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4화. 돌아왔습니다. (4)
오만상을 찌푸리며 장문인의 처소로 들어선 청명의 입에서 시작부터 불만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아니, 제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급하게 불……. 어?”
하지만 그는 이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안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현종이…….
어…… 왜 누워 계시지?
아니, 설마 저거 뒤로 넘어간 건가?
“자, 장문인!”
“정신 차리십시오, 장문인!”
“소소! 소소를 불러라! 빨리 소소……. 어? 소소야! 자, 장문인 좀 어떻게!”
“커, 커허억!”
그 순간 현종이 물속에서 잠수하다 뛰쳐나온 사람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숨을 들이켰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이, 정말 익사하기 직전에 물에서 건져진 사람 같았다.
“이……. 이, 이게…… 이게 뭔…….”
그의 손이 눈에 보일 만큼 크게 벌벌 떨렸다. 그러자 들려 있는 서책도 덩달아 덜덜덜 떨렸다.
“자, 자하…… 자…… 자하신…….”
‘자하신공이네.’
청명은 그제야 안도하며 평소의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왔다.
현종이 두 눈에 불신과 경악, 그리고 공포(?)와 분노를 담아 백천을 노려보았다.
“이, 이게 뭔…… 이게 갑자기 왜? 이게?”
“아, 그게…….”
백천이 공손히 답했다.
“사조의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걸 말이더냐……?”
“예!”
그는 뿌듯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크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끌어안아 오면 마주 안아야 할지 어째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러나 어째 현종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 조금 달랐다.
“……이걸 왜…… 지금?”
“아, 그건…….”
현종이 멍한 얼굴로 물어오자 백천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진지하게 제를 지내는 와중이니 조금 여유가 생기면 보고를 하는 게 옳다고……. 아아악!”
그 순간 앞에 놓인 다탁을 벼락같이 뛰어넘은 현종이 양발로 백천의 가슴팍을 냅다 걷어찼다.
생각지도 못한 습격에 백천이 뒤로 발라당 나자빠지자 그 광경을 본 모두의 눈이 일제히 툭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장문인께서 사숙을 패신 건가?’
‘아니, 패는 것도 패는 건데…… 날아차기?’
바닥에 엎어졌던 현종이 몸을 벌떡 일으키곤 고함을 쳤다.
“야, 이 미친 녀석아! 이게 뭔 줄 알고 나중에 보고를 하느냐! 이게 뭔 줄……. 끄으윽!”
“자, 장문인!”
“으아아아아! 소소야! 소소야, 빨리!”
그 정신없는 광경을 보며 청명은 멀뚱히 서 있다 빙그레 웃었다.
‘개판이네.’
청진아. 잠깐 눈 좀 감아라.
잠시 후.
“……그러니까.”
“……예.”
시무룩해져선 고개를 숙인 백천을, 현종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적당히 나중에 보고하면 될 줄 알았다?”
“……예.”
순순한 대답에 현종의 핏줄 선 손이 책상 위에 벼루를 콱 움켜잡았다.
“자, 장문인! 일단 진정하시지요!”
“백천입니다! 청명이가 아닙니다!”
“청명이 놈이 이랬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저놈이니 문제지! 어떻게 대제자라는 놈이 사안의 중요성을 이리도 모른단 말이냐! 야, 이놈아! 이게! 어?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진정하십시오. 장문인. 애가 뭘 알겠습니까. 아직 경험이 일천하지 않습니까.”
현상이 진지한 얼굴로 현종을 말렸다.
그리고 백천은 멍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 분명…….
- 장로님. 이번에 같이 수습한 물건이 있는데 장문인께 지금 말씀드려야 할지…….
-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제가 끝나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장로님?
그 순간 현상과 백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현상의 눈빛에는 ‘어설프게 입을 털었다가는 권력과 폭력을 동반한 처절한 응징을 맛보게 될 것이다.’라는 의지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백천은 슬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다란 눈꼬리가 촉촉해졌다.
세상에 믿을 놈……. 아니, 믿을 분 하나 없다더니.
그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운검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장문인. 그 비급이 많이 중요한 것입니까?”
“응? 아……. 이 비급은…….”
백천이 감격한 눈으로 운검을 돌아보았다.
‘사숙!’
사숙조에게 배신당한 마음이 운검의 배려로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현종은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몇 장 넘겨 보았다. 행여 책장이 상하기라도 할세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잠시 후 비급을 닫은 그가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급은 바로…….”
“예.”
“……자하신공이다.”
“…….”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진 운검이 현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그래. 너도 내가 왜…….”
“자하신공이…… 뭡니까?”
“……응?”
현종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운검을 똑바로 보았다.
“몰라?”
“예. 저는 도통…….”
“모른다고?”
“……말씀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만?”
현종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을…… 안 했나?”
그의 시선이 슬쩍 미안함을 싣고 백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선은 왔던 속도보다 배는 더 빠르게 다른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대충 사정을 짐작한 백천의 얼굴에 억울함이 어렸다. 윤종이 슬쩍 그의 어깨를 잡고 다독였다.
“……다 그런 겁니다, 사숙.”
현종이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하곤 말했다.
“이 자하신공이야말로 화산의 최고 기공이라 할 수 있는 무학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그건 이름이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건 자하강기 아닙니까?”
“예, 이거요.”
“응?”
윤종이 품에서 꺼내어 내민 서책을, 현종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눈이 점차 확장되고 핏발이 우수수 서기 시작했다.
“이, 이건 또 어디서 났느냐?”
“……사조께서 지니셨던 비급 같습니다만, 그 사기꾼 놈에게서 회수했습니다. 자하강기라고 적혀 있던데요.”
“뒤에는 매화검결이잖느냐.”
“아, 예. 이게 한 권처럼 보여도 두 권인데, 하나는 자하강기고 하나는 매화검결입니다.”
“…….”
경악과 충격이 장문인 처소를 또다시 휩쓸고 지나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현종은 바닥에 놓인 비급과 오검들을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하지만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려던 그는 결국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이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사칭범을 잡으러 가더니 자하신공을 주워 왔다고? 이게 무슨 길바닥 돌아다니면 떨어져 있는 돌멩이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걸 회수해 왔는데, 왜 별것도 아닌 것처럼 지금에 와서야 슬그머니 들이밀었냐는 말이다. 이 또라이 같은 놈들이!”
“……장문인 속으로 생각하셔야 할 말이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응? 드, 들었느냐?”
“예……. ‘이 또라이 같은 놈들이!’까지.”
현종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이건…….”
“아오! 속 터져!”
여태 가만있던 현영이 결국 갑갑증을 못 이기고 벌컥 짜증을 냈다. 그러더니 현종이 들고 있던 자하신공을 낚아채었다.
“이게 자하신공이다! 거기에 있는 건 자하강기고!”
“……둘이 다른 겁니까?”
“다르지! 자하강기는 화산의 최상위 기공이라 할 수 있다. 칠성기공이나 매화공과는 그 격을 달리하는 기공이지.”
“그럼 자하신공은요?”
“자하신공은 그보다 더 나아간 무학이다. 오로지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화산 최고의 신공이다.”
“오…….”
“와아…….”
화산의 제자들의 감탄과 경외 어린 눈이 일제히 현영의 손에 들린 자하신공으로 쏠렸다.
당연히 대단한 무학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진신절기였을 줄이야.
“그런데 그게 왜 거기서…….”
“그러니까요.”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을 왜 장문인도 아닌 사람이 들고 있었단 말인가? 화산의 십삼 대 장문인은 대현검 청문진인인데…….
“이리 내놓거라.”
현종이 손을 뻗자 현영이 비급을 고이 도로 넘겼다.
비급을 받아 든 현종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레 비급을 다탁 위에 얹었다.
“……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현종이 백천을 향해 물었다.
“사조께서 깊은 굴에 몸을 숨기셨다 했더냐?”
“예, 장문인.”
“……그래, 그렇구나. 사조께서…….”
대략적인 사정을 헤아리던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자하신공을 바라보는 현종의 눈이 젖어들었다.
이 자하신공은 화산 장문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무학이다.
비록 선대의 뜻에 따라 화산 장문인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도, 선대 장문인도 자하신공을 익히지 못한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생을 따라다니는 결핍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자하신공이 마침내 화산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조의 은혜가…… 하해(河海)와 같구나…….”
현종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반쯤 삭아 버린 자하신공의 표지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무각주.”
“예, 장문인.”
현상이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답했다.
“비급을 회수하여 진본 여부를 확인한 후,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라. 혹여 훼손된 부분이 있는지, 훼손되었다면 복원할 수 있는지.”
“예!”
“더없이 중요한 일이니, 심혈을 기울이거라.”
“예, 장문인! 한데…….”
그런데 내내 우렁차게 대답하던 현상이 조금 머뭇거렸다.
“장문인. 자하강기와 매화검결은 제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본 적이 없는 무학이라 그 진의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화산의 무학과 대조하여 확인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흐음, 한데?”
“하지만…… 자하신공만은 제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음? 어째서더냐?”
“화산의 율법상, 자하신공을 익히는 게 가능한 이는 오직 장문인뿐입니다. 장문인이 아니라면 열람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비급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그 진의를 살핀다는 것은 그 비급을 익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엥? 진짜? 그럼 그 새낀 뭐였지?”
진지하게 대화가 이어지던 중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갑자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청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헤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건 사실이다.
근데 보통 그 말을 제 입으로 하지도 않는다, 청명아.
“크흠.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설령 제게 특별히 자하신공을 볼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 해도,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장문인께서 익히시지 않은 무학을 제가 먼저 확인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하신공만은……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예, 장문인!”
현상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화산의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무학입니다. 당연히 직접 보고 익히심이 가장 옳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방 안에 모인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더없이 반짝이는 눈으로 현종을 주목했다.
그 눈빛에 어린 기대를 읽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현종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산 최고의 무학.’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최강의 기공!’
‘그럼 장문인께서 얼마나 더 세지는 거지?’
‘청명이가 두들겨 맞는 거 아닐까?’
‘제발! 제발!’
누구라도 부담을 느끼고 달아나고 싶을 법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현종은 떨떠름하게 현상에게 또 되물었다.
“내가?”
“예, 장문인.”
“이 나이에?”
“……나이가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현종의 고개가 덜컥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분명 같은 비급임에도 조금 전 비급을 볼 때와는 그 마음과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걸 내가 익히라고?’
화산파 최고 무학을? 이 나이에?
현종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올곧게 쏟아지는 기대에 찬 눈빛들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이게 노인학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