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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25화 (723/1,567)

725화. 돌아왔습니다. (5)

“……다시 좀 생각해 보자꾸나.”

“뭘 자꾸 다시 생각해요.”

현종은 평소와 달리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앞의 망할 놈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쩌다가…….’

하지만 현종이 누구인가. 척박한 화산을 짊어지고 살아오느라 현실 파악 능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제자들 백 명을 설득하는 것보다 이 한 놈을 설득하는 쪽이 빠르다는 것쯤이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안 되더라도 들이밀어 보는 수밖에.

“아니. 내 말은……. 그…….”

작게 헛기침을 해 표정을 가다듬은 현종이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그려 내었다.

“본디…….”

“엥?”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율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되레 사람을 편치 못하게 만든다면, 당연히 사람이 아닌 율법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

“그를 정하셨던 선인께서도 지금의 화산을 보신다면 당연히 이해하실 것이다. 그러니 굳이 과거의 관습을 맹목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 판단되는구나.”

그야말로 정론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막장 인간 청명의 주둥아리 역시 오늘따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장문인.”

“그, 그렇지?”

장문인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하나.”

청명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인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은,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문인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그, 그렇지.”

“지금 내가 옳다 믿는 것도 상황이 달라지고, 겪은 것이 많아지다 보면 또 달리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먼저 살아간 선인들이 정하신 율법은 인생이라는 항해를 해 나가는 후인들에게 한 줄기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이 역시 장문인이 하신 말씀이었지요?”

“……그렇지.”

아주 청산유수 그 자체였다.

아이고, 내 제자. 쓸데없이 기억력도 좋지.

쓸데없이…….

“그러니!”

청명이 두 눈을 부라리며 힘주어 말했다.

“선인께서 정한 율법을 함부로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자하신공은 응당 장문인께서 익히셔야 할 것으로 아뢰오!”

“아뢰오!”

“아뢰오!”

옆에서 좋다고 절하는 시늉을 하는 오검을 보고 있자니, 저 자하신공이 왜 장문인에게 꼭 필요한 건지는 확실하게 이해가 갔다.

신공을 익혀 힘을 키워서 이럴 때 제압하고 두들겨 패라는 의미 아닐까? 바로 이럴 때?

현종은 점점 가빠 오는 숨을 애써 골랐다.

어린놈들과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힘과 권위를 가진 늙은 놈들……. 아니, 현명한 노인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장로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그의 물음에 현영이 가장 먼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익혀야 하는 거면 익히면 그만이지.”

“…….”

저 새끼가 아주 지 일 아니라고 막 뱉어?

현종은 다탁 위에 놓인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떨떠름했다.

자하신공.

이 웅장한 글귀를 얼마나 그리고 또 그렸던가?

하지만 막상 자하신공을 마주하고 나니 상황이 생각 같질 않았다. 현종은 잠깐 머뭇거리다 자하신공의 책장을 다시 살짝 넘겨 보았다.

망할.

누르스름한 것은 종이고, 거뭇거뭇한 것은 글자다. 현종도 나름 수십 년 동안 무학을 익혀 왔건만, 이건 당최 무슨 소리를 해 대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책장을 덮고 빙긋 미소 지었다.

‘아니야.’

이건 안 된다.

지금까지 화산의 장문인들은 자하신공을 익히는 데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대제자 출신들이라 무학에 있어서는 천하에서 손꼽히는 이들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현종은…….

“허허……. 허허허…….”

에이, 이건 무리지.

물론 현종은 스스로의 무학이 낮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저 만인방의 대주와 맞서고도 목숨을 부지하지 않았던가.

비록 화산에 남은 무학이 몇 없어 상승공이야 익히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은 것이나마 긁어모으고 또 모아 나름 열심히 정진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얼핏 본 구결들은 그런 수준으로는 어떻게 해 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그 수준이 높았다.

저걸 그가 무슨 수로 익히겠는가?

“……모두 같은 생각이더냐?”

“그렇습니다, 장문인!”

“그러합니다! 장문인!”

……거 눈치들 더럽게 없네.

“크흠.”

현종은 작게 헛기침하고 단호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싱글벙글 웃는 낯을 보고 있자니, 꿀밤 딱! 한 대만 때리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있는 내력 없는 내력 다 끌어모아서.

“제자들은 듣거라.”

“아니, 이미 많이 들은 것 같은데 뭘 또…….”

“그냥 들어, 인마!”

“……눼.”

구시렁대는 청명이 놈을 억지로 무시하며 현종은 근엄하게 일렀다.

“자하신공을 화산의 장문인만 익히도록 한 데는 다 선인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내 이를 모르는 바 아니다.”

현종의 자애로운 눈빛이 모두를 하나하나 보았다.

“선인의 뜻을 지켜 나가는 것은 화산의 이름을 이어 가는 이들의 의무이나, 과연 율법이 정말 선인의 뜻의 전부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인들께서 화산의 율법을 중요시 여기셨겠느냐? 아니면 화산의 부흥을 중요시 여기셨겠느냐?”

“율…….”

획!

‘율법입니다.’라고 대답할 뻔한 윤종은 일순 칼날처럼 자신에게 날아드는 현종의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법이 아니라 부흥이겠지요.”

황급히 덧붙이니 현종의 얼굴에 따뜻하고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조금 전의 그 칼날 같았던 안광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그렇지? 내 생각도 같구나.”

“…….”

윤종의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렇기에 나는 화산 장문인의 권한으로 선대로부터 내려온 한 가지 법도를 바꾸고자 한다.”

현종이 자하신공을 슬며시 앞으로 밀었다.

“자하신공을 장문인의 독문무공에서 제하여, 화산의 모든 제자들이 원한다면 누구나 자하신공을 익힐 수 있도록 하겠다.”

“장문인!”

현상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종은 그 외침을 미뤄 둔 채 선언하듯 말했다.

“이는 화산을 위한 내 결정이니 이견은 받지 않겠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문인.”

현상은 놀란 얼굴로 그를 막아 세웠다.

“모든 제자에게 익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은, 자하신공을 화산의 기본공으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현종이 고개를 내젓고 부연했다.

“무릇 상승무학이란 그 위력만큼이나 위험도 역시 높은 법.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하고 자격을 얻은 이에게만 내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장문과 장로, 그리고 대제자의 엄격한 심사하에 결정한다.”

“아…….”

“그러니 스스로 증명만 한다면 누구나 익힐 수 있다는 의미이니라. 나는 이 결정이 화산을 더 굳건하게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로 당당한 선언이었다.

하나 그 의지견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현종의 시선은 내내 청명과 그 뒤로 좌정한 제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일단 청명은 금방이라도 눈에 심지를 켜고 반대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청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게 장문인의 결정이시라면 따라야죠.”

오? 이놈이 웬일이지? 절대 안 된다고 아주 게거품을 물 줄 알았는데.

청명이라는 놈은 남들이 하늘이 푸르다고 하면 빨갛다고 발악하고, 땅이 평평하다고 하면 둥글다고 몸이라도 이리저리 굴려 댈 놈이다. 그런데 설마 이리 쉽게…….

“다만.”

……그럼 그렇지.

청명이 씨익 웃었다.

“평제자에게 무학을 주는 것과 장문인께서 그 무학을 익히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잖아요.”

“……응?”

“어쨌든 익히셔야죠. 그래도 화산의 장문인인데, 다른 문파의 장로 정도는 때려잡아야 할 것 아닙니까?”

현종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되물었다.

“다른 문파 장로를?”

“네.”

“내가?”

“네.”

현종은 바로 맞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청명의 뒤쪽을 슬그머니 넘겨다보았다.

좌정한 제자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지. 그게 당연하긴 하지.”

“그래도 장문인이신데, 무당 장로 정도는 잡아야 하지 않을까?”

“무당 장로씩이나요?”

“뭐 어려울 것 있나. 청명이도 이기는데.”

“하면 다 되더라고.”

현종의 두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니, 이놈들아…….’

물론 현종은 늘 타 문파에 기죽지 말고 언제나 당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조해 왔었다.

하지만 기죽지 않는 것과 머릿속에 아예 개념이 없는 건 다른 말이다.

안 되는 게 있으면 두들겨 패서라도 되게 하는 데 익숙해진 놈들이다 보니, 이제는 머릿속에 불가능이라는 말이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

긴장한 듯 가볍게 딸꾹질까지 한 현종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 너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물거리며 말을 꺼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 봐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노구를 이끌고 새로운 무학을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정정하신데요.”

“너무 정정하시지.”

“에이. 밖에 나가면 다 중년쯤으로 보죠. 머리도 이리 검으신데.”

어……. 이것도 안 통하네?

현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도 이 나이 되어 봐라! 혼자 새 무학을 익힌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조금 전에 봤던 것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이걸 무슨 수로 익히라는 거냐!”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

청명이 히죽 웃으며 손을 쭉 뻗어 다탁 위에 놓인 자하신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촤라락 대충 책장을 넘겨 보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익히실 수 있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현종은 멍하게 청명을 보았다.

“네가?”

“예, 장문인.”

“나를?”

“네.”

현종이 아예 말을 잃고 입을 벌리고 있으니 청명이 히죽 웃었다.

“구결 정도만 외우시면 운용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보다 잘 가르치거든요.”

“…….”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천만에요.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헤헤.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죠.”

이쯤 되니 현종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내 상식이 이상한가?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는 게 당연하다고?

이게 무슨 공자님이 들으시면 무덤에서 박차고 나와서 수의로 목을 조를 소리인가.

“……그, 그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

“뭐가요?”

“아니, 그…….”

“걱정 마십시오. 장문인.”

그때, 운검이 빙그레 웃으며 운을 뗐다.

“제가 좌수검을 익히느라 청명이 녀석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사온데, 생각보다 무척 훌륭한 스승이 될 재목입니다. 핵심을 잘 짚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장문인께서도 평소 저에게 필요함이 있다면 제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도 전혀 부끄러울 것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제 가르침을 또렷하게 기억하여 차분히 말하는 운검을 보며, 현종은 더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 새끼가 지금 날 멕이는 것인가?’

확, 진짜…….

그때 청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였다.

“사실 장문인께서 굳이 이걸 익히실 필요는 없어요. 탁 까 놓고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장문인께서 강하시기 때문에 따른 건 아니니까요.”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현종이 화산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는 날이 오더라도, 화산의 제자들 중 누구도 감히 현종의 권위를 침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런 놈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산 채로 불태워질 것이다…….

“하지만, 장문인. 세상일이라는 건 어찌 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지금보다 더 강해지셔서 나쁠 건 없죠.”

말을 끝내고 생글생글 웃는 청명을, 현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속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저 말에 틀린 곳이라곤 없으니, 결국…….

“끄응. 알겠다. 알겠어.”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익히면 될 것 아니냐!”

“잘 생각하셨어요, 헤헤.”

현종은 눈앞이 캄캄하여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이 나이에 새 무학을 익히느라 고생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잖아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를 악문 현종이 불현듯 고개를 획 돌렸다.

“현상, 현영.”

“예?”

“너희도 익혀라.”

“……저, 저희가요?”

현상이 가장 먼저 우물쭈물하며 말을 돌렸다.

“자, 장문인. 저는 새로 확보한 비급의 진위를 확인해야 하고…….”

“저는 재경각의 일이 워낙에 고되고 바쁜지라…….”

“됐으니 잔말 말고 너희도 준비하거라. 화산의 장로로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지!”

“…….”

“알아들었느냐?”

“……눼.”

그 대단한 화산파의 장문인답게, 죽어도 혼자서는 죽지 않는 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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