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화. 나는 확인해야 해. (6)
청명의 눈엔 붉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으득!
목을 움켜잡은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강한 힘으로 밀어 대고 있는지, 금이 간 벽이 삐걱거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했다.
“끄윽……. 끅…….”
눈을 까뒤집은 진양건의 입에서 새하얀 거품이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혀를 빼물고 죽어 버릴 듯한 모양새였지만 청명은 그의 사정을 봐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말해.”
“끄륵…….”
“이……!”
분노를 못 이겨 진양건을 막 다시 벽을 처박으려던 청명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시선을 돌렸다.
“뭐야.”
그의 등 뒤에서 백천이 검을 겨누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유이설이 검을 까딱거렸다.
“뭐긴.”
백천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했다.
“사질 놈이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등에 구멍이라도 내 주면 정신을 차릴까 싶어서.”
“너 혼나.”
“…….”
그 덕에 살짝 이성이 돌아온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거 참 고맙네.”
“별말씀을.”
“쯧.”
청명은 짧게 혀를 차곤 진양건을 툭 내버리듯 놓았다.
쿵!
벽에 부딪힌 진양건이 바닥으로 철푸덕 쓰러지면서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케엑! 켁! 콜록! 콜록! 후우우우웁!”
구역질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진양건은 숨을 몰아쉬고 콜록거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밖은?”
“보시다시피.”
백천이 슬쩍 옆으로 비켜나 뒤쪽의 상황을 보여 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이들이 몰려와 철모방도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철모방도들은 이미 대항할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감히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여기 개방 분타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능력이 있나 보더라. 금검부주를 설득해서 금검부를 모두 이끌고 온 모양이야.”
“거지면 눈치라도 있어야 쪽박 안 깨는 법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다시 진양건에게 시선을 던졌다. 침을 게워 내다 눈이 마주치니 진양건은 순간 화들짝 놀라 벽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사, 사, 살, 살려 주십시오!”
청명은 그 꼴을 가만 말없이 바라보았다.
혹시나 청명이 다시 달려들까 살짝 걱정이 된 백천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평소 같았다면 이 정도 말을 했으면 적당히 알아먹고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갔을 텐데, 오늘 청명은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네 이름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청명은 달려드는 대신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묘한 위압감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건 아니니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 진양…… 진양건입니다!”
진양건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금검부주 앞에서는 태연하게 사기를 쳐 대고 어떻게든 제 쪽으로 유리하게 말을 지어내던 그였지만, 지금은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진짜 죽이고도 남을 눈이었어.’
아니, 눈빛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저 백정 같은 놈이 당장 눈앞에서 두 사람을 고혼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그 만인방에서 온 빈객들을 말이다.
이런 이 앞에서 거짓을 논한다는 것은 제 손으로 칼을 빼 목에 가져다 대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대답해라.”
“……예?”
“그 무공…….”
입을 열었던 청명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무얼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그 무공 어디서 났어?”
“무, 무공이라시면?”
“네가 익히고 있는 무공.”
청명의 눈이 다시 살짝 일그러졌다.
“어디서, 익혔어.”
“제, 제 무공 말씀이십니까? 이건 그냥…….”
진양건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 사문에 전해 내려오는…….”
순간 청명의 손이 검 손잡이를 움켜잡는 걸 본 진양건이 비명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말을! 말을 끄,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제 사문의 무공에 우연히 구한 비급 내용을 조합한 것뿐입니다!”
가만 듣던 백천이 눈을 찌푸렸다.
“……조합?”
“예! 조, 조합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합니다만, 대충 초식들을 섞은 것입니다, 예.”
진양건의 얼굴에서 비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그 망할 무공 때문에!’
두 가지 무학을 조합한다는 건 절대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진양건도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매하게 무학을 섞어 버린 덕분에 그의 검법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 버렸다.
원래도 그리 특출하게 강한 편이 아니었는데, 두 가지를 뒤섞어 창안한 무학을 익히면서는 아주 반쪽짜리가 되었다. 화려하기만 할 뿐, 제대로 전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덩달아 원래의 검술마저 자꾸 뒤틀리니 진양건은 무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렸다.
청명의 차가운 눈빛을 본 진양건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지껄여 댔다.
“조, 조합한 무학은 제대로 위력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무학을 펼치는 것을 본 누군가가 혹시 화산파가 아니냐고 물어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백천이 툭 딴죽을 걸었지만,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종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까 본 초식이 엄청 뭉개진 매화처럼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냥 뻘겋고 흰 게 번쩍이는 것 같던데.”
“그런 무학도 잘 없잖습니까. 화산의 검을 말로만 들은 사람이면 그리 오해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죠.”
“……그런가?”
백천은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진양건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잡은 표정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맞습니다! 제가 먼저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먼저 제게 화산의 제자냐고…….”
“허허.”
대충 사정을 이해해 버린 백천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양건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서 저도 어쩌다 보니 화산 제자 행세를 하게 되었고, 그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그만…….”
백천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건 개소리다.
오해로 시작되었다 해도, 결국 진양건은 본인이 화산의 제자라 떠벌리며 사칭했고 금검부에 화산의 이름을 대며 사기를 치려 들었다.
백천이 그 부분을 지적하려는 순간 청명의 입이 열렸다.
“비급.”
“예?”
“그 비급 어디서 났어?”
“……비급 말입니까?”
뒤에서 듣다 고개를 갸웃한 윤종이 청명에게 물었다.
“그 비급은 왜? 보아하니 서로 다른 무학을 섞는 도중에 우연히 어설프게나마 화산의 검과 비슷한 형을 지닌 검술이 만들어진 것 같은데.”
청명은 대꾸도 없이 진양건만 집요하게 쏘아보았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아예 다시 진양건의 멱살을 콱 잡아챘다.
“히익!”
그리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이를 갈아붙였다.
“내 말 안 들려?”
“비, 비급! 그 비급은 저희 동네에 있던 사냥꾼에게서 산 겁니다!”
“사냥꾼?”
청명의 눈에 의혹이 어리자 진양건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 산짐승이 물고 있었다고…….”
순간 청명의 손에서 힘이 스륵 풀렸다.
겨우 살았다 생각하며 슬쩍 청명의 얼굴을 올려다본 진양건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말이다.
“……비급은?”
“예?”
살짝 떨리던 청명의 목소리가 점점 평정을 찾아 갔다.
“그 비급은 어디 있어?”
“제, 제 고향에…….”
“그 비급을 구한 사냥꾼도 그 근처에 살겠지?”
“그렇습니다.”
청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예?”
“안내해. 네 고향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진양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제 고향은 여기서 무척 멉니다만…….”
“상관없어.”
청명이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상관없어. 거기가 어디라고 해도, 세상 끝이라도 간다.”
말을 마친 청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모두 모인 오검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명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유이설이 먼저 입을 뗐다.
“진짜.”
“…….”
“진짠 거지, 그 비급?”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드시 회수해야 하는 거고.”
“그래.”
“그리고…….”
유이설은 말하다 말고 청명을 빤히 보았다. 그 질문을 완성한 건 백천이었다.
“그 비급이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도 확인해야 한다는 거겠지.”
청명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의 얼굴에 살짝 망설임이 스쳤다.
“하지만 청명아. 우리는 장문인의 명으로…….”
“사숙.”
하지만 청명이 백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강압적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입술을 질끈 깨문 청명은 말했다.
“나는 확인해야 해.”
“…….”
“그러니까…….”
그의 말을 채 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백천은 고개를 획 돌렸다.
“윤종, 조걸.”
“예, 사숙!”
그리고 냉정과 침착이 어린 목소리로 지시했다.
“상황을 정리해라. 신속하게 움직인다. 저자에게서 목적지를 확인하고 중간에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다.”
두 사람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숙!”
“소소.”
“네!”
“개방에 상황을 전하고 우리는 바로 빠진다고 말해라. 뒷정리는 맡긴다고 해.”
“네!”
백천이 유이설을 돌아본다.
“사매는 혹시 모르니까 금검부주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알겠어요.”
“움직여!”
화산의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맡은 일을 위해 흩어지자 청명이 빤히 백천을 보았다.
“사숙.”
“됐다. 설명은 나중에 듣자. 나는 일단 바깥 상황을 좀 보고 와야겠다.”
“…….”
백천은 몸을 획 돌리고서야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빌어먹을.’
그런 얼굴로 말하는데 어떻게 안 된단 소리를 하겠느냐, 이 망할 녀석아.
걸어 나가는 백천의 등을 가만히 응시하던 청명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부서진 전각 사이로 보이는 해가 지나치게 눈이 부셨다.
“……한 부였지?”
“……예?”
“그 비급 한 부에 신공 하나와 검법 하나가 있었겠지.”
“마, 맞습니다. 낡아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비급이었는데…… 두 부를 겹쳐 놓은 것 같았습니다. 다른 무학이 두 개…….”
청명이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빌어먹게 눈이 부셨다.
- 너는 왜 멀쩡한 비급을 붙여 놓고 지랄이냐?
- 이래야 지니고 다니기가 편합니다.
- 그걸 왜 지니고 다녀. 어느 미친놈이 전장에 비급을 들고 나가냐?
- 제 역할은 화산의 무학을 지키는 겁니다. 이 무학만은 절대 끊겨서는 안 되잖습니까. 제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 네가 먼저 뒈지면 그게 더 문제일 거라고 생각 안 해 봤냐?
- 하하. 사형이 있는데 제가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두 눈이 시려 오는 것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도 다 저 빌어먹게 눈 부신 해 때문이다.
‘기다려라.’
설사 남은 것이 백골뿐이라고 해도. 아니, 그 백골조차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너를 알아볼 테니까.
- 사형.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더욱 아픈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