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나는 확인해야 해. (1)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청명의 말을 들은 이라면 대부분은 ‘허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화산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철모방도 수백이 병기를 들고 서 있다.
일당백. 일기당천.
이런 말이 따로 있는 이유는, 한 사람이 그만한 수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쉬운 일이라면 굳이 칭송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대부분이 지금 상황을 본다면 스스로의 약세를 감추기 위한 허장성세라 받아들일 것이 당연하고, 또 온당하다.
하지만 이 말을 비단 허장성세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청명을 마주하고 있는 철모방의 방도들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창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 수십의 창끝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그들의 동공이었다.
철모방도들은 결국 사파인이니 피를 보는 데는 나름 익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청명이 쏟아 내는 살기와 둔중한 압력을 감당치 못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기세가 눈에 띄게 죽어 가는 것을 느낀 번송이 버럭 고함쳤다.
그 역시 강호에서 잔뼈가 굵었다. 싸우기도 전에 기세가 죽어서는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패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적은 소수다! 겁먹을 것 없다!”
사실 평소의 번송이었다면 이리 고함을 치는 대신, 가장 선두에 서서 청명을 향해 달려들고 몰아쳤을 것이다. 수장이 선두에 서는 것이 사기를 올리는 가장 빠르고 탁월한 방법이란 걸 수많은 격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뒤에서 소리만 지를 뿐, 차마 앞으로 나설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청명의 검기를 막아 낸 손이 아직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뭔 놈의 검기가…….’
다시 떠올려도 섬뜩하기 그지없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실수했어도 그 검기는 그의 창을 자르고 그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 버렸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엄습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금 그의 발을 떨어지지 못하게 묶어 두고 있었다. 발밑에서 시커먼 손들이 솟아올라 그의 발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모조리 죽여라!”
떨림이 목소리에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크게 소리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얼핏 조악한 짓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 효과는 있었다. 평생을 그의 명을 듣고 반응하는 훈련을 해 온 이들이니 명이 떨어지는 순간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찔하며 앞으로 한 발을 내뻗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선두가 움직이는 순간, 뒤를 지키던 이들도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간다. 내가 선두가 아니라는 미묘한 안도감은 그들의 발길에 박차를 가했고, 등 뒤에서 솟구치는 기세는 선두에 선 이들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흐아아아압!”
“죽어라아아아앗!”
두 눈을 부릅뜬 이들이 이를 악물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때로 사람에게 더할 바 없는 용기를 준다.
하나, 과한 용기는 그저 만용일 뿐이라는 빤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턱!
청명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를 향해 십여 개의 쇠창이 맹렬하게 쇄도했다. 순식간에 꿰뚫어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그 창이 거의 몸에 닿을 지경이 되도록 청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빛이 일변하는 순간 그의 검이 허공에 섬전을 그려 냈다.
타앙!
벤다기보다는 때려 내는 검격이었다.
가장 앞에서 찔러 들어오던 창날을 후려치는 순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옆으로 밀려난 창이 뒤이어 찔러오던 창의 앞을 가로막았다. 창과 창이 충돌하며 크게 휘청였고 주변의 다른 창들과 얽혀 들기 시작했다.
가가가각!
“뭣!”
“이, 이런!”
창을 조금이라도 써 봤다면, 그리고 합공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연습해 보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다.
사실 철모방도들의 합공에는 실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상대하는 이가 청명이었을 뿐.
일격으로 상대의 공격을 엉망으로 휘저어 버린 청명이 창들이 튕겨 나가며 만들어진 공간으로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엇!”
살짝 아래로 내려진 검이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단번에 날아드는 독사처럼 대가리를 쳐들었다.
파아아아앗!
솟구친 검이 수십으로 분열했다. 그리고 튕겨 나간 창을 아직 수습하지 못한 철모방도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일말의 망설임 없는 검 끝은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파고든다. 허벅지 안쪽의 동맥을 길게 가르고, 복부를 깊게 찌르고, 어깨의 뼈를 끊고, 목 좌측의 경동맥을 단숨에 잘라 낸다.
파아아아아앗!
단번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급소로 새파란 검날이 파고들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집요했다.
촤아아아아아악!
베인 부위에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당장 피를 막지 않으면 죽는다. 과도한 출혈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니까.
죽고 싶지 않다면 창을 놓고 상처 부위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철모방도들 역시 본능적으로 창을 내던지듯 놓아 버리고 목과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서걱.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옆으로 청명이 스치듯 지나갔다.
육신은 무심히 옆을 스쳤을지언정, 그의 검은 그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자세가 흐트러진 이들의 발목을 청명의 검이 무감하게 베어 냈다.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들이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끅.”
목을 베인 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베인 부위를 움켜잡고 쓰러졌고.
“아아아아아악!”
허벅지와 복부를 찔린 이들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신음하고 경련했다.
각기 다른 비명이 여기저기서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당연히 공포도 수런수런 번졌다.
“…….”
차라리 앞선 이들이 일 검에 목숨을 잃었다면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었다. 두 동강이 난 이들의 시신을 눈으로 보고 있다 해도 이리 섬뜩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많은 전장에서 피와 죽음을 봐 온 그들의 눈에도 생경했다.
무심한 얼굴로 검을 늘어뜨린 검수가 지나치는 자리마다 사지에서 피를 뿜어내는 이들이 쓰러져 발버둥을 쳐 댄다.
그들의 두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명백히 어려 있었다.
시시각각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짓눌린 시선은 차마 마주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 광경을 만들어 낸 청명의 표정은 처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그에게는 딱히 낯선 것이 아닌 듯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과 뒤로 펼쳐지는 광경의 조화가 지켜보는 이들에게 괴이한 공포를 떠안겼다.
“분명 말했다.”
딱히 힘을 싣지 않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똑똑히 들려왔다.
“이제 경고는 없다고.”
저벅.
청명이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에 젖은 그의 하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무, 물러서지…….”
번송이 막 다시 한번 고함을 내지르려는 찰나.
파아아앗!
청명이 바닥을 박차며 가공할 속도로 철모방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헉!”
기겁한 철모방도들이 내력을 끌어 올리며 창을 치켜 올렸다.
기본적으로 창이란 공격보다 방어에 더 이점이 있는 무기다. 수십 개의 창이 동시에 앞을 겨누자 거대한 창날의 벽이 만들어진다.
새파란 기운이 어린 그 벽을 본다면 제아무리 담대한 이라고 해도 일단은 발을 멈추고 볼 것이었다.
하지만 청명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창 벽이 서는 것을 본 청명은 되레 속도를 더 높이며 앞으로 뛰어들더니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이윽고.
파아아앙!
공기를 잡아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검이 사선으로 내리그어졌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내력이 거의 원형에 가까운 검기를 만들어 내었다. 검기가 창 벽을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날아든 검기는 벽과 충돌하자마자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기와 기가 맞부딪혀 터져 나가니, 어마어마한 돌풍이 사위를 휩쓸었다.
“큭!”
“으윽!”
전열의 상부가 무너졌지만, 창진이 와해된 것은 아니다. 남은 이들은 이를 악물며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더욱 힘을 주어 창을 움켜잡는다. 아니, 움켜잡으려 했다.
하나 그 순간!
파아아앗!
청명의 검이 다시 빛살처럼 검기를 뿜어냈다.
그건 검의 찌르기보다는 창의 찌르기에 가까운 공격.
순식간에 수십 개로 불어난 검영(劍影)이 뒤흔들리는 창의 끝을 정확하게 찔러 냈다.
창끝과 검 끝.
그 작디작은 점이 삽시간에 수십 차례의 충돌을 일으켰다.
‘뭣?’
번송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완벽하게 정지한 창이라 해도, 그 끝을 정확히 찔러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평소 공격을 하는 것처럼 강한 힘을 실어 찌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저 창들은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제각각 다른 양상으로 흔들리는 수십 개의 창을 동시에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찔러 낸다?
저건 무학이라기보다 이미 신기(新奇)의 영역이었다.
이미 선행된 폭발 덕분에 창을 제대로 파지하지 못한 이들이 창끝에서 밀려오는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청명의 검에 가격당한 창이 움켜잡은 손바닥을 찢어 내며 뒤로 쭉 밀려났다.
“아아악!”
“끄윽!”
창의 전열이란 기본적으로 단단히 곤두세운 창이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법. 백이 아니라 천이 모인다고 해도 창을 잡지 못한 전열은 무용지물이다.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 버린 전열로 청명이 파고들었다.
파아아아앗!
그의 검은 독사처럼 영활하게 철모방도들의 급소를 사정없이 찔렀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날붙이가 살을 파고들며 가르는 끔찍한 소리가 무심하게도 퍼져 나갔다.
“끄르르륵!”
“끄아악!”
허벅지를 베이거나 어깨를 꿰뚫린 이들은 개중에 나은 편이었다.
목을 베인 이는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폐를 꿰뚫린 이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리며 엎어졌다.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터진 손바닥으로 꾸역꾸역 어떻게든 창을 다시 잡은 이가 고함을 내지르며 청명에게 뛰어들었다.
하나 노기에 차 달려든 그의 피를 삽시간에 식게 만든 것은 순간 마주친, 청명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푸욱!
청명의 검이 빛살처럼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어깨가 꿰뚫린 고통과 물리적 충격에 창을 잡은 손이 느슨해졌고, 파고든 검은 찌르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뽑혀 나와 창을 후려쳤다.
카강!
마침내 창을 놓쳐 버린 이가 본 것은 저를 향해 날아드는 수십 개의 검영이었다.
푸욱! 푸욱! 푸욱! 푸욱!
어깨, 가슴, 배, 그리고 발목까지.
순식간에 십여 개의 자상이 새겨진 육체는 짚단처럼 맥없이 허물어졌다.
털썩.
하얗게 질린 철모방도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태연하게 몸을 돌린 청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계속하지.”
한 줄기 검은 빛처럼 철모방도들을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