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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15화 (713/1,567)

715화. 같이 돌아가자. (4)

사락. 사락. 사라락.

붓 끝이 흰 종이 위를 쉴 새 없이 오갔다. 때로는 웅장한 필체로 글씨를 써 넣고, 때로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사람의 형상을 그려 넣었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손에 비해 붓을 잡고 있는 사람의 몸은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그저 반개한 눈으로 깜빡임도 없이 손이 만들어 내는 글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글씨를 써 대던 사내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제가…….”

진중하던 사내의 얼굴이 일순 무너졌다. 오만상을 찌푸린 그는 고개를 획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일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그만큼 부탁을 드렸잖습니까! 집중이 필요한 일이라고요.”

“뭐, 인마? 내가 말을 했냐, 걷어차기를 했냐! 그냥 와서 숨 한 번 쉬었는데 왜 짜증이야?”

“제가 가만히 있었으면 또 고함질렀을 거 아닙니까! 아니면 냅다 들이받거나!”

“근데 너 요새 슬슬 기어오른다? 방구석에서 비급만 써 대다 보니까 겁대가리에도 먹칠을 한 모양이지?”

“……들어오십시오.”

“쯧.”

청명이 창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으로 좀 다니시라고요.”

“여기가 더 가깝잖아.”

한숨을 푹 내쉰 청진은 쓰고 있던 비급을 옆으로 슬며시 치웠다. 저 양반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형이 비급 챙겨 오래. 볼 거 있다고. 이거.”

청명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툭 던졌다. 그걸 주워 들어 펴 본 청진의 눈가가 짧고 빠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건 그냥 서고 가면 있는 것들이잖습니까!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그럼 내가 찾으리?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청진이 머리를 감싸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그래. 그 말도 맞긴 했다.

자타공인 화산의 이인자인 청명이 서고에 가서 이런 비급들을 찾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런데 그럴 거면 그냥 손 남는 애들한테 시키면 될 것이 아닌가! 그의 밑으로 제자들이 몇인데!

안 그래도 바빠 죽어 가는 사람에게 굳이 찾아와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왜 저한테……!”

“원래 비급 관리는 네가 하는 거잖아.”

“…….”

맞지. 그 말도 맞지. 그래, 틀린 게 하나 없지!

그런데 이 미친 양반아! 내가 열 냥짜리 전표를 은자로 바꾸겠다고 대륙전장 장주를 찾아가지는 않잖아!

대체 저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개념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속이 터지는 청진이었다.

‘아니, 바뀔 수 있는 거였으면 30년 전에 바뀌었겠지.’

한숨을 푹푹 내쉰 청진은 두루마리를 옆에 내려놓고 흐린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제가 챙겨서 가져다드릴 테니 가 보십시오, 사형.”

“빨리 해 줘야 돼.”

“알았습니다.”

“아, 빨리 해 줘야 한다고! 아니면 장문사형이 또 나한테 뭐라고 한단 말이야! 너 이 나이 돼서 욕먹는 기분 아냐?”

“제가 왜 모릅니까! 내가 지금 당장 이 나이에 욕을 죽어라고 퍼먹고 있는데!”

청명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대드냐?”

“……그건 아니고.”

“조심해, 너. 내가 지켜본다.”

청진은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소매로 훔쳐 내었다.

이건 청명을 탓할 일이 아니다. 청명은 원래 그런 인간 아니던가? 개가 짖는 것을 욕해서는 안 되고, 새벽마다 닭이 운다고 화를 내서도 안 된다. 그러니 청명을 탓해서도 안 된다.

‘장문사형은 대체 왜 이런 일을 사형한테 시키냐고!’

그 양반이 제일 문제였다.

청명 사형한테 일을 시켜 놓으면 꼭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꾸준하게 일을 시켜 대지 않는가! 청명을 사람으로 만들 노력이면 소를 용으로 만들고도 남을 텐데!

“근데 너 뭐 쓰고 있냐?”

“끄응……. 이번에 새로 애들한테 줄 무학입니다.”

“응? 뭘 또 만들었어?”

“……아뇨. 이건 그냥 살짝 변형한 겁니다. 기존의 무학이 조금 비효율적이라 산매검을 조금 고쳐 봤습니다.”

“이 새끼가 심심하면 기사멸조(欺師滅祖)네. 또 고쳐?”

“……발전하지 않는 무학은 죽은 무학이라니까요. 계속 수정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지랄한다. 줘 봐. 무슨 짓 했는지 볼 테니까.”

“아니, 제가 알아서…….”

“야.”

움찔.

“가져와.”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청진이 쓰고 있던 서책을 힘없이 청명에게 내밀었다.

비급을 받아 든 청명은 아직 먹이 채 마르지도 않은 서책을 후루룩 넘겼다. 그리고 아주 짧게 감상을 남겼다.

“개판이네.”

“……뭘 보긴 보셨습니까?”

“이 정도 무공이야 그냥 눈으로 훑으면 그만이지. 뭘 이렇게 애들 장난처럼 만들어 놨어.”

“애들 장난이라니요!”

청진이 눈을 부라리자 청명이 살며시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러자 청진이 눈을 곱게 아래로 내리깔았다.

“여기 봐, 여기! 인마! 여기서 검을 펴는 게 아니라 뒤틀어야 제 위력이 나지! 너는 화산 밥 먹은 지가 몇십 년인데 아직도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사형.”

청진은 속이 터진단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등신도 아니고, 거기서 뒤틀어야 더 위력적이라는 걸 몰랐겠습니까?”

“응.”

“아니! 알았다고요! 나도 알았다고!”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청명의 발이 휙 날아들자 청진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청명의 발이 허공을 가르며 펑 하고 공기 터지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어쭈? 피해?”

“마, 말로 합시다, 말로!”

“근데 이 새…….”

“자, 장문사형한테 이를 겁니다?”

“……봐줬다.”

청명이 그제야 다리를 회수했다. 청진이 눈물 맺힌 눈으로 그를 흘겼다.

‘귀신은 뭐 하나.’

아니. 벌써 왔었겠지. 진즉에 왔다가 개처럼 두들겨 맞고 도망갔겠지.

힘만 센 망나니 도사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는 사람도 귀신도 어쩌지 못할 테니까.

청진은 투덜거리는 청명을 보다 말했다.

“사형.”

“응?”

“사형은 그래서 안 됩니다.”

“안 되겠다. 너 그냥 맞자.”

“아, 아니, 끝까지 좀 들으십시오! 그래서 사형의 무학은 화산에 남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응?”

청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설명을 보탰다.

“사형 말대로 거기서 검을 뒤틀면 위력은 분명히 좋아집니다. 하지만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를 현혹하는 검기를 뿌리는 와중에, 정확하게 손목을 뒤틀어 위력을 더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꼭 해야지.”

“아니요. 그러니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화산의 무학은 사형 같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왜?”

영 못 알아듣는 청명을 보며 청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형 같은 사람은 알아서 개선하고 고쳐 씁니다! 애초에 이런 비급은 사형같이 이해하고 고쳐서 쓰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고쳐 쓸 능력은 없어도 그저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강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 거란 말입니다!”

“…….”

“그러니 꿈 깨십시오. 사형은 화산의 역사에 절대 이름을 남기지 못할 테니까요.”

“이게 악담을 해?!”

“손! 손 좀 내리고! 아니, 손 내리라고 했다고 발 들지 마시고요!”

한참을 씨름해서 간신히 청명을 진정시킨 청진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사형이야 어차피 그냥 힘만 센 사람 아닙니까.”

“내가 힘이 좀 세긴 하지.”

“……칭찬 아닙니다.”

청명이 노려보았지만 청진은 굴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사형 성격에 다른 문파 찾아다니며 비무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문인 성격에 사형 실력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니니, 결국에는 화산에서나 좀 잘나갔던 검수 취급을 받겠지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청명이 멍하니 고개를 갸웃하자 청진이 속 터진단 얼굴로 외쳤다.

“그러니까 좀 나가서 패고 다니라고요! 왜 우리만 팹니까? 사형이 실력대로 다 때려잡고 다녔으면 천하삼대검수? 고작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듣고 다녔겠습니까?”

“패긴 했어.”

“남들 앞에서 패라고, 남들 앞에서!”

“근데 이게 진짜 자꾸 성질이네. 확 진짜.”

청진이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망종 같은 인간이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살짝 차분해지긴 했다. 옛날 같았으면 벌써 그의 얼굴로 신발이 날아왔을 것이다.

“사형.”

“응?”

“저는 사형보다 약합니다.”

“아니지. 너는 나보다 약한 수준이 아니라 청자 배에서 제일 약하잖아.”

“……여하튼요.”

청명을 보는 그의 눈이 다소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화산의 역사에는 사형이 아니라 제 이름이 남게 될 겁니다. 제가 만든 비급으로 제자들이 무학을 익히고, 더 나은 화산을 만들어 갈 겁니다.”

이 말에는 천하의 청명조차 딴죽을 걸지 못했다.

“이게 제가 화산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

“사형도 제발 이제는 철 좀 드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십시오.”

“야. 지금 당장 화산에 누가 쳐들어오면 누가 막을 것 같은데? 내가 그때를 위해 참고 사는 거야.”

“쳐들어오긴 누가 쳐들어온다고.”

청진이 혀를 차자 청명이 울컥했다.

“혹시 누가 쳐들어와서 화산이 망하기라도 하면 그런 비급이 뭔 쓸모가 있냐! 지금이 있어야 내일도 있는 거지!”

“그럼 저는 비급 보따리를 싸매고 그냥 달아날 겁니다. 사형이야 뒈지든 말든.”

“뭐, 이 새끼야?”

“화내지 말고 칭찬을 해 주셔야죠. 사형이 없어도 화산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산의 무학이 끊긴다면 사형이 있어도 의미가 없죠.”

“내가 가르치면 되지.”

“……지금의 사형으로는 안 됩니다.”

“…….”

고개를 내젓는 청진의 눈빛이 살짝 어두웠다.

“사형. 만에 하나 정말로 저나 장문인이 화를 당하면 사형이 화산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게 미쳤나. 뭔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만에 하나라니까요.”

청진은 골치가 아픈 듯 중얼거리고는 청명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사형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형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해 주면 언젠가는 화산에 또 사형 같은 사람이 나타날 겁니다.”

“…….”

“그게 전수라는 겁니다. 당장 제자를 강하게 키우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청명은 그런 청진을 바라보다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어, 그래. 잘 알았고.”

“……발.”

“뭐?”

“아닙니다. 아무것도.”

당장의 청명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크게 의미가 없단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막막함에 청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저는 죽어도 살 겁니다. 목숨이 위험해지는 날이 오면 바로 중요한 비급 챙겨서 달아날 겁니다.”

“밖에 있을 때 쳐들어오면 못 챙기잖아.”

“흥! 그래서 제가 제일 중요한 것들은 이리 챙기고 다니는 겁니다.”

청진이 옷을 풀어헤쳐 배에 복대처럼 두른 비급을 보여 주었다. 청명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방어구 같은데?”

“겸사겸사.”

청명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 마, 인마. 화산제일검이 기억되지, 네가 뭔 역사에 이름을 남겨.”

“두고 보십시오. 세상은 저를 기억할 테니까요. 사형 같은 사람은 까맣게 잊어버릴 겁니다.”

“……근데 이 새끼가 듣자듣자 하니까.”

“아악! 장문사혀어어어엉!”

“너 오늘 뒈져 봐라. 이 새끼야! 확!”

청진의 비명 소리가 전각을 뚫고 울렸지만, 그 소리를 들은 누구도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또 시작이구나.”

“그러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화산의 제자들은 금세 관심을 끄고 제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높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화산의 험준한 봉우리를 타고 흘렀다.

* * *

타닥. 타닥.

몸을 일으킨 청명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옮겨 붙었다. 불 주위로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지쳐 잠들어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을 가만 바라보던 청명은 시선을 올렸다.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빽빽한 밤하늘을 보다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았다.

- 두고 보십시오. 세상은 저를 기억할 테니까요.

청진아.

네가 틀렸다.

세상은 너도 나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도 너무 슬퍼 마라.

내가 기억하니까.

아직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청명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그런 그의 뒤에서 천천히 눈을 뜬 유이설은 떨리는 등을 말없이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들려오는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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