌 백천이 심호흡을 하더니 젓가락을 놓고 식당의 가장 안쪽 상석을 가리켰다.
“저분들 말이다.”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니 장문인과 장로들이 보였다. 윤종은 아, 하며 탄성을 흘렸다.
“듣고 보니…… 뭔가 달라진 것 같기는 한데.”
“네 눈에도 그러냐?”
“그런데 정확하게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확실히…….”
“으음.”
백천은 미묘한 얼굴로 장문인들을 바라보았다. 윤종의 말대로였다. 분명히 뭔가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하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주 눈여겨봐야 차이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변화의 정도는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일단…… 살이 다시 조금 오르신 것 같은데.’
여전히 다른 사람이 보면 송장이라 여길 만큼 피골이 상접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 해골 같은 얼굴에 미묘하게나마 살이 붙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살이 조금?”
“역시 그렇지요?”
윤종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좋은 징조 아닐까?”
“어쨌거나 상태가 좋아졌다는 의미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표정에 살짝 놀라움과 안도가 스쳤다. 초를 치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 분위기가 오래 갔을 것이다.
“……거 티도 안 나는구만.”
“조용히 이 새끼야, 조용히!”
“확 그냥 주둥이를!”
백천과 윤종이 동시에 획 노려보며 타박하자 조걸이 움찔하고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두 분은 요즘 뭐 제가 말하기만 기다리고 사십니까?”
“…….”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청명이처럼 대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청명이 취급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사람이 할 짓……. 아아아아악!”
그 순간 조걸이 무언가에 얻어맞고는 저만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쿠우웅!
“뭐, 뭐야?”
“습격인가?”
밥을 먹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들 중 절반은 벽에 처박혔다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조걸을 바라보았고, 나머지 절반은 정확하게 반대편에서 젓가락을 쥔 채 넋을 놓은 현상을 보았다.
“아, 아니…….”
현상은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조걸과 제 젓가락을 번갈아 보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는…… 아니, 얘들아. 나는 그냥 고기가 잘 안 집어지기에 힘을 좀 준 것뿐인데…….”
“…….”
“왜, 왜…… 젓가락에서 검기가…….”
넋을 놓고 현상을 보던 이들 중 몇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조걸에게로 달려갔다.
“걸아! 걸아! 괜찮으냐?”
“괜찮다! 역시 바보는 안 죽어!”
“이 새끼 거품 물었는데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조걸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식당을 빠져나갔다. 누구도 지금의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흡사 귀신에라도 홀린 듯했다.
백천은 천천히 현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영이 그를 열심히 구박하고 있었다.
“아니! 애를 왜 패고 그러십니까?”
“아, 아니라니까! 나, 나는 정말 그냥 고기를…….”
“이제는 하다하다 젓가락에서 검기도 뿜으시네! 그러다가 애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정말 아니라니까!”
억울해 죽겠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는 현상을 보며, 백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백 번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눈으로 보면 알 거야.
- 안 그래도 지금쯤이면 이제 슬슬 효과가 나올 때가 됐거든. 보고 당황하지나 마. 낄낄낄낄낄.
“서, 설마…….”
백천의 두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겨우겨우 음식을 집어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세 노인의 뒤로 알 수 없는 기운들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쯤 되니 백천은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뭔가……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