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화. 화산파 새끼가 누구냐? (5)
진양건은 결코 우둔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영리한 편에 속했다. 만일 그가 멍청했다면 감히 금검부를 상대로 사기를 치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는 달리는 내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무사히 달아날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지금 당장이야 어찌어찌 요행으로 따돌렸지만, 그놈들의 추적술과 무위를 감안한다면 단전이 터질 때까지 달려도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잡힐 수밖에 없다.
달아나는 걸 포기하고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긴 채 기다리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 역시 결국엔 요행을 바라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천운이란 여러 번 오지 않는 법.
이미 한 번의 천운으로 떨어졌던 목을 다시 붙였는데, 또 한 번의 천운을 노린다? 그건 바보도 하지 않을 짓이다.
이 모든 생각 끝에 진양건은 결국 도주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내어 실행에 옮겼다.
“흐으으음.”
철모방의 방주인 홍모일섬(紅矛一閃) 번송(樊頌)이 묘한 눈으로 탁자 위의 전표 뭉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걸 받고 너를 지켜 달라?”
“예! 그렇습니다, 방주님.”
“하하하핫.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번송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금검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를 쫓고 있으니 네놈이 죽지 않도록 우리더러 지켜 달라? 조금 전까지 금검부에서 수작질을 해 댔던 네놈을?”
진양건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긴장한 나머지 말을 살짝 더듬고 말았다.
“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득이 서로 맞는다면 안 될 것도 어…… 없지 않겠습니까!”
“이득이라? 이득? 그래, 맞는 말이지.”
번송이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이득은 충분히 본 것 같은데? 돈은 여기에 있는데 왜 내가 굳이 너를 지켜줘야 하는 거지? 나는 이 돈만 챙기고 네놈을 내어 주면 그만인데.”
진양건이 떨리는 눈으로 번송을 바라보았다.
‘망할 사파 새끼들.’
하지만 그 역시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예상하고 있었다.
“끌고 나가라!”
“이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음?”
흥미를 잃은 듯 몸을 돌렸던 철모방주가 고개를 획 돌려 진양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 이 돈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저를 지켜 주신다면 돈을 숨겨 놓은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사기꾼 같은 놈이 감히 나와 협상을 해? 내가 네놈의 주리를 틀어서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느냐?”
“굳이 그,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
진양건은 흘러내린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놈들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그놈들을 무찔러 주신다면 저는 당연히 돈이 있는 곳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제가 고문을 당해서 입을 여는 것보다 놈들의 도착이 더 빠를 텐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허.”
번송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의 머리에 자신깨나 있는 모양인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놈들을 물리치고도 나는 네놈의 껍데기를 벗겨 버릴 수 있다. 감히 너 따위가 나와 같은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닙니다, 방주님!”
진양건은 얼른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제가 어찌 감히 방주님과 협상을 하려 들 수 있겠습니까! 그저 어떻게든 목숨줄을 붙여 보고자 하찮은 놈이 간청하는 것뿐입니다.”
“흐으으음.”
번송은 여전히 무언가가 탐탁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
“그래 보시오, 방주.”
옆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번송이 바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저 버러지 놈이야 어찌하시든 별 관심이 없지만…… 저놈을 쫓는다는 이들에게는 관심이 있소.”
“그자들 말입니까? 하나 이곳은…….”
“말이 안 되지.”
호화로운 탁자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하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놈들은 원래 말이 안 되는 놈들이거든. 특히나 그 활동 영역만큼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지. 중원의 남부든 북부든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소.”
“……아무리 그래도 섬서에서 여기까지는 좀…….”
“내 말을 못 믿는 거요?”
번송이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감히 어찌 귀공들을 의심하겠습니까.”
“여하튼…….”
사내가 턱을 긁적이며 말한다.
“우리의 짐작이 맞다면, 뜻밖의 대어를 잡을지도 모르지.”
그러자 사내의 옆에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패군께서 원하시는 일일지 확인하지도 않고 일을 벌일 수는 없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생포해 끌고 가면 그만이잖은가! 그럼 패군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
“일단은 기다려 보지. 정말 대어가 오고 있는지 말이야.”
말을 끝낸 사내가 턱짓했다.
“방주.”
“예!”
“수하들을 동원해 준비시키시오.”
“알겠습니다. 한데…… 금검부의 일은…….”
“걱정할 것 없소.”
사내는 걱정하지 말란 듯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거래는 확실하게 지키오. 다만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타이르듯 덧붙였다.
“금검부가 혼란에 빠진 지금 정리하고픈 방주의 마음은 이해하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혼란이라는 게 딱히 의미가 없소. 일이 정리되는 대로 남창은 방주의 것이 될 것이오.”
“당연히 그리 믿고 있습니다!”
철모방주가 화색을 띠며 연신 굽실대었다. 사내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화산신룡이라…….’
헛웃음이 나온다.
‘패군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는 거물이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내가 운이 좋은 모양이군.’
이삭을 주우러 왔다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삭을 주우러 온 길이니 보석은 줍지 않고 버려두고 갈 멍청이는 없을 터.
‘어디 한번 보지. 정말 화산신룡인지.’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간다.”
청명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윤종이 굳은 얼굴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사숙, 이건…….”
“안다.”
백천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한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금검부에 쳐들어가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들은 적으로서 금검부에 방문하지 않았다. 물론 사소한 오해가 겹쳐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다. 사정을 설명하고, 적당한 보상을 해 준다면 금검부 역시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 사상자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철모방. 사파의 영역이다.
사파의 본단에 이리 쳐들어가서 일이 좋게 끝날 리가 없다. 십중팔구는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럼 그들만으로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사파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 쳐들어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최소한…….”
“안다, 윤종아.”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백천은 청명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는데, 나는 말릴 수가 없다.”
“…….”
“가자. 말릴 수 없다면 등이라도 받쳐 줘야지. 저놈이 대체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윤종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청명의 뒷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적을 앞에 두고 분기탱천하여 이끌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낯설어.’
심지어 조금 전 어깨를 다친 이후로 청명이 놈은 마치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 같이 짧게 말도 건네고는 있지만,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지금의 상황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자.”
“사숙…….”
백천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청명의 등을 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 뒤에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
“저놈을 못 믿겠다면 나를 믿어라.”
“……알겠습니다.”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걸과 유이설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자신들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는 듯 말이다.
태행삼검을 기절시키고 단단히 묶어 놓고 온 당소소마저 나서자 백천이 똑바로 청명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사이 청명은 커다란 정문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자 그 앞을 지키던 위사들이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주시했다.
“무슨 용무냐?”
“방금.”
“……방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명이 시선을 살짝 들어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위사들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뭔 눈이…….’
그들은 철모방의 무사들이다.
사파에서 지위란 결국 싸워 이겨 획득하는 것이다. 철모방 소속된 그들은 적지 않은 전투를 치렀고, 적지 않은 수의 살인을 해 왔다.
그렇기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눈빛의 주인이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말이다.
“도망쳐 온 한 놈이 이 안으로 들어갔을 거다. 맞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눈빛이 살짝 변했을 뿐이다.
청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럼 됐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철문이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졌고,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저벅.
저벅.
정작 거하게 소란을 피운 청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옇게 일어났던 흙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청명이 본 것은, 이미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도열해 기다리고 있는 철모방의 무사들이었다.
기다란 철모(쇠창)을 한 손에 든 채 각을 맞춰 흉흉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은 무인이라기보다는 군인처럼 느껴졌다.
청명은 말없이 그들을 훑어보았다.
때마침 뒤따라 들어온 오검이 그의 등을 받치고 섰다.
청명의 입이 가만히 열렸다.
“경고한다.”
“…….”
“조금 전 여기에 온 놈을 내놔. 그럼 순순히 돌아간다.”
청명의 차가운 눈빛이 모두를 훑었다.
“그렇지 않으면…….”
스르르릉.
검집에서 암향매화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검신에서 흐르는 검광이 실로 서늘했다.
“피를 볼 수밖에.”
말도 안 되는 존재감에, 군인처럼 도열해 있던 무사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삼백 이상이다.
삼백을 넘는 인원이 지금 단 한 사람의 기세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쾅!
그 순간 중앙의 광장 뒤에 있는 전각이 거칠게 열리더니 철모방주 번송이 걸어 나왔다.
“이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청명의 시선이 천천히 번송에게로 향했다.
“방주?”
“그래! 내가 철모방의 방주인 홍모일섬 번송이다!”
“여기 쥐새끼 한 마리가 기어 들어왔을 텐데?”
번송은 가소롭단 듯 피식 웃었다.
“글쎄. 내 눈에는 쥐새끼 여섯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데?”
역시 순순히 내놓지 않는 모습에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
파아아아앗!
순간 휘둘러진 청명의 검 끝에서 반월형의 붉은 검기가 발출되어 번송에게로 날아갔다.
그 가공할 속도에 기겁한 번송이 황급히 창을 들어 올렸다.
카가가가가각!
내력을 가득 담은 창이 검기와 맞부딪히는 순간, 검기가 그의 창을 긁어 대며 요동쳤다.
우드드득. 우득!
창을 잡은 손목이 부러질 듯 비틀렸다. 번송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창을 뒤틀었다.
“흐아아아아압!”
카가가각!
마침내 방향이 틀어진 검기가 전각 쪽으로 향했고, 스치는 모든 것을 갈라 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단번에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번송이 희게 질린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뭐, 뭣들 하느냐! 저놈들을 당장 잡아 죽여라!”
“예!”
철모방도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청명과 화산오검을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검을 움켜잡은 청명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파아아아아앗!
그의 검이 섬전같이 휘둘러지며 핏빛 검기를 뿜었다. 달려들던 이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검기가 그들을 파고들며 사방으로 피가 솟구쳤다.
털썩. 털썩.
쓰러진 이들은 피를 쏟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고작 일 수였다. 달려들려던 이들의 기세가 차가운 물이라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오늘 난 장난칠 기분이 아니야.”
검을 늘어뜨린 청명이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막는 놈은 죽는다. 이제 경고는 없어.”
철모방의 공기가 더없이 차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