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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18화 (716/1,567)

718화. 여기 있었구나. (2)

- 제가 적에게 둘러싸이면 반드시 저를 구하십시오. 만일 그게 어렵다면 죽은 시체라도 화산으로 끌고 가십시오.

- 그것도 안 되면 이 비급만이라도 반드시 화산으로 보내야 합니다.

- 잊지 마십시오, 사형.

-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사형밖에 없으니까요. 절대! 절대 잊지 마십시오!

“어……. 어어…….”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이 백골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닿을 듯하던 손끝은 이내 겁을 집어먹은 듯 멈추었다.

두렵다.

이 손이 닿는 순간 바스러져 버릴까 봐.

환상인 것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진아.”

여기 있었구나.

여기에 있었구나.

내 사제야. 이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외로웠느냐.

얼마나…….

“어어…….”

말을 잃은 듯 억눌린 소리만 내며 청명은 떨리는 손끝으로 백골의 이마를 더듬거렸다. 거칠고 차가운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흠칫 놀라 손을 뗐지만 이내 다시 갓난아이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레 다시 백골을 쓰다듬었다.

“어……. 어어어……. 어어…….”

내가……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얼마나 오래 기다렸느냐. 이 차디찬 곳에서 어찌 이리도 오래 기다렸느냐.

용서해라.

용서해라, 청진아.

이제야 너를 찾아온 이 못난 사형을 용서해라.

백골의 볼을 더듬는 손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매만지는 듯했다.

왜 사람이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어찌 이토록 어리석은 걸까.

청명의 턱이 떨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삭아서 반쯤 사라져 버린 옷가지가 보였다. 그 안으로 보이는 뼈는 곳곳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마화(魔花)…….’

이 정도면 마지막 순간엔 걷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걷다가 못 버텨서 무너질 때면 필사적으로 구르고 기며 이곳까지 왔을 테지.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나 반드시 남겨야 하는 것이 있다.

세상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 오로지 화산의 제자들만이 찾아낼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에 어떻게든 남겨야 하는 것.

실낱처럼 남은 수명을 줄여 가며 굴을 파내고, 언젠가는 이곳을 찾아올 이들을 떠올리며 죽어 갔을 것이다.

이제는 화산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적어도 그 화산을 떠올릴 수 있는 곳에서…… 그렇게 홀로 외로이.

‘기다렸지?’

내가 올 거라 믿었겠지?

이 내가, 네 사형이.

청명의 시선이 마침내 옷자락 안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았으되 보지는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멋대로 이지러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탓이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꽉 감았다. 넘쳐 버린 슬픔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청명은 제가 온당히 찾아야 할 것을 응시했다.

단 한 권의 비급.

청진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던 것.

자하강기, 매화검결.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서책을 응시한다. 세월에 휩쓸려 많이 흐려졌지만, 여전히 그 유려한 필체는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청명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하신공(紫霞神功).

- 이건 사형한테도 못 보여 줍니다.

- 아! 이건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무학이라니까요! 저리 가십쇼! 확 찢어 버리기 전에!

- 예. 당연히 제가 지녀야죠. 저는 비급을 지키고, 사형은 저를 지키면 되는 겁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비급만은 지켜 낼 테니까요. 그게 제가 화산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그래. 너는 지켜 냈구나.

그런데…….

“나는…….”

청명이 바닥을 움켜잡는다.

“나는 그러지 못했구나. 나는…….”

용서해라. 부디 이 못난 사형을 용서해라.

청진아……. 청진아.

치미는 슬픔이 너무 커서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참아 왔던 모든 것들이 목을 비집고 흘러나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벌벌 떠는 손을 앞으로 뻗어, 이젠 너무도 작아져 버린 백골을 조심스레 안았다.

혹여 바스러질까, 행여 부러지진 않을까, 차마 닿지도 못하고 그렇게 어정쩡하게 허공만 끌어안은 채 청명은 백골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어……. 어어어어어……. 아아…….”

거대한 감정이 가슴을 짓누르다 터져 나왔다.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돌아가자.

같이 돌아가자.

이제 내가 왔으니까. 같이 화산으로 돌아가자, 청진아.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화산으로 돌아가자.

거기에 아직 네가 남긴 것들이 있다. 네가 남기고자 했던 것들이 숨쉬고 있다.

“어어…….”

그건 흐느낌이라기보다는 경련에 가까웠다.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그간 막아 놓은 감정이 터져 나왔다.

네 말이 옳았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지키려고 했던 이들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네 말대로, 네가 남긴 것들을 끌어안고.

그러니까 돌아가자.

네가 지킨 곳. 네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으로.

마치 혀를 잃은 사람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꺽꺽거리는 청명을 지켜보던 백천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함께 내려와 그 광경을 보던 사제들도 청명과 오랜 세월에 바래 버린 그들의 선조를 보며 말을 잃은 듯했다.

‘백 년이나…….’

이렇게 좁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백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만한 굴을 팠다는 것은, 결국 적의 눈을 잠깐이나마 따돌렸기에 가능했을 터. 그 말인즉, 달아날 시도를 해 볼 수도 있었단 의미다.

그런데도 선조는 남은 힘으로 모험을 하는 대신 적들이 찾아낼 수 없는 곳에 숨어드는 쪽을 택했다.

목숨을 내놓는 대신 몸에 지닌 비급을 언젠가 반드시 화산에 전하기 위해서.

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했을지, 백천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백천이 가만히 눈짓하자 의도를 이해한 제자들이 좌우로 살짝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이 배.”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몸짓이었다. 선조에 대한 존경과, 마지막 순간까지 제 의지를 관철한 무인에 대한 경의를 담아서.

한 번.

또 한 번.

두 번의 절을 마친 백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청명에게로 다가섰다. 이번에는 유이설도 그런 백천을 말리지 않았다.

“청명아.”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이 닿는 순간 떨림이 느껴져 온다. 언제나 당당했던 어깨가 지금은 섣불리 잡기가 두려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백천은 조심히 청명을 타일렀다.

“이분을 조속히 화산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

“여긴 너무 춥고 외롭구나. 화산으로 가자, 청명아. 선조께서도 그걸 원하실 거다.”

그제야 청명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조심스레 백골을 놓은 후 천천히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옷을 크게 펼쳐 바닥에 깔았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말없이 백골을 바라보았다.

왜 청명이 움직이지 않는지 짐작한 백천이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내가 하마.”

“……아, 아니.”

하지만 청명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해야 해……. 내가 해야 해, 사숙.”

그가 알던 청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백천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청명은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백골을 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래. 돌아가자, 청진아.’

계속 돌아가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상처 입은 뺨을 매만지듯 백골을 잡은 청명이 천천히 힘을 주어 들어 올린다. 손끝에서 살짝 저항이 느껴졌다.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문 청명은 두 눈을 감고 백골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작게 덜컥이던 백골이 목과 떨어졌다.

그 머리를 몇 번이고 어루만지고서야 풀어 놓았던 웃옷 위로 조심스레 옮겼다.

달깍.

금방이라도 바닥에 우수수 흩어질 것 같은 백골을 하나하나 떼어 내 웃옷 위로 옮겨 낸 청명은 마지막으로 남은 옷가지까지 백골 위에 올리고 조심스레 제 옷으로 싸맸다.

‘갑갑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청명이 바닥에 놓인 비급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가가 그 비급을 백천에게 내밀었다.

“이건…….”

“사숙이 챙겨.”

“…….”

“이건 사숙이 해야 할 일이야.”

백천은 낡은 비급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도를 모두 짐작할 수는 없지만, 청명의 그리 말한다면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웃옷을 벗어 그 비급을 조심스레 싸매었다.

청명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청진의 유골을 들고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벽에 새겨진 글귀에 가 닿았다. 괜스레 웃음이 났다.

‘하여튼, 멋대가리 없기는.’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면, 적당히 있는 척이라도 할 것이지.

이 미련한 놈아…….

‘그래.’

이제 가자꾸나. 네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곳으로.

청명은 고개를 들어 화산오검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드디어 나온 그 말에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종이 가장 먼저 발을 떼려 했으나, 그때 백천의 말이 그를 잡아 세웠다.

“똑똑히 보고…… 기억해라.”

모두가 동굴 안의 광경을 두 눈에 아주 깊게 새겨 넣었다.

“여기에 화산의 혼이 있었다.”

화산을 지켜 낸 것은 천하제일도문이라는 명예도, 천하제일검문이라는 명성도 아니다.

화산을 지켜 낸 것은 이곳에 남은 의지다.

그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 그들이 이어 나가야 할 것이 모두 이곳에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두 눈에 새겨 넣은 화산의 제자들이 굳은 얼굴로 하나둘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이설과 백천마저 빠져나간 동굴에 홀로 남은 청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어두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비어 버린 굴에 기억 속 청진의 모습이 그려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가면서도 굴을 파고, 내력으로 벽을 다지고, 마지막 글귀까지 써 넣은 뒤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가부좌를 틀고 앉았겠지.

그리고…….

‘웃었더냐?’

그래, 네놈이라면 그랬겠지.

- 뒤는 맡깁니다. 망할 사형.

빙그레 미소 지은 청진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

안다. 못 미덥겠지. 나는 그런 놈이니까.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네가 한 말, 네가 한 당부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청명은 천천히 벽으로 다가섰다. 우두커니 선 채로 청진의 마지막 글귀가 새겨진 석벽을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손을 들었다.

가가각.

단단한 석벽이 긁히는 소리가 동혈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손을 내린 청명은 석벽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그가 통로를 통해 몸을 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흙더미가 쏟아지며 통로가 완전히 닫혔다.

동굴은 이제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제 이곳으로 빛이 스며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세월이 수도 없이 흘러서…… 쉴 곳을 찾아든 짐승이 굴을 파거나, 비바람에 깎여 모습을 드러낸 이곳을 누군가 발견하게 된다면 석벽에 새겨진 글귀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내 몸은 이곳에서 잠드나

내 마음만은 머나먼 화산과 함께한다.

대화산파 십삼대제자 청진.

화산의 혼이 남긴 것을

화산으로 되찾아 간다.

대화산파 십삼대제자 청명.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그 뜻 모를 글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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