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화. 나는 확인해야 해. (2)
파아아아앗!
쩍 벌어진 가슴에서 피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뜨거운 피가 채 바닥으로 쏟아지기도 전에 저 괴물은 쓰러지는 육신을 들이받아 뒤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피를 고스란히 맞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철모방도들의 얼굴은 이미 짙은 공포에 젖어 있었다.
파아아앗!
무언가 희끗희끗한 것이 어른거린다 싶더니 이내 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제 목을 움켜잡은 이는 목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순식간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어엇 하는 순간에 몸은 이미 바닥에 처박혔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붉게 젖은 땅과 그 위를 밟으며 나아가는 검은 옷의 검수뿐이었다.
“끄……. 끄륵…….”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그 순간에도 본능은 손을 움직이게 했다. 새하얗게 질리도록 목을 꽉 움켜잡고 있던 손으로 덜덜 떨며 목 주변의 혈을 눌렀다.
“끄윽…….”
꾸우욱.
가까스로 점혈을 해 출혈을 막아 낸 그는 헐떡이며 몸을 눕혔다. 점혈을 하지 못했다면, 의식을 잃는 그 순간 목숨이 달아났을 것이다.
턱이 덜덜 떨렸다. 지금 한 순간 그는 저승 문턱에 닿았다. 아니, 사실 아직도 완벽하게 그 문에서 빠져나온 것도 아니다.
그는 턱을 덜덜 떨며 옆을 돌아보았다. 고인 눈물 때문에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는 검수의 등이 들어왔다.
그게 의식이 끊어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푸욱!
“…….”
아래에서 찔러진 검이 옆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두 눈을 부릅뜬 철모방도가 제 옆구리를 꿰뚫고 들어온 검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검날을 타고 흘러, 검을 잡은 이의 손마저 붉게 적셨다.
“너…….”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의 몸은 의지대로 버텨 주지 못했다.
털썩.
의식을 잃은 이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검이 자연히 뽑혀 나왔다. 청명은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한차례 털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앞머리를 축축이 적신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비켜.”
“…….”
“아니면 모두 죽는다. 비켜.”
청명이 한 발짝 내딛자 앞을 막고 있던 이들이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공포에 질린 눈은 계속 활로를 찾기 위해 바빴다.
‘저걸 막으라고?’
‘저 미친놈을?’
그들 역시 여러 전장을 경험한 이들이었지만, 저 놈의 검은 그들이 알고 있던 그 어떤 무학과도 달랐다.
이건 단순히 더 강하다 표현하고 넘어갈 만한 게 아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이렇게 무자비하고 독랄한 검격을 본 적이 없다. 태산처럼 쏟아져 사람을 짓누르던 검이 독사처럼 변해 목을 물어뜯고, 물 흐르듯 밀려와 가슴을 베어 낸다.
대체 저런 검을 무슨 수로 상대하란 말인가?
누군가가 신음처럼 더듬더듬 입을 뗐다.
“아, 안 돼…….”
“죽는…….”
사방으로 전염된 공포가 막 비명으로 변하려는 찰나.
“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돌아본 이들이 본 것은 철모방의 무복을 입고 있는 이의 가슴을 뚫고 나온 시뻘건 창두(槍頭)였다.
“어차피 물러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푸욱.
방도의 등을 꿰뚫은 창을 뽑아내며 번송이 광기에 찬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한 놈! 적은 그저 딱 한 놈이다!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고 검을 쑤셔 박으면 못 잡을 리가 없다! 싸워라!”
청명의 시선이 번송에게 꽂혔다. 그의 입가가 살짝 뒤틀렸다.
“주둥이만 산 놈이.”
“……뭐?”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직접 나와. 부하들 뒤에 숨어서 잘난 척 입 털어 대지 말고.”
“…….”
“그리고…….”
청명이 차게 조소하며 물었다.
“누가 혼자라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볍게 바람이 분다 싶더니 허공으로 몸을 날린 검은 인영이 혼란에 빠진 이들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헉!”
반사적으로 창이 쏟아졌지만 날아든 이는 허공임에도 부드럽게 방향을 바꿔 피해 내더니 되레 그 창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섰다.
동시에.
스륵.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서걱!
청명이 노린 곳과 똑같은 곳.
조금은 얕게,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주변 철모방도들의 급소를 일시에 베어 낸 그 검수가 검을 늘어뜨렸다.
털썩. 털썩. 털썩.
그와 거의 동시에 주변의 철모방도들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후.”
짧게 숨을 내쉰 유이설이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악한 철모방도들의 표정을 두 눈에 담은 그녀의 발이 살짝 교차하더니 마치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식겁한 철모방도들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파아아앗!
검이 어깨를 찌르고 허벅지를 가른다. 거의 빛과 같이 소리도 없이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아아아아악!”
일순 전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뛰어든 이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아아앗!”
맹렬하게 돌진한 조걸이 허공에 매화를 뿌렸다. 순식간에 불어난 매화검기가 밀집해 있는 철모방도들 위로 쏟아졌다.
윤종의 고함이 조걸의 귀를 파고들었다.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마! 우린 살인자가 아니다!”
“그래서 약하게 했다고요!”
윤종이 눈을 일그러뜨린 채 달려들어 철모방도들을 휘몰아쳤다.
‘내가 해야 돼!’
이대로 조금만 내버려 두면 저 망할 놈이 정말 무자비하게 살인을 저질러 댈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야 일 검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없다지만 상황이 격해지면 어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소소!”
“네, 사형!”
당소소가 윤종의 뒤쪽에서 뛰어올라 전방에 비침을 뿌려 댔다. 날카로운 바늘이 검을 대비하던 철모방도들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아아악!”
“뭐, 뭐야!”
“끄윽!”
그리고 윤종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늘 우직하기 짝이 없던 그의 검이 지금은 평소보다 조금 더 예리하고 날카롭게 철모방도들을 베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니 위축되어 있던 철모방도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청명이 마무리를 위해 검을 움켜잡을 때였다.
“가라.”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청명이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백천이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한다.”
“…….”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그리 급하게 구는 이유가 있겠지. 가라. 대신에…….”
백천이 청명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넌 적당히 재수 없는 쪽이 좋아. 쓸데없이 무게 잡지 말고 가서 시원하게 엎어 버려.”
말없이 백천을 빤히 바라보던 청명의 입가가 꿈틀 움직였다.
“……잘나셨네.”
“원래 그랬다.”
“하…….”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갔다 올게.”
“오냐.”
“눈먼 칼 맞고 울지 말고.”
“내가 너냐?”
“쯧.”
청명이 그 자리에서 살짝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러자 백천이 당연하다는 듯이 검을 내밀어 청명의 발에 가져다 댔다.
“타아앗!”
그리고 청명이 발을 내뻗는 순간에 맞춰 검을 강하게 위로 쳐올렸다.
그 반동으로 청명의 몸은 단숨에 앞을 막고 있는 이들을 뛰어넘어 홍모일섬 번송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시퍼런 안광을 뿜어낸 청명이 번송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번송이 기겁하며 창을 들어 암매검을 막아 냈다.
콰아아아앙!
가공할 여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삽시간에 머리 위를 뛰어넘은 이가 방주와 충돌하는 광경에, 철모방도들이 경악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이.”
고개를 획 돌린 철모방도들의 눈에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는 백천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아쉬워할 것 없어. 나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까.”
청명을 슬쩍 일별한 백천이 진각을 내밟았다.
“끄으윽!”
창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목은 이미 꺾여 버렸는지 어마어마한 통증이 엄습했다. 몸을 힘껏 지탱하는 발가락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했다.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두 눈엔 핏발이 섰다.
그런 그의 눈에, 창을 무자비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청명의 얼굴이 보였다.
괴이하다.
그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얼굴이었다. 흡사 사냥을 하는 짐승의 낯이지 않은가. 그러나 눈앞의 괴물과 짐승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짐승은 사냥을 하며 결코 웃지 않는다.
“네가 안 와서…….”
청명이 입을 열며 검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다시 살짝 몸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그와 동시에 청명의 발이 창을 연이어 두 차례 내리밟았다.
“내가 왔잖아.”
투퉁!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번송의 팔이 강제로 꺾이며 창이 몸에 바짝 붙었다.
휘릭!
그 순간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청명의 두 발이 번송이 가슴에 닿아 있는 창대를 인정사정없이 걷어찼다.
쿠웅!
둔탁한 폭음과 함께 뒤로 휙 날려진 번송의 몸이 전각의 기둥에 처박혔다.
콰지지직! 콰직!
사람 몸보다 더 두꺼운 거대한 기둥이 단숨에 부러지며 번송의 몸이 전각 안으로 틀어박혔다.
우르르릉.
기둥이 날아간 전각의 앞부분이 허물어지며 기와와 목재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바닥에 내려선 청명은 검을 늘어뜨린 채 무너지는 전각 쪽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먼지 구름을 향해 걸어가던 청명의 걸음이 멈추었다.
“……나와.”
“끄으…….”
쿵!
번송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무너진 전각의 잔해를 걷어차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이, 이, 빌어먹을 놈! 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청명의 눈은 애초에 번송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그의 뒤, 아직 가까스로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전각을 바라보며 청명이 다시 말했다.
“나오라고 했다.”
“흐음.”
그러자 잠시 후, 전각 안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하나.”
“패군께서 감탄하셨다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오만하군.”
반쯤 무너진 전각에서 걸어 나온 두 사람이 번송의 좌우에 서서 청명을 보았다.
“만인방이냐?”
청명의 말에 두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군. 너희 방주 새끼한테 한 말도 있었는데.”
청명이 검을 들어 두 사람을 겨누었다.
“네놈들 목을 보내면 충분히 전해지겠지.”
“하하핫.”
고개를 내저은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너는 여기서 죽…….”
“두 분은 나서지 마십시오!”
그때 번송이 대뜸 소리치며 사내의 말을 막았다.
“저 쥐새끼는 제가 죽이겠습니다! 이……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내 손목을 부러뜨려?”
“방주.”
“아가리를 찢어 버리겠다! 이 개 같은 새끼!”
“방주…….”
“네놈의 가죽을 벗겨 내 술잔으로 써 주마! 이 망할 개자식아!! 으아아아아아!”
파아아아앙!
순간, 번송의 목이 팽그르르 돌아간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사람의 목이 어떻게 완전히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번송의 목은 한 바퀴도 아닌 두 바퀴를 맹렬하게 회전한 뒤에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꾹 비틀어 짠 빨래처럼 꼬인 목 위로 혀를 빼문 번송의 머리가 살짝 흔들리다가 힘없이 옆으로 툭 꺾였다.
“쯧. 이래서 잡것들은.”
털썩.
쓰러지는 번송을 힐끔 바라본 사내가 손을 가볍게 털었다.
“……이놈을 죽여 버리면 의뢰금은 누구한테 받을 셈이냐?”
“남은 놈들이 알아서 바치겠지. 그리고…… 지금 의뢰금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군.”
두 사내가 천천히 청명을 향해 다가왔다.
“대어를 낚으려면 잡어는 포기해야지.”
“합공?”
“확실하게 하지.”
“좋아.”
두런두런 대화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청명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손끝으로 굳은 제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렸다.
이상한 행동에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지?”
“아, 별거 아냐. 누가 나한테 좀 재수 없는 편이 좋다고 해서 말이야.”
“…….”
“그러니 각오해 둬. 지금 나는 좀 많이 재수 없을 예정이니까. 특히.”
청명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너희 만인방 새끼들한테는 말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