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화.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1)
“흐으으음.”
눈앞에 놓인 비급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빠진 글귀는 없고…….”
비급이란 생각보다 민감하다.
사실 화산의 제자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만일 그들이 청명이 없는 상황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이나 매화검결, 자하신공 등을 찾아냈다면?
“……대참사가 벌어졌겠지.”
강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야 우연히 동굴에서 천고의 비급을 발견하고 그걸 홀로 익혀 고수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비급이라는 건 그걸 보고 무공을 배우라고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승 무학의 복잡한 운용과 심도 깊은 무리(武理)를 한 권의 서책에 모두 담는다는 건, 손바닥만 한 전낭에 황소를 욱여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로 풀어 설명하자면 수십 권의 서책으로도 모자랄 텐데, 무슨 수로 한 권짜리 비급에 모든 무학의 정수를 담아 낼 수 있겠는가?
결국 비급이란 소의 뿔을 살짝 긁어 내고, 털을 몇 가닥 뜯어 넣고, 발굽을 조금 잘라 넣는 식으로 소의 부분 부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식의 극단적인 요약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무학을 익히는 이들이 비급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승을 찾게 되는 법이다. 스승은 비급 안에 있는 무리를 말로 풀어 설명해 줄 수 있으니까.
응?
그럼 비급은 왜 필요한 거냐고?
“사람이 이걸 무슨 수로 평생 외우고 있어. 까먹지.”
그러니 결국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비급이란 배우는 이를 위한 게 아니라 가르치는 이를 위한 지침서에 가깝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이가 화산의 무학에 대한 이해도 없이 비급만으로 무학을 익히게 되면 진양건과 같은 경우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놈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무학을 익히고 거의 펼치지 않았으니 그래도 멀쩡하긴 했지만, 만일 그대로 몇 년쯤 지났으면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들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운이 좋았지.”
진양건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지금 이 시점에 청명을 만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쨌든 횡액은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여하튼 그만큼이나 무학을 익힌다는 것은 섬세하고도 위험한 일이다.
“어디보자…….”
촤라라라락!
매화검결이야 눈 감고도 구결을 줄줄 외울 수 있지만, 자하신공만은 아니다. 과거의 청명도 본 적이 없는 무학이니까.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내가 좀 익히라고 했잖느냐!
“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니까 그러시네!”
청명이 버럭 역정을 냈다.
“당장 내일 칼질하러 가야 하는 판에 새 무학을 언제 익히고 있어요! 그러다간 균형이 깨진다니까!”
완벽하게 다스려 놓은 육체에 이전까지와 결이 다른 무학이 뒤섞이게 되면 순간적으로 무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낮아진다.
시간을 들여 그 새로운 무학을 완전히 체화하고 다시 균형을 잡는다면 이전보다 더 강해지겠지만, 당시의 청명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쩝. 조금 아쉽긴 하지, 솔직히…….”
자하신공을 빤히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청명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야 했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자하신공을 익혀 뒀다면, 어쩌면 마지막 전투의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종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현종 역시 앞으로의 강호가 그리 녹록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을 터. 쓸데없는 권위를 챙기는 것보단 제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만드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본디 사람이란 제 손에 있는 것은 쌀 한 톨도 내어 놓기 싫어하는 마련이다.
권력을 혐오하던 사람도 자신이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면 그 달콤함에 취한다. 과거 아무것도 없는 삼류 문파였던 화산의 장문인과 지금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화산의 장문인은 분명 다른 자리다.
손안으로 권력이 모여들고, 그에 따라 다른 이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확연히 느꼈을 텐데도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을 제자들에게 선뜻 내어 놓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이다.
“장문사형도 못 했던 건데.”
- 야! 내가 못 한 게 아니잖아! 분명히 너 익히라고…….
“여하튼 좀생이 같은 양반……. 후예만도 못하네.”
- 이 개새…….
청명은 귀를 후비적거리고 손가락을 훅 불었다.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어쨌든, 고민할 문제가 있었다. 살짝 애매한 문제라 청명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흐으으음.”
그가 보고 있는 건 뜯어낸 자하강기의 비급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조심조심 훑어보던 자하신공 비급과는 달리, 자하강기의 비급을 훑는 청명의 손길에는 조심성도 없고 무심함 기운이 역력했다.
“이건 이제 쓸모가 없네.”
사실 자하신공과 자하강기는 한배에서 난 형제 같은 무학이다.
자하강기도 훌륭한 무학이지만, 자하신공이 있다면 굳이 익힐 필요가 없다. 그래 봐야 자하신공의 하위 판에 불과하니까.
“읏차.”
청명은 쥐고 있던 자하강기 비급을 뒤로 휙 내던졌다.
그 역시 과거에 익혔던 무학이니 묘하게 미련이 남기는 했지만…… 미련 때문에 남겨 두었다가는 무학의 가짓수만 늘릴 뿐, 오히려 후예들의 선택을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쉬움이 남더라도 자하강기는 여기서 폐기하는 게 맞다.
자하강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하신공으로 더 강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 물론 익히는 게 좀 더 난해하고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미련을 깔끔하게 끊어 낸 청명은 자하신공의 비급을 다시 펼쳐 들었다.
“흐으으음. 이거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훌륭한 무학이다.
그가 익혔던 자하강기보다 적어도 두 걸음은 더 나아갔다. 모든 화산 무학의 집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론 청명 역시 자하강기를 자체적으로 변형해서 썼으니 그 위력이야 못지않았겠으나, 역시 자하신공이 자하강기보다 훨씬 더 우월한 무학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화산 선대들의 모든 정수가 이 한 권의 비급에 모여 있다.
“……모든 정수?”
순간적으로 청명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끝이 미미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지, 아니지. 모든 정수는 아니지.”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
“화산 역사에 전무후무한 최고수의 입김이 안 들어갔는데, 감히 화산 무학의 정수라 불릴 수는 없지!”
터덕.
그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잘만 사락사락 넘어가던 책장이 갑자기 턱 들러붙은 듯 잘 넘겨지질 않았다. 하지만 청명은 저항하는 듯한 비급의 책장을 강제로 휙 넘겨 버렸다.
“뭐 지금도 훌륭하지만……. 암. 지금도 훌륭하지만?”
휘어진 두 눈이 빛을 뿜었다.
“더 훌륭해질 수도 있지! 그렇지?”
- 아, 안 돼! 안 돼, 이 새끼야! 그것만은…….
“에이. 어디서 자꾸 이렇게 개가 짖어? 야수궁 그 양반들은 왜 개를 두고 가서!”
- 개 아니야! 이 새끼야! 나야! 나라고!
또다시 귀를 파바박 후빈 청명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무릇 고인 물은 썩고, 무학도 마찬가지일지니, 과거를 그대로 답습해서야 미래가 없다! 무학도 언제나 진일보해야 하는 법! 이것이 화산 십삼 대 장문인 청문의 가르침이니라!”
- 그런 말 한 적 없어! 야! 야, 인마!
“그럼 어디…….”
비급을 눈을 훑으며 청명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금만 내 취향대로 바꿔 볼까? 조금만……. 진짜 조금만.”
무릇 무학이란…… 아주 작은 수정만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
청명은 남은 한 손으로 바닥에 놓인 매화검결을 잡았다. 양손에 자하신공과 매화검결. 화산 무학의 최정화라 할 수 있는 두 무학을 든 청명이 낄낄대며 웃어 젖혔다.
“뭐? 내 무학은 전수가 안 돼? 청진이 이 새끼! 전수하면 네가 뭘 어찌할 건데?”
만일 선계에서 청진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아마도 그 말을 했던 자신의 입을 후려치고 있지 않을까?
“낄낄낄낄.”
양손에 쥔 떡……. 아니, 비급을 바라보는 청명의 두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매화검존의 심득을 아주 그냥 듬뿍듬뿍 담아 줄 테니까!”
화산에…… 망조가 드는 순간이었다.
* * *
“……며칠째지?”
“글쎄요.”
현종이 걱정과 우려가 가득한 눈으로 청명이 꿰차고 들어간 매화동(梅花洞)을 응시했다.
보통 폐관용으로 쓰이는 저 굴 안에 청명이 들어간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아, 거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그게 수련하러 들어간 제자한테 할 말입니까?”
“부, 불안하니 그러지 않느냐! 새로운 무학을 익힌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인데, 혹시 안에서 주화입마라도…….”
“입! 그놈의 입 좀 조심하십시오! 으이구, 입!”
“……내가 장문인이다, 현영아.”
“아……. 잠시 잊었습니다. 죄송.”
“…….”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선은 다시 굳게 닫힌 매화동 쪽으로 돌아갔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화산에서 저 상승 무학을 완전히 파악하고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이 청명밖에는 없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아도 그럴 방법도 없고, 능력도 안 되었다. 결국은 청명이 무사히 비급을 익히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괜찮겠지?”
“으이구, 늙으면 걱정만 는다더니!”
현영이 혀를 차며 역정을 냈다.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저놈이 어디 문제 생길 놈입니까? 저놈 때문에 다른 놈들한테 문제가 생기지!”
“그야 그렇지만…….”
“거 실없는 소리 마시고 잠자코 지켜나 보…….”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고요하던 산이 산사태가 나듯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인가?”
세 사람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멀쩡하고 고요하던 산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원인이야 빤하지 않겠는가?
“어어…….”
현상이 커다란 석벽으로 닫힌 매화동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저, 저기…….”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매화동을 막고 있던 석벽이 아주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안에서 자줏빛의 기운들이 광활하게 뻗어 나왔다.
“…….”
동그란 동굴의 입구가 붉은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매화 향과 함께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모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벌리고 그 압도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쿠웅!
“후우우우우.”
이윽고, 동굴 안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청명……아?”
쿠웅. 쿠웅.
입에서 불그스름한 증기를 내뿜으며 청명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압도적인 무게감이 느껴졌다.
“후우우우우우!”
“…….”
어……. 무공을 익히라고 했더니…… 혹시 잠시 어디 먼 데라도 다녀왔니? 지옥이라든가?
그때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살짝 붉은 기를 띤 자주빛 안광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세 노인은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때 청명의 입이 열렸다.
“자, 이제…….”
“……응?”
우둑. 우둑.
목을 좌우로 꺾은 그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시작하시죠.”
세 노인은 불현듯 같은 생각을 했다.
어째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걸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