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화. 돌아왔습니다. (2)
저벅. 저벅.
뒤를 모르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청명의 발이 점차 느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멈춰 섰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의 초입이 보였다.
어깨에 둘러멘 봇짐을 조심스레 내려 안아 든 청명은 멍한 눈으로 화산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놀라울 만큼 그 산세를 묵묵히 지켜 왔던 곳.
하지만…… 그럼에도 청명이 평소와 같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이 평범한 정경이 누군가에게는 사무치도록 그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뒤이어 달려온 화산의 제자들이 그 뒤에 설 때까지, 청명은 말없이 그렇게 시선을 못 박은 채였다.
뒤에 모여든 기척에 청명은 느리게 걸음을 뗐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온 기세가 무색하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을 오르는 좁다란 길 주변으로 피어 있는 꽃들과 우거진 수풀. 숲에 맞닿아 솟아 있는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그 절벽 사이에 뻗어 나온 노송과 매화나무.
화산의 제자들에게야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모든 것들이 눈에 하나하나 들어왔다.
청명의 뒤를 따라 오르던 오검도 연신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화산의 정광을 다시 새삼스레 두 눈에 담았다.
언제나 급박하고 빠르게 달리며 스쳐 지나던 곳을 느리게 걷다 보니 더욱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고 하던가?
백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대산혈사에서 화산의 선조들이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이미 거듭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아 있었을 뿐, 그 이상의 감흥을 주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앞서가는 청명의 가슴에 안겨 있는 유해를 본 순간 알게 되었다.
‘이 길을 걷고자 하셨겠지.’
목숨을 걸고 천마와 싸운 선조들의 바람은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천마를 죽여, 강호와 화산의 미래를 지켜 내고…….
두 발로 이 길을 걸어 화산으로 돌아오는 것.
그 바람이, 딱히 대단치도 않은 소박한 바람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백천의 가슴을 묵직이 짓눌렀다.
그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중하던 윤종도, 항상 무심하던 유이설도, 아직은 화산의 슬픔에 마음속 깊이 공감하지는 못할 당소소도, 항상 까불거리던 조걸마저도 굳은 얼굴로 말없이 청명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면면들이었다.
저벅.
저벅.
청명의 발은 느리지만 쉼 없이 화산을 올랐다.
주변으로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소로를 차분히 지난 청명은 발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좁은 잔도(棧道)로 들어섰다.
까마득한 절벽에 나 있는 길.
때로는 이것도 길이냐며 화를 내고 욕도 많이 했는데, 그 길을 그저 말없이 묵묵하게 걷는다.
하늘로 치솟은 바위산이 대단한 기세로 그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제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암벽들뿐이다.
일견 삭막할 수 있는 광경이지만 화산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줄줄이 이어진 산 위로 펼쳐진 드넓은 하늘 끝자락이 점차 붉게 물들어 오고 있었다.
청명은 걸음을 멈추고 노을이 쏟아지기 시작한 화산을 가만 바라보았다.
- 멋지지 않습니까?
- 뭐가?
- 저 노을이요. 화산의 상징 아닙니까?
- 미친놈아. 화산의 상징은 매화지.
- 쯧쯧. 그거야 멋모르는 이들이 하는 말이고요. 무학의 기본은 기공(氣功) 아닙니까! 당연히 매화검법보다는 자하신공이 화산의 상징이죠. 자하(紫霞) 하면 노을 아닙니까! 노을!
역시 노을빛에 붉게 물든 청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었다.
- 사실 저는 그냥 노을이 좋습니다, 사형. 화산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정말 근사하죠. 죽을 때는 이 광경을 보며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 뭐래.
- 좀 보십시오. 예쁘지 않습니까, 사형?
- 개소리 작작 하고 서책이나 찾아와라.
- ……말을 말아야지.
구시렁대며 몸을 돌렸던 청진은 고개를 슬쩍 돌려 청명을 돌아보며 이리 말했다.
- 두고 보세요. 언젠가는 사형도 알게 될 겁니다. 화산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죠.
‘청진아…….’
청명도 알고 있다.
이건 그저 유해일 뿐이다. 죽고 남은 몸뚱이는 그 어떤 의지도,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손에 들린 것은 청진의 그 어떤 것도 아니고, 그저 청명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련일 뿐이다.
알고 있음에도…….
청명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긴 속눈썹이 쏟아지는 노을에 노랗게 물든 채 자잘하게 떨렸다.
‘좋더냐?’
모두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다.
그가 원했던, 그리고 청진이 원했던 것은…… 모두가 함께 화산으로 돌아오는 것.
이 좁다란 길을 두고 좁아 터졌다 욕하고, 낄낄 웃어 대며, 마침내는 화산에 올라 정말 힘들었다고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것.
청문, 청진을 비롯하여 모든 청자 배와 명자 배들까지 빠짐없이 같은 곳에 앉아 그렇게 웃는 것.
감긴 청명의 눈앞에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청자 배들, 명자 배들, 이 강호를 지켜 내겠노라 다짐하며 화산을 떠났던 그 많은 이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얼굴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전장에서 마교의 손에 절명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부상을 이기지 못하여 청명의 손을 잡은 채 입술만 달싹이다 죽어 갔다.
하나, 또 하나.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사라진다.
아무도 남지 않은 텅 빈 공간에 청명만이 홀로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함께 돌아오길 바랐다.
이곳으로.
꾸욱.
봇짐을 부여잡은 청명이 눈을 떴다.
붉게 물든 하늘과 구름이 청명의 시야 가득 넘실넘실 밀려들어 왔다.
‘그래. 예쁘구나, 네 말대로.’
또다시 네가 옳았다.
이상하지. 그때는 왜 몰랐을까?
청명의 두 눈동자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그때의 내가 이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면…… 그럼 조금쯤은 달라졌을까?’
절벽을 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유해를 감싼 옷자락이 펄럭이며 청명의 손끝을 가볍게 때려 왔다.
‘오냐, 이 녀석아.’
얼른 가자는 거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다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겠지.
그래, 네가 살던 그곳으로.
그제야 청명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여전히 가파르고 가혹한 길이지만, 청명의 걸음에 지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외려 평소보다 더 굳건하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줏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이제 빠르게 짙은 어둠으로 묻혀 가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청진이 그리워했던 것은 화산의 전부였을 테니까. 어둠이 구석구석 내려앉아, 매화나무 잎사귀 마주치는 소리가 사락사락 퍼져 나가는 밤의 화산도 그리웠겠지.
이제 화산으로 오르는 마지막 절벽 하나만이 남았다.
‘가자.’
봇짐을 꽉 움켜잡은 청명은 단숨에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느릿했던 걸음은 온데간데없이, 실로 경쾌하고 즐거운 걸음으로.
탓.
그리하여 절벽을 박차고 솟아오른 청명의 눈에 드넓은 화산의 정경이 들어왔다. 과거의 화산파 정경이 눈앞에서 겹쳐졌다.
조금 달라졌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모습이 달라진다고 한들, 이곳은 화산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탁.
바닥에 내려선 청명은 산문을 바라보았다.
대화산파(大華山派).
그 용이 승천하는 듯한 필체로 새겨진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돌아왔구나.’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어쩐지 품 안의 봇짐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가자, 청진아.’
청명은 홀린 듯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화산의 담벼락과 높이 솟은 산문, 활짝 열린 그 문 안으로 보이는 정겨운 풍경까지 모두 이제 코앞이었다.
‘고작 열흘이면 올 거리건만.’
참 오래도 걸렸구나, 그렇지?
속으로 익숙지 않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길지 않은 그 거리를 천리처럼 느끼며 그렇게 다가갔을 때 산문에 서서 그를 맞이하는 이가 있었다.
“……장문인.”
화산의 정복(正服)을 입고, 도관까지 쓴 현종이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에 백천이 서신을 넣었다고 했으니 아마 대강의 자초지종은 들어 알고 있으리라.
과연 현종의 시선이 청명의 품 안에 있는 봇짐으로 향했다.
청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화산파 십삼대 제자. 청진진인……의 유해입니다.”
현종이 말없이 봇짐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자락을 앞으로 펼쳐 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더없이 경건하게 절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이 도호를 외었다.
청명은 현종의 손에 청진의 유해를 올려 주었다. 그러자 현종은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 뒤돌아섰다.
마찬가지로 정복을 갖춘 제자들이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들 사이로 난 길을 통해 현종이, 청진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의 끝에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명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
돌아보니 눈에 다정한 웃음기를 머금은 현영이 서 있었다.
“애썼구나.”
“…….”
“우선은 사조를 편안히 모시자꾸나.”
청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여 준 현영은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도착한 오검도 청명을 지나쳐 화산의 안으로 들어섰다.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너무 늦게 화산으로 돌아온 사조를 바라보았다. 모든 눈동자에 경건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청명은 그들 사이로 쉬이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를 뺀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산문 안에 있음에도 이상하게 바닥에 아교라도 칠한 것처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익숙함에, 화산의 풍경에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갑작스레 낯설게만 느껴졌다. 지나친 위화감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청명이 몸을 옹송그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귀가 먹먹해졌고, 눈앞이 아득했다.
‘나는…….’
그때였다.
- 돌아왔습니다.
귓가에 목소리가 스쳤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밤으로 물든 화산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마치 무언가를 쫓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허공을 더듬던 청명은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다시 폈다.
살짝 열린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 청명아!
- 사형!
- 어휴! 사형! 또 어딜 갔다 오십니까!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에 소용돌이 쳤다. 바람에 실려 온 듯한 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해서 청명은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 그저 돌아온 것뿐이리라.
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산문 안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화산으로 들어서는 그의 어깨로, 어디선가 흘러온 자줏빛 매화 향이 조심스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