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2)
“여기요.”
“……이게 뭐냐?”
“새로 쓴 비급들이에요. 보기 편하실 거예요.”
청명이 내민 비급들을 보며 현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자하신공이라 써진 비급과 매화검결이라 써진 비급. 그 깨끗한 것들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하나 들 수밖에 없었다.
“……전에 그 비급은 어찌하고?”
“아, 그거요?”
청명이 히죽 웃었다.
“너무 삭아서 그런지, 무공을 익히다 보니 바스러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옮겨 뒀으니까.”
“……바스러져?”
“네.”
현종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사, 사조께서 남기신 비급이 없어졌단 말이냐?”
“에이. 비급이 뭐가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내용이죠.”
“…….”
“사조께서도 뭐 꼭 그 서책 자체를 남기려 하신 건 아닐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암, 당연히 괜찮아야지. 뒈지기 싫으면.
청진의 유해를 수습하며 나름 애틋함이야 느꼈다지만, 어디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겠는가.
“……미리 옮겨 적었다고?”
“네.”
청명이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청명의 표정이 밝은 만큼 현종의 속은 말 그대로 썩어 들어갔다.
“자, 잠깐!”
대체 이 엄청난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현종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자하! 자하강기는 어찌되었느냐?”
“네?”
“왜 비급이 두 권뿐이더냐! 자하강기는 어디다 팔아먹고!”
“아, 그거요?”
청명은 이번에도 가볍게 헤헤 웃었다.
“그건 못 살렸어요.”
“뭐?”
현종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모, 못 살리다니. 그게 그…… 그게 무슨…….”
“어…… 그러니까…….”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듯 눈알을 슬쩍 위로 굴린 청명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대충 살펴보니까 그건 굳이 남길 필요 없는 잡무공인 것 같아서 안 옮겨 적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비급들 날아갈 때 같이 날아간 모양이더라고요?”
“나, 날아가?”
“뭐, 괜찮아요. 자하신공이 더 좋은 거니까!”
“그, 그러니까 지금 서, 선조의 유진을…… 날려 먹었다고?”
“어…….”
현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몇 년은 더 늙은 듯 핼쑥해졌다. 그의 간절한 눈빛을 배반하며 청명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요? 넓은 마음으로다가.”
“어억!”
“자,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현종이 끝내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를 보면서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어차피 쓸 데도 없는 무공인데 너무 화를 내시네…….”
“뭐, 인마?”
뒤로 넘어갔던 현종이 별안간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청명에게 콱 달려들었다. 청명은 이크, 하며 빠르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야, 이놈아! 그게! 그게 어떤 물건인데!”
“에이. 그거 애초에 없었던 물건이잖아요.”
“응?”
청명은 짐짓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없었던 것이 다시 없어졌으니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한낱 다 집착일 뿐인 것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
“에라!”
현종이 청명을 뻥 걷어찼지만 청명이 얄밉게도 그 발길질을 슬쩍 피해 버렸다.
“아니, 그건 진짜 필요 없는 거라니까 그러시네.”
“저놈이 그래도! 이리 와! 이리 안 와?!”
청명에게 달려들기 위해 퍼덕거리는 현종을 현영과 현상이 잡고 꾹 눌렀다. 흡사 한 마리의 활어 같은 생기였다.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놔라! 이거 놔!”
“거 왜 그러십니까.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시면서.”
“끄으으으응.”
정곡을 찔린 현종은 검게 죽은 얼굴로 이를 갈았다.
“내 죽어서 선조들을 어떻게 보느냐! 무량수불, 무량수불! 원시천조오온!”
역시 자하신공이 장문인 전용 무학인 건 이럴 때 패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장문인 전용 무학으로 바꿔야 하나 순간적으로 고민해 보았지만, 이미 청명이 놈이 자하신공을 익히고 나와 버렸으니 다 틀렸다.
“끄으응……. 앓느니 죽어야지.”
“포기하시면 편해요.”
“…….”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저놈을 원껏 패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현종이었다.
“자자. 됐으니까. 일단은 비급부터 보세요.”
현종이 뭔가 더 역정을 내려 했지만, 슬슬 귀찮아진 현영이 선수 쳐서 입을 막아 버렸다.
“이걸 외우면 되는 거냐?”
“네. 구결 암송부터요. 천천히 느긋하게 하세요. 서두르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알겠다.”
현영이 비급을 집어 들고는 현종을 재촉했다.
“이미 지나간 일 자꾸 물고 늘어지지 마시고 얼른얼른 합시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결국 이를 갈던 현종도 체념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현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래,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이미 선조의 유진은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린 뒤인데.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힘없이 자하신공을 펼쳐 들었다.
‘그래, 미련을 놓자.’
자하신공이 자하강기보다 우월한 무학이라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자하신공이 사라지고 자하강기만 남은 상황보다는 백배 낫…….
어?
자하신공의 구결을 읽던 현종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쫙 펼쳐진 비급 위로 그의 눈이 쓱 올라와 청명을 주시했다.
“……청명아.”
“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구결이 내가 전에 본 것이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기분 탓이에요.”
“……정말 기분 탓이냐?”
“하하하하. 장문인께서도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럼 설마 제가 구결을 바꾸기라도 했을까봐서요?”
“…….”
“에이. 제가 그럴 능력이 있으면 대종사죠, 대종사. 자하신공쯤 되는 무학의 구결을 제가 무슨 수로 바꿔요. 하하. 너무 웃기다. 그럼 제가 화산신룡이 아니라 무신(武神)이죠. 화산무신!”
현종은 의심이 남은 눈빛으로 살짝 삐딱하게 비급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자하신공은 화산의 정화가 집약된 화산 최고의 신공이다.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나, 지금 청명의 무위가 과거 화산의 쟁쟁했던 선조들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천하제일검을 두고 다툴 만한 이들을 드물지 않게 배출하던 화산이 아니던가?
그러니 청명이라고 해도 자하신공에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하는데……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현종의 눈알이 불안하게 여기저기로 굴렀다.
청명이 놈이 그 안 되는 일일 되게 만드는 놈이란 점이 불안했다. 솔직히 그동안 청명이 저지른 일 중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 대체 몇 가지나 있었던가?
“아니지?”
“그럼요.”
“진짜 아니지?”
“에이, 속고만 사셨나?”
현종의 촉이 묘한 울림을 보내고 있었다.
‘이놈 지금 분명 뭘 숨기고 있는데…….’
하지만 불안에 떠는 그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현영이 이제 대놓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 정 그러시면 빠지십시오!”
“…….”
“안 그래도 바빠 죽겠다니까요! 시간이 없다고요, 시간이!”
현종이 시무룩한 시선을 보냈지만, 현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청명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일단 구결부터 암송하도록 하마. 그럼 되지?”
“네네!”
“알겠다.”
자기들끼리 척척 손발이 맞는 걸 보며 현종은 눈을 흘겼다.
저, 저…… 청명이 놈이 하는 짓이라면 돌로 차를 끓인다고 해도 믿을 놈 같으니.
“그런데 청명아.”
“네?”
지금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현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너는 자하신공을 익힌 것이냐?”
“네, 그렇죠.”
“어떠하더냐?”
청명이 그 말에 살짝 고민하는 듯싶더니 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조금 더 고민한 후에 부연했다.
“아시다시피 신공이라는 건 얼마나 익히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천양지차잖아요?”
“그렇지.”
현상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강호에서는 무학의 숙련도를 일 성부터 십이 성까지로 분류한다.
검으로 따지자면 검법의 초식을 완전히 기억하고, 어설프게나마 그 투로를 펼쳐 낼 수 있게 되면 일 성이라 칭한다.
그리고 검을 완벽하게 체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십이 성(十二成), 즉 대성했다 칭하는 것이다.
일 성만 익혀도 나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법과는 달리, 신공은 일 성, 즉 초입일 때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경지가 높아지면 놀라울 만큼 커다란 힘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정도가 좀 더 심해요.”
“심하다니?”
청명이 뺨을 긁적였다.
“일 성일 때는 그냥, 어…… 시냇물? 아니, 시냇물도 과하지. 물웅덩이? 아니……. 찻잔 안에 물? 아니다, 아니다. 숟가락으로 한 술 뜬…….”
……어디까지 작아지니, 청명아? 그걸 신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여하튼 진짜 별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경지가 높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게 되어 있더라고요.”
“으음.”
“정말 대성하게 되면 사람의 몸으로 하늘에 진짜 자줏빛 노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황당무계한 말에 현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 되는…….”
“아니.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현종이 청명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내가 알기로도 지금까지 화산의 역사상 자하신공을 십이 성 대성한 이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예?”
현상이 당황한 얼굴로 현종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이라 익히고 수련한 이가 많지 않다지만, 아직 대성한 이가 없다니?
현종은 그가 황당해하는 이유를 안다는 듯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난해한 무학이라는 의미겠지. 심지어 자하신공을 창안하신 조사께서도 자신이 만든 무학을 완전히 익혀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과거의 장문인들께서는 자하신공을 겨우 칠 성가량 익혀 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천하일절(天下一絶)이라 불리셨지.”
“아…….”
현종의 말을 가만 듣던 청명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하일절이라…….”
- 뭐? 뭐, 이 새끼야,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요. 내가 뭐 입이나 뗐나?
현상은 현종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자하신공만 잘 익혀 낼 수 있다면…….”
얼버무리긴 했으나 현종은 그 뒷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현상의 두 눈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현종 역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지한 눈으로 비급을 보았다.
눈앞에 있는 이가 까마득히 배분이 낮은 제자라고 하나, 배움은 배움이다. 배움에 있어서 경건함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수도 없이 강조했었다.
현종은 진중한 얼굴로 청명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큰 파도가 밀려들 거라는 사실과, 화산이 더욱 힘겨운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
“너희가 아무리 우리를 존중한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 너희의 존중만으로 문파를 이끌어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현종이 정광이 넘치는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더 힘들게, 더 혹독하게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우릴 위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망설일 것 없다!”
“예?”
청명이 조금 당황한 듯 되묻자 현종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강조했다.
“내가 장문인이고, 이들이 장로라 하여 사정 봐줄 것 없다.”
“…….”
“마음에 미혹이 있다면 떨쳐 내거라! 그리고 우리를 다른 제자들처럼…….”
“저…… 장문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응?”
하지만 청명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사정을 봐줘요?”
“…….”
“왜요?”
순간 말문이 막힌 현종은 허허,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잠시 잊었네.’
그와 장로들을 위해서 껄끄러움을 이겨 내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가 아니라, 사람을 가르치는데 사정을 봐준다는 말 자체를 이해 못 하는 얼굴을 보니 지금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마음을 다잡은 현종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청명아.”
“예?”
“……좀 살살해라.”
“…….”
“나이가 드니 뼈마디가 쑤셔서.”
의욕은 저만치 앞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종의 슬픔이 담긴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