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708화 (706/1,567)

708화. 나는 확인해야 해. (3)

흙먼지를 뒤집어쓴 진양건은 저도 모르게 땅을 움켜잡을 듯 긁어 대었다. 눈동자가 갈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콰앙!

앞쪽에서 터져 나온 폭발음과 함께 전각의 잔해가 그가 있는 쪽을 향해 쏘아졌다.

“히이이익!”

그는 기겁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부서진 벽과 뜯겨 나간 기둥 파편이 그의 뒤통수를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그 기세만으로도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진양건의 얼굴은 흙먼지와 뒤범벅된 식은땀으로 얼룩덜룩했다.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적당히 사기나 좀 쳐 먹고 돈이나 챙겨서 달아나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물론 금검부를 상대로 사기를 친다는 건 웬만한 간담으로는 시도도 할 수 없을 일이지만, 단 한 번의 배짱으로 남은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해 볼 만한 시도가 아니던가?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거지?’

확 뚫려 버린 전방을 보니 땅에 형편없이 쓰러진 철모방도들과 그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보였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철모방주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그는 눈도 채 감지 못한 채 절명했다.

초점이 사라진 죽은 눈을 본 순간, 진양건의 온몸에서 힘이 풀려 나갔다. 겨우겨우 반쯤 몸을 일으켰던 그는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왜…….”

의지와는 관계없이 턱이 덜덜 떨렸다.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냐고!’

그가 벌인 일 하나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철모방이…….’

철모방은 적어도 이 남창 일대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파다. 저 금검부가 철모방을 감당하지 못해서, 여기저기에 도움 요청을 넣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 기세를 짐작할 만했다.

게다가 그 만인방의 빈객마저 합류했으니 이 강서에서 철모방을 감당할 문파는 없다고 봐야 옳았다.

그렇기에 진양건이 금검부를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었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엔 철모방에 의탁하여 생존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그의 예상과 계획을 완전히 깨부수고 있었다.

파아아아앗!

검기가 솟구쳤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웅장함에 가까운 검기가 번쩍이는 순간, 가로막고 있던 이들이 흡사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뒤로 와르르 무너졌다.

“…….”

전열이 무너지고 드러난 검기의 주인을 보며 진양건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저 어린 나이에…….’

아니, 얼굴에 잔뜩 엉긴 먼지로도 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헌앙한 저 사내에게 어리다는 말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 주는 검기와 무위가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 두 배는 더 살았을 것 같은 철모방도들이 그의 검기에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뒤로 분분히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태행삼검과 함께 연기했던 이상적인 명문 검수가 저자의 모습과 딱 맞아떨어진단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저자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좌우로 늘어선 다른 이들 역시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날아드는 창을 나비처럼 가뿐하게 피해 낸 여검수의 손끝에서 검이 빛살처럼 내뻗어졌다.

빈틈을 귀신같이 찾아 찌르고 재빨리 검을 회수해 재차 뒤쪽에 있는 이의 급소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더없이 신속하고 정확하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아아아악!”

어깨를 꿰뚫린 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의 몸이 채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그녀의 검이 뒤쪽에 있는 이의 옆구리를 찌른 뒤 회수되었다.

파아아앗!

저렇게 빤하고 단순한 초식를 절초처럼 이용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숱하게 수련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비산하는 검기보다, 단숨에 대여섯을 쓰러뜨리는 강렬한 일검보다 배는 더 인상적이었다.

“히이이익!”

그녀의 검이 철모방도들을 꿰뚫을 때마다 진양건은 제 배가 뚫리기라도 한 양 움찔대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

저 철모방도들이 모두 쓰러지고 나면 저 검에 꿰뚫릴 다음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약관화였다.

심지어는 그게 다가 아니다.

“쓰러진 이들이 검을 휘두를 수도 있으니 뒤쪽을 조심……. 조심하라고, 이 꼴통 새끼야!”

우측에서 검을 휘두르던 사내가 소리치며 바닥의 돌을 걷어찼다. 차인 돌은 쾌속하게 날아가 앞쪽에서 날뛰는 곱슬머리 사내의 뒤를 노리던 철모방도의 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헐? 분명히 쓰러뜨렸었는데?”

“죽는다, 진짜!”

“에이, 사형이 잘 봐 주시면 되죠!”

곱슬머리 사내가 능청스레 씨익 웃더니 앞으로 한 발 더 치고 나가 공중으로 몸을 가볍게 띄워 올렸다.

“으라차아아아아!”

이윽고 붉은 검기가 줄기줄기 피어났다.

“아…….”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점점 더 완연한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변해 갔다.

진양건은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꼬, 꽃잎!’

어찌 모르겠는가?

현재 강호에 더없는 명성을 날리고 있는 화산파의 매화검기다.

‘꽃잎과도 같은 검기라고 해서 그냥 비유인 줄 알았더니!’

정말 검기가 흩날리는 꽃잎의 형태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 저게 정말 되는 거라고?’

이쯤 되니 그가 선보였던 검기에 사람들이 잘도 속아 넘어갔구나 싶었다. 물론 화산과 멀리도 떨어진 이 강서에는 화산파의 매화검기를 견식 한 이들이 몇 없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진양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넋을 놓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새삼 실감이 난 것이다.

“저, 정말…… 정말 화산파구나…….”

저 검기까지 봐 버렸으니 이제 더는 외면할 도리도 없었다.

아니, 설령 저 검기를 보지 못했다 해도 저들이 화산파가 아니라면 단 여섯 명이서 이 많은 수의 철모방을 몰아붙이는 일이 어찌 가능했겠는가?

물론 지금까지 쓰러진 이들은 거의 오십 남짓이고, 아직 남은 철모방도의 수는 수백을 넘어간다. 하나 그들의 기세는 처음과 같지 않았다.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대단한 기세를 뽐내던 이들이 지금은 마치 외곽을 공략하는 늑대들에게 몰린 양떼처럼 혼비백산하여 중앙으로 주춤주춤 모여 붙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다잡아 주어야 할 철모방주는 이미 목이 비틀린 시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이 전투의 끝이 어찌 될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가올 진양건의 운명도 불 보듯 빤했다.

‘다, 달아나야 해.’

무려 화산파를 사칭했으니 저들에게 붙잡힌다면 무슨 꼴을 당할지는 세 살 아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철모방도 그를 막아 줄 수 없게 된 이상, 당장 이곳에서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그의 소식을 듣고 저 먼 섬서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고, 심지어 달랑 여섯이서 철모방에 쳐들어와 그를 내놓으라고 칼질을 해 대는 미친놈들을 상대로 어떻게 도망을 치라는 말인가?

저 미친놈들은 그가 달아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세상 끝까지 쫓아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진양건은 일단 달아날 틈을 찾기 위해 일어나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움찔하며 입을 천천히 벌렸다.

‘거, 거지…….’

거지들이 전투가 벌어지는 뒤쪽 담벼락 위에 빽빽하게 걸터앉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진양건은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 운명을 직감했다.

‘벌써 개방 놈들이 쫙 깔렸구나.’

화산의 손을 피해 달아날 방법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개방의 눈을 피해 숨을 방법 따위는 없다.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진양건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그가 절망하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거대한 장력이 위쪽으로 솟구쳤다.

쿠르르르릉!

장력이 전각 지붕에 처박히자마자 기와들이 크게 들썩이며 비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서까래들도 쏜화살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일격에 전각의 지붕을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의 위력.

오금이 저리다 못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만들어 낸,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지금 영역을 다투는 세 마리의 범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카강!

검과 도가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중병(重兵)인 도를 상대로도, 젊은 검수의 얇디얇은 검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그뿐이랴.

카가가가각!

금속과 금속이 전력으로 맞물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리며 검이 오히려 도를 밀어 내기 시작했다.

검과 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 맞붙었다.

양손으로 도를 잡고 전력을 다해 버티던 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반면 검을 쥔 청명의 얼굴에는 딱히 표정이랄 게 없었다.

냉정함을 넘어 무심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해 갈 뿐.

우둑!

청명의 손목이 일순 뒤틀리듯 꺾였다. 도와 맞닿은 검의 끝이 앞으로 확 기울며 도수의 목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벤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긁어 대는 것이었다.

살짝 닿은 검 끄트머리가 두터운 목에 붉은 선을 그렸다. 도가 필사적으로 이를 밀어 내었지만 기어이 또 하나의 붉은 흠을 그어 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도수의 목에는 대여섯 개의 붉은 선이 생겼다.

“끅…….”

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목에 검이 닿는 순간마다 그는 지옥문에 한 발을 들였다가 빠져나오는 기분이었다. 검이 한 치만 더 밀고 들어와도 그의 경동맥이 잘려 나갈 테니까.

“끄으윽!”

도수는 경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힘이…….’

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명의 가느다란 손목이 보였다.

물론 옷 너머로도 이자의 몸이 상당히 균형 잡히고 잘 단련되어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를 쥔 자신의 팔에 비하면 겨우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굵기였다.

그럼 대체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어이.”

카가가가각!

검이 그의 도날을 파고들며 긁어 댔다.

“내내 잘난 듯이 지껄이던데, 어디 더 지껄여 보시지?”

“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청명의 등 뒤쪽에서 또다시 어마어마한 장력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 전각 지붕을 통째로 날려 버렸던 바로 그 장력이다.

으득!

이를 악문 도수가 필사적인 힘으로 청명을 내리눌렀다. 그를 이곳에 잡아 두어 장력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려던 도수는 순간 멈칫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청명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콰득!

“끅!”

순간 발등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번졌다. 청명이 그의 발을 밟아 뼈를 모조리 부수어 버린 것이다.

고통에 몸이 살짝 요동치는 순간.

스륵.

도와 맞닿은 검에서 힘이 슬쩍 풀렸다.

전력을 다해 도를 밀고 있던 이가 그 변화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발뼈가 부서지며 몸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의 몸이 앞으로 확 쏠리자 검이 뱀처럼 도에 얽혀 들며 무게중심을 뒤흔들었다.

빙글.

상황을 채 다 파악하기도 전에 도수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했고, 잠시 후엔 청명의 반대쪽에 내려앉았다.

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움직임이었다.

‘뭐…….’

당황한 그가 도를 다시 꽉 움켜쥐려는 순간 청명이 그의 가슴팍을 세게 걷어찼다.

콰앙!

격중당한 그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격통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금 전의 상황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의 등을 향해 날아드는 장력이었다.

우득.

허공에서 전력으로 몸을 뒤틀며 돌렸다. 준비 없는 과격한 동작에 척추가 비명을 내질렀다.

“흐아아압!”

전력을 다한 도격이 그를 향해 날아들던 장력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도기와 장력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장력을 퍼부었던 이가 휘청하며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쳤고, 허공에서 도격을 날린 이는 바닥에 처박히며 피를 한 바가지나 게웠다.

“이…….”

그들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지고 얼룩지는 순간.

“이걸 화산 애들한테 보여 줬으면 사숙조가 좋아했을 텐데.”

어깨에 검을 걸친 청명이 보는 이의 속을 뒤집는 미소를 내걸며 말했다.

“합공을 이따위로 하면 안 된다는 완벽한 교재인데 말이야.”

“이 개자…….”

그 순간, 여유롭게 검면으로 제 어깨나 두드리던 청명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바닥을 짚은 도수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헉!’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란 도수가 머리 위로 도를 들었다. 날아들 검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가 위로 움직이며 빈 공간을 통해 청명의 발이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리고 턱을 그대로 걷어찼다.

콰앙!

사람의 발과 턱이 부딪친 것뿐인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졌다.

걷어차인 도수는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날아가 전각에 처박혔다.

쿠르르릉.

결국 통째로 무너진 전각이 그를 뒤덮어 버렸다.

무심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본 청명이 느리게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질 않아서.”

그리고 검끝으로 하나 남은 만인방도를 겨눴다.

“주둥이 털지 않는 쪽이 좋을 거야.”

만인방도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