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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09화 (707/1,567)

709화. 나는 확인해야 해. (4)

“거 빨리 좀 오십시오!”

“……끄으응.”

구박을 들은 한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담벼락을 향해 달렸다.

사내의 꼴은 무척 희한하여 입고 있는 옷은 거적이라 누가 봐도 거지인데 몸은 비대했다. 옆으로 툭 치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은 체형의 거지는 더러운 수건으로 쏟아지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헤엑! 헤엑! 나는…… 나는 달리는 건 영 취미가 없어서…….”

“에이!”

그의 푸념에 거지들이 짜증 어린 얼굴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뿐, 누구도 뚱뚱한 거지를 더 이상 타박하지 못했다.

“어떻…… 어떻게, 허억, 어떻게 되었느냐?”

“직접 보십시오!”

거지들이 퉁명스레 외치자 뚱뚱한 거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홍대광 그 양반이 타박만 안 했어도 이 고생은 안 하는데…….”

“어차피 결(結)도 같은 양반인데 왜 그렇게 저자세로 나가십니까!”

“말도 마라, 이놈들아……. 같은 결개고 같은 분타주라 해도 그 양반은 중앙 요직에 있는 사람이다. 부탁 거절했다가 나중에 그 양반이 방주라도 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느냐.”

사내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나는 야위다 못해 반쪽이 되어 버리겠지.”

“헛소리하지 마시고 빨리 올라오십시오. 이건 보셔야 합니다.”

“알았다, 알았어!”

비대한 거지, 왕덕(王德)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그 커다란 몸에 걸맞지 않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가볍게 폴짝 뛰어 올랐다.

담벼락에 걸터앉은 그는 안쪽을 슬쩍 보더니 움찔했다.

“……뭔 상황이 이러냐. 저 검 쓰는 아해들은 하나같이 검귀로구나.”

“겨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죽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살수를 쓰지 않고 제압 중인 거죠.”

너스레를 떨던 왕덕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땀을 뻘뻘 흘려 대며 과장되게 한숨짓던 표정은 씻긴 듯 사라졌고, 살이 겹친 턱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저…….”

뭔가 말을 하려던 그는 잠시간 입을 꾹 닫더니, 마른침을 삼켰다.

단춧구멍처럼 작은 눈이 떼로 맞붙어 싸우고 있는 이들을 넘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청명, 정확하게는 그와 맞싸우고 있는 이들에게로 고정됐다.

“……빌어먹을, 진짜로 만인방이 왔구나. 철모방 놈들이 만인방의 빈객을 초청했다 해서 혹시나 했는데.”

그간 사실 확인을 위해 거지를 여럿 뿌려 댔지만, 아무리 개방의 거지라 해도 철모방 안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도착한 이가 안으로 숨어들어 버리면 아무리 개방이라고 해도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눈이 하늘에도 달려 있는 건 아니니까.

“진짜 만인방입니까?”

“저 장을 쓰는 이가 만인방의 허형(許衡)이다. 놈의 장력은 산을 부수고 강을 가른다고 하지.”

“일장홍(一掌紅) 허형 말입니까?”

“그래.”

왕덕의 말을 들은 거지가 장력을 쓰는 만인방의 고수를 응시했다.

‘일장홍이…….’

한 번 장을 쓰면 세상이 붉게 물든다 해서 일장홍. 그는 만인방에서도 알아주는 고수 중 하나로 이름 높다.

일반적인 문파라면 대주의 직을 맡고 있는 이가 직위가 없는 이들보다 더 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인방은 사파. 수많은 이들이 그저 패군의 이름 아래 모여 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대주들이 더 알려져 있지만, 직위가 없고, 정확한 소속이 없는 이라고 해서 대주들보다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 일장홍이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런 자를…….’

그때 무너진 전각 잔해 속에서 한 사람이 휘청이며 걸어 나왔다. 먼지로 엉망이 되어 버린 그를 본 순간 왕덕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거령도(巨靈刀) 막위(莫威).”

“마, 막위요? 저자가요?”

“……내 눈이 틀림이 없다면. 막위에 허형이라니. 패군 이 미친 작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과거의 만인방에서야 흔한 일이었다.

만인방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했다. 스스로 세력을 꾸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휘하의 고수들을 돈을 받고 파견해 낭인으로 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만인방이 신주오패로 불리게 되고, 나름의 체면을 차리게 된 이후로는 휘하의 고수들을 외부로 돌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 아니, 잠시만요.”

남창 분타의 부분타주인 흑환개(黑獾丐)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저 둘이 막위와 허형이란 말입니까?”

“들어 놓고 뭘 또 물어?”

“그럼 방금 저 어린놈에게 걷어차여 처박힌 사람이 그 거령도 막위라고요?”

“……뭐라고? 처, 처박혀?”

왕덕의 시선이 한 사람의 등에 획 날아가 꽂혔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일그러진 허형의 얼굴과 치미는 노기를 어쩌지 못하는 막위의 표정만 보아도 지금 누가 승기를 쥐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지 않았다.

새삼스레 상황을 다시 파악한 왕덕은 신음하듯 말했다.

“……화산신룡에 대한 그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오히려 실제보다 축소되었다는 건가?”

황당하다는 듯 연신 헛웃음을 흘리던 왕덕은 돌연 고개를 획 돌렸다.

“새끼 거지들 다시 점검해라! 차질이 생겨서 그놈이 여기서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다.”

“……끔찍한 일이라니요?”

“빌어먹을! 실력도 소문보다 더한데 성격이 소문보다 덜하리라는 보장이 있느냐?”

“…….”

개방 내에 퍼져 나가는 화산신룡에 대한 소문을 떠올린 흑환개는 이내 희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왕덕은 대꾸도 하지 않고 청명만 주시했다.

“……이러면 나는 정말 반쪽이 되어 버린다고…….”

그의 입에서 서글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 이 이어어글…….”

거령도 막위가 떨리는 손으로 제 턱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걷어차인 턱이 으스러진 모양이었다. 말을 억지로 내뱉으려 할 때마다 부러진 이가 입 밖으로 투둑투둑 쏟아졌다.

“쿨럭!”

끝이 잘려나간 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와 피, 살점이 뒤섞인 핏덩어리를 뱉어 낸 거령도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이 개아식…….”

몸뚱이는 당연히 정상이 아니었다. 일장홍 허형의 장력을 막아 낸 충격도 대단했는데 심지어 턱이 으스러질 정도로 얻어맞고 전각에 처박혔다. 당연히 다리가 덜덜 떨리고 전신의 기혈이 뒤집혀 몸이 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반도 채 살지 않았을 정파의 애송이에게 걷어차이고 조롱당한 분노는 이 모든 고통을 간단하게 억누를 만큼 거대했다.

하나.

“뭐라고?”

웬만한 고수라고 해도 오줌을 지리고도 남을 살기와 노기가 고스란히 쏟아지고 있음에도 청명은 태연자약했다.

“제대로 좀 말해 봐. 뭐라는지 못 알아듣겠는데?”

“으아아아아아악!”

분기탱천한 막위가 실핏줄이 터진 눈을 벌겋게 뜨고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그 순간 허형이 버럭 소리쳤다.

“침착해라, 막위! 달려들었다가는…….”

하지만 목소리를 높였던 그는 멈칫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달려들었다가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었는가?

‘빌어먹을.’

죽는다. 그래, 죽는다.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이는 절대 그들보다 하수가 아니다. 아니, 완벽하게 합공을 한다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절대의 고수다.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죽는단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것은 허형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막위는 그 뜻을 귀로 들은 것처럼 이해했다.

“이…….”

가가가각!

거꾸로 쥔 도가 거칠게 바닥을 긁어 댔다.

“침착해라. 상대는 강하다. 흥분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허형이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패군께서 눈여겨본다는 게 설마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나이를 감안했을 때, 당연히 그 장래성을 눈여겨봤다는 의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맞붙어 본 청명은 장래를 논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었다.

당장 그의 목에 검을 쑤셔 박을 실력을 지녔는데, 그런 이의 장래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장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저 뒤쪽을 채우고 있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리 없다. 저들은 화산신룡이 끌고 온 이들을 감당하는 것도 벅차 보이니까.

아니……. 설사 여유가 난다고 해도 저런 놈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결국은 그와 막위, 두 사람이서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허형은 입술을 다시 한번 핥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실력은 있다 해도 아직 어린놈이다. 경험이 부족할 게 분명할 테니……. 우선은 침착…….”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게중심을 뒤로 빼고 느긋하게 그들을 지켜보던 청명의 몸이 일순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안력을 단련한 허형의 눈에도 그리 보일만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동했단 뜻이다.

“헉!”

기겁한 허형이 잽싸게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청명은 그의 눈보다,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의 코앞까지 다가온 청명을 느낀 허형이 다짜고짜 앞으로 장력을 뿌렸다.

화아아악!

하지만 다급하게 쏟은 장력이 제대로 된 정교함을 갖출 수 있을 리 없었다. 발출 속도야 빨랐을지언정, 끝이 무뎠다.

허형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타아아아아압!”

모자란 정교함은 수로 극복할 수 있다. 그의 팔이 미친 듯 휘저어질 때마다 장력이 연이어 발출되었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당장을 모면하고 막아 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을 장력으로 채워 낸 허형이 다급하게 뒤로 몸을 날려 상대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푹!

섬뜩한 소리가 귀에 울렸다.

사실 그 어떤 소리라 해도 들릴 리 없었다. 장력이 폭발적으로 사방을 채워 공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허형은 분명 똑똑히 들었다. 그게 환청이든 아니든.

그가 장력으로 만들어 낸 벽의 상단부가 꿰뚫렸다. 삐죽이 드러난 검 끝을 확인하는 순간 허형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날카로운 칼로 비단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튀어나온 검날이 아래로 내리그이며 장력의 벽이 단숨에 갈라져 버렸다.

말 그대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에 찢겨 강제로 생겨난 공간으로, 청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쏜 화살처럼 들어왔다.

‘아, 안…….’

머리가 새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허형의 손은 반사적으로 장력을 내뿜으려 움직였다. 하나 그 순간 그는 보았다.

푸욱!

장력을 발출하기 위해 내뻗은 손, 그 손등으로 뭔가 삐죽한 것이 튀어나왔다.

‘……검?’

그와 동시에 손바닥에 잔뜩 모여 있던 기운의 일부가 흩어지고, 또 일부는 역류했다. 손을 꿰뚫어 버린 검은 뼈를 긁어내며 더욱 깊숙하게 점점 파고들었다.

가가각 하는 소름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푸욱!

“…….”

살짝 입을 멍하니 벌린 허형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의 두 눈이 닿은 곳은 제 왼쪽 가슴, 정확하게는 그 왼쪽 가슴에 박혀 있는 흰 빛이 도는 검날이었다. 손바닥을 관통한 검이 정확하게 가슴을 꿰뚫었다.

또옥.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검신을 타고 흐르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허형이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적의 심장을 꿰뚫었음에도 청명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디찬 얼굴로 느리게 입을 뗐다.

“다음에는 말이야.”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남 신경 쓸 시간에 네 목숨이나 챙겨.”

“…….”

“그게 전장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애송아.”

선명한 색을 갖추고 있던 세상이 점점 흐려지며 검게 변했다.

허형의 몸이 바닥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경험이 부족한 건…… 내 쪽이었…….’

숨이 끊기기 전 허형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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