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화. 같이 돌아가자. (1)
쐐애애애애액!
청명이 쾌속하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한 손에는 진양건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진양건은 아이 손에 들린 인형처럼 들린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고생이네.’
조금 뒤에서 청명을 뒤따르던 조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이 정도 속도는 진양건의 평생에 처음일 것이다. 말에 올라탔다 해도 떨어져 죽을지 모른단 공포를 느낄 판에, 청명의 손에 붙들려서 가고 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하얗게 질리다 못해 이제는 푸르죽죽하게 죽어 가는 진양건의 낯을 보고 있으니, 화산을 사칭한 사기꾼 놈임에도 측은지심이 생겼다.
그때, 윤종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숙.”
“음.”
“……저놈 괜찮을까요?”
백천은 대답 대신 무심하게 달리는 청명의 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모르겠구나.”
윤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저놈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그래도 설마 정말 아무것도 안 챙기고 출발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청명이 진양건을 잡는 와중에 철모방이 궤멸했고, 금검부는 그런 철모방을 상처 없이 제압했다.
금검부가 어떤 곳인가. 부귀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문파다.
평소 같았다면 이 일을 핑계로 금검부의 기둥뿌리를 뽑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금검부주가 위통으로 배를 부여잡고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청명은 금검부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준비가 끝나는 순간 곧장 진양건의 뒷덜미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돈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비급.”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유이설이 청명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비급…… 관계.”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
백천이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말했던 비급과 청명이 놈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뭔지는 저놈이 어떻게 알고요?”
“예전에…….”
백천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말끝을 흐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운암 사숙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명이 놈이 자신이 화산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려 했는데 장문인께서 그런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된다며 만류했다고 하시더구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윤종의 물음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할 말이 있었다는 건,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게지. 내 생각에는 지금 저놈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그 사연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달리면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조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장문인께서는 왜 말을 막으셨답니까? 저는 안 그래도 저놈이 대체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놈!”
백천이 엄하게 일갈하며 눈을 부라렸다. 조걸은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아, 아니……. 장문인께서 잘못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장문인께서 생각이 없어 그러셨겠느냐.”
백천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화산으로 돌아온 이들은 과거에 떠났던 이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연이든 화산을 등지고 갔던 이들이다.”
“…….”
“그러니 굳이 들으려 하지 않으신 게다. 어떤 사정 때문에 떠난 이의 후손이든, 다 망해 가는 화산에 제 발로 돌아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된 거라 생각하셨겠지.”
“아…….”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왜 청명의 사연을 들으려 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백천의 시선이 앞서 달리는 청명의 등으로 향했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왜 저리 다급한지.”
사실 백천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건 청명이 놈의 사연 같은 게 아니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그 사연이나 비급의 중요성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청명아.’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저 굳은 얼굴이 다시 원래대로 밝게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형.”
“응?”
그때 유이설이 슬쩍 백천을 보며 낮게 말했다.
“광동.”
“……무슨 의미냐?”
“이대로 가면 광동. 거긴…….”
“…….”
입을 다문 백천의 얼굴이 굳었다.
‘만인방의 본거지구나.’
만인방의 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평소에도 껄끄러울 일이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에 만인방도 둘을 벤 상황이니 광동으로 들어가기가 더욱 거북스러웠다.
“그 넓은 광동을 만인방이 모조리 장악하고 있지는 않겠지. 듣자 하니 저자의 고향은 외진 시골인 모양이던데.”
“그렇기는 하겠죠.”
“어차피 이제 와서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니 큰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리는 발에 박차를 가했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화산의 제자들이 앞으로, 또 앞으로 쏘아졌다.
* * *
“여기야?”
“예, 예! 바로 여기입니다!”
진양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는 그래도 나름 얼굴에 기름기가 돌았었는데 지금은 관에 누워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핼쑥해져 있었다.
“여기가 제 고향입니다.”
청명의 시선이 눈앞에 있는 작은 마을을 넘어 더 뒤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에 삐죽삐죽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였다.
이곳에서야 아주 작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백, 수천 개의 산들이 줄지어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곳.
세인들은 그 산맥을 이리 부른다.
“……십만대산.”
그 목소리를 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청명의 시선이 닿은 곳을 응시했다.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저기가…….”
이렇게 복잡한 감정과 큰 무게를 동시에 떠안길 수 있는 말이 현 강호에 또 어디 있겠는가. 순식간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마교의 본거지였던…….’
‘화산이 싸웠던 곳.’
멍하게 그 산등성이를 바라보는데 문득 조걸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십만대산은 신강에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응?”
그러자 윤종이 살짝 동조했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니, 나는 광동이라고 들었는데? 광동과 광서의 경계에 있다고.”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또 다른 말을 했다.
청명은 눈앞에 보이는 능선에 눈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둘 다 맞아.”
“응?”
“생각해 봐. 마교는 지금껏 몇 번이고 부활해서 중원을 침공했어.”
“그렇지.”
“그런데 원래 머물던 곳에서 재기를 도모할 수 있었겠어? 패했으면 당연히 달아나야지.”
“……그렇겠지.”
“강호인들도 바보가 아니니 그들이 머물던 곳을 철저히 파괴하고 감시했어. 그래서 마교는 다시 나타날 때마다 다른 곳에서 시작했다. 그중 놈들이 가장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곳이 청해와 신강의 경계에 있는 십만대산과, 이곳에 있는 십만대산이야.”
“아…….”
“마교가 자리한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십만대산이지.”
청명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이제 저 산에는 과거 마교의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백 년은 긴 시간이고, 잔당들은 교의 부흥을 위해 지금쯤 중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무르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저곳은 이제 그냥 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십만대산을 바라보던 청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
그러리라 생각했다.
청진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향하고 있던 곳을 감안한다면 이 근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의 청명은 청진을 찾아 나설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는 와중 사사로운 이유로 그가 몸을 뺄 수는 없었다.
그의 결정이고, 청문의 결정이었다.
지금도 그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청명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비급 어디 있어.”
“제, 제 집에…….”
“가자.”
“예!”
허둥지둥 앞장서는 진양건을 따라 모두 마을로 진입했다. 작은 초가가 드문드문 자리한 마을을 가로지르고도 한참 더 간 끝에야 유난히 낡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헐레벌떡 집 안으로 박차고 들어간 진양건은 맨손으로 바닥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마루를 파 대던 진양건의 손에 작은 궤짝이 들려 나왔다.
“여,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얼른 그 궤짝을 청명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청명은 손을 뻗어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긴장감에 진양건은 손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이 침묵을 깨고 청명을 재촉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청명이 가만히 손을 뻗어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낡은 책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싶더니,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한 권의 서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앞면에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서책.
청명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그 손끝이 떨리는 걸 백천은 놓치지 않았다.
청명이 조심스레 꺼낸 서책은 꽤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두 권의 비급에 구멍을 뚫어 한 권으로 묶어 놓은 형태.
청명은 그 서책을 이제껏 본 적 없을 만큼 섬세하게 펼치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사그락.
사그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정적 속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한 장 한 장 빠짐없이 확인을 마친 청명은 마지막 장을 덮고는 서책을 다시 궤짝 안에 넣었다.
탁.
뚜껑을 닫은 청명이 진양건의 손에 들린 궤짝을 받아 손에 들었다.
어지간한 귀중품이 꽉꽉 들어찬 궤짝도 발로 차 대는 청명이 이번엔 아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다루는 것을 보며 백천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저 책이 무엇인지,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곳까지 헛걸음을 하진 않은 모양이다.
“안내해.”
청명의 짧은 말에 진양건이 다시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쪽입니다. 그 비급을 발견한 사냥꾼 아저씨는 저 앞집에 삽니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저 멀리 건너편 집을 향해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표 아저씨! 표 아저씨!”
단번에 마당으로 박차고 들어간 진양건은 쫓기는 사람처럼 집의 문을 마구 두드려 대었다.
“아저씨, 계십니까! 저 건입니다! 진양건이요!”
진양건의 목소리가 점차 다급해질 즈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저, 접니다, 아저씨! 건입니다.”
“……건이? 어……. 응? 아건이냐?”
“예, 접니다!”
“네놈 출세하겠다고 마을을 떠나더니 벌써 돌아왔……. 그런데 몰골이 왜 그러느냐?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그래, 그럼 이제 완전히 돌아온 게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말씀 좀 묻겠습니다.”
백천이 앞으로 나서서 노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노인이 조금 경계하는 기색으로 백천과 그 일행을 바라보았다.
“뉘, 뉘시오?”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양건과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촌구석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에게 물을 게 뭐가 있다고…….”
“청명아.”
백천의 부름에 청명은 말없이 궤짝을 열어 그 안에 든 비급을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진양건이 이 비급을 어르신에게 받았다고 하던데, 혹시 기억하십니까?”
“……비급? 책?”
“예. 이 책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노인은 낡은 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저런 것을……. 아!”
그러다 뭔가가 떠오른 듯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지! 저걸 내가 주웠었지. 안에 칼 휘두르는 사람이 그려져 있기에 무관 다니는 건이 놈 주면 좋겠구나 했었지!”
백천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 책을 주운 곳이 어딥니까?”
“글쎄, 그게…… 말로는 설명이 좀 어려운데.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그게 산속이다 보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노인을 보던 백천이 살짝 눈짓했다. 그러자 조걸이 소매 안에서 묵직한 전낭을 꺼내 노인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례가 변변치는 않습니다만, 저희가 사정이 급하여 그러니 그곳까지 안내를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고야 싶지만, 내가 다 늙어서 이젠 기력이…….”
슬쩍 전낭을 열어 본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걸 다……?”
“부탁드립니다.”
노인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리고말고요. 나으리들! 제가 기력은 쇠했지만, 기억은 아주 멀쩡합니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죠! 암요!”
“부탁드립니다. 지금 바로.”
“예! 걱정 마십시오.”
호언장담하는 노인을 보던 백천은 청명에게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걱정 마라, 이놈아.’
백천의 얼굴에 의지가 서렸다.
네놈이 찾는 게 무엇이든, 우리가 반드시 찾아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