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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700화 (698/1,567)

700화. 매화검수라고, 들어 보았소? (5)

진양건은 목이 타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비싸겠지.’

벽에 걸린 족자 속 난이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그조차도 저 그림의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쯤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뿐인가.

제가 앉아 있는 의자 역시 심상치 않았다. 검은 의자이나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이, 말로만 듣던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황실이나 직급 높은 이들이나 쓴다는 자단목 의자만 봐도 이 방의 주인이 가진 재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이것도 비싸겠지.’

진양건은 앞에 놓인 찻잔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새하얀 자기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이 절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자칫 떨어뜨려 깨뜨리기라도 하면 천금을 물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마 찻잔에 손이 가질 않았다.

‘금검부의 재력이 천하를 떨게 한다더니, 그 말이 절대 과언이 아니구나.’

금검부 심처에 있는 부주실까지 오면서 본 것들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절로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하지만 부주실의 호화로움은 그때 보았던 것들과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을 크게 삼킨 진양건은 누가 볼세라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제 다 왔다.’

지금부터는 한 치의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설프게 굴었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몇 차례 심호흡하며 애써 낯을 안정시키려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내 문이 활짝 열리며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진양건은 찻잔으로 고정시키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었다.

당황한 기색 따윈 없이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청의(靑衣)를 입은 중년인의 뒤쪽으로 두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중앙에서 걸어오는 이가 이 금검부의 부주인 금검만조(金劍晩照) 상만희(常萬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온 상만희는 깊게 포권 했다.

“저는 금검부의 부주인 상만희라고 합니다. 객을 모셔 두고도 바로 맞이하지 못한 점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진양건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 마주 포권 했다.

“금검만조 상 대협께서 천하의 협의지사라는 사실을 모를 이가 있겠습니까. 협의를 행하는 이는 언제나 바쁘고 고달픈 법이지요. 그런 이를 바쁘다 탓한다면 세상이 이 진양건을 졸장부라 욕할 것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대협의 풍모가 있으십니다.”

“그저 겉치레일 뿐입니다.”

상만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양건의 건너편에 앉았다.

“평소 화산의 이름을 흠모하던 차에 화산의 영웅께서 남창을 방문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어 모시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실례가 되지만 화산에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배분이 되시는지를…….”

“죄송합니다.”

진양건이 살짝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시겠지만 화산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문파입니다.”

“그렇지요, 암요.”

“하여 화산에서는 강호행을 나서는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배분을 밝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화산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한 이들의 배분이 밝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아……. 그것 참 기이한 일이로군요.”

태연한 얼굴로 상만희의 표정을 살핀 진양건이 덧붙였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화산의 명성은 최근 들어 과하게 높아진 감이 있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온 천하가 화산의 이름을 칭송하지 않습니까?”

상만희의 말에 진양건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명성이 높아지면 사람은 쉬이 오만해지지요. 장문인께서 제자들이 과히 자만하지 않도록 내리신 처사이니, 금 부주님의 넓은 이해를 바랄 뿐입니다.”

상만희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협의지문이라 하더니.’

말투 하나하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가? 최근 들어 화산의 이름이 높아진 까닭을 자연히 알 것 같았다.

“깊은 도를 지니신 장문인의 의도를 저희가 어찌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것이 옳겠구나 여기는 수밖에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양건이 부드럽게 웃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 됐고.’

꼬치꼬치 캐물어 온다면 결국 이상한 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일찌감치 높으신 분의 의도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는 게 낫다.

금검부주 역시 화산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테니, 장문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을 따져 물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한데…….”

진양건이 한층 여유로워진 어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는 최대한 적게 오가는 쪽이 좋다. 그러니 말을 돌리되, 목소리는 최대한 느긋하게 내어 이쪽이 다급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공사가 다망하실 금검부주님께서 이유 없이 무명소졸을 청하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혹여 제게 언질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을는지요?”

“하하하. 어찌 무명소졸이라 하십니까! 진 대협께서 어제 태행삼검을 꺾으신 일화가 온 남창에 퍼졌습니다. 게다가 이곳에 오시기 전에도 몇 번이고 협행을 하셔서 화산의 명성을 드높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사문의 가르침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금검부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화산의 협행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지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화산신룡이나 화정검의 경우에도 숨 쉬듯 협행을 행한다 들었습니다.”

진양건은 흐뭇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아이들이지요.”

“아…… 그러시다면?”

상만희가 순간 눈을 빛내자 진양건은 흠칫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제 말은 잊어 주십시오.”

“그, 그럼요! 이 상모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못 들은 척하겠다 했지만 상만희의 눈은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화정검을 아이라고 칭했다는 건 최소한 배분이 그 위라는 거겠지.’

옷에 새겨진 매화 문양의 자수. 그리고 저 태행삼검을 일 검에 꺾어 낸 실력. 거기에 화정검을 아이라 칭하는 언행이라면 검증은 끝났다고 봐도 된다.

다른 걸 다 접어 두고서라도 저 태행삼검을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고수가 뭐 하러 화산의 제자를 사칭하겠는가?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소속이 없다 해도 명성을 날릴 수 있을 것을.

‘그 정도 배분이라면 논의가 가능하다!’

얼굴에 화색을 띤 상만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진 대협.”

“예, 부주님.”

“다름이 아니라 이 상모가 금검부의 부주로서 진 대협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하시면…….”

“먼저…… 화산은 진정으로 협의를 추구하는 문파입니까?”

그 말에 진양건이 고소를 머금었다.

“일개 제자의 신분으로 어찌 감히 화산을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제가 말실수를…….”

“하나, 천하의 그 어떤 문파보다 바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상만희는 감탄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믿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혹여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지금 인근에 위치한 철모방(鐵矛幇)과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으음.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만.”

“철모방과 저희 금검부는 본디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서로 작은 교전만 있었을 뿐, 본격적인 쟁이 벌어지지는 않았었는데…… 최근 철모방에서 만인방의 고수들을 초빙하면서 문제가 커졌습니다.”

“만인방이라 하셨습니까?”

진양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상만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화산과 만인방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소문이 틀리지 않았구나. 저리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예. 만인방에서 온 이름 모를 고수들이 저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제 생각에는 그저 고수 몇몇을 보낸 것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으으음.”

진양건의 표정이 굳어지자 상만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 대협. 제가 이 금검부를 보존하여 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이곳 남창에는 제대로 된 문파가 없습니다. 만일 금검부가 무너진다면 저 철모방 무리가 남창을 장악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만인방의 손에 강서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건 정말 큰일이군요. 한데…… 다른 문파들은 그걸 보고만 있었습니까?”

“누가 나서겠습니까.”

상만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옥하고 융성한 도시를 끼고 있는 대문파들은 남창 같은 작은 곳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설령 관심이 있다 해도 상대가 만인방이라는 말을 듣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버리더군요.”

“그런 일이…….”

“진 대협!”

상만희가 진양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와주십시오!”

“…….”

“이제 남창의 희망은 화산뿐입니다. 화산은 불의를 참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 간악한 만인방에게서 남창을 지켜 주십시오.”

“음…….”

진양건이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상만희가 슬쩍 소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저희가 공짜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소매 안에서 꺼낸 전표를 슬쩍 내밀었다.

“도와만 주신다면 성의 표시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진양건의 시선이 내밀어진 전표 더미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돈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듯 이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 대협?”

“부주께서는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예?”

진양건이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은 금전으로 움직이는 문파가 아닙니다. 협의를 논하며 돈을 내민다는 것은 화산의 협의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순간 아차 싶었던 상만희의 얼굴이 살짝 희게 질렸다.

“저는…… 저는 그저 마음을 표하고자…….”

“진짜 마음을 표하고 싶으십니까?”

진양건은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인방의 간악한 것들이 벌이는 수작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지요. 장문인께서도 당연히 검을 뽑으실 것입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며, 명분이라면?”

“이 전표의 다섯 배를 가져오십시오.”

“다섯 배요?”

“예. 다섯 배입니다.”

상만희가 멍한 얼굴로 진양건을 바라보았다.

돈을 주는 것은 화산을 모욕하는 행위라더니 돈을 더 내놓아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무한에서 있었던 일을 혹 들으셨습니까?”

“아…….”

상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검부에서 주신 돈은 강서와 남창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모두 쓰겠습니다. 그럼 금검부의 명성 역시 올라가겠지요. 저희 화산은 금검부에서 주신 돈은 단 한 푼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그, 그렇다면?”

“예. 금검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훌륭한 문파가 될 것이고, 그럼 저희 역시 그런 금검부를 위해 검을 들 명분이 생기는 게지요.”

진양건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 금전을 주신다면 저 역시 화산에 연통을 넣어 본산의 제자들을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상만희의 얼굴에 순간 갈등이 어리자 진양건이 빙그레 웃었다.

“철모방에게 패하는 날에는 어차피 모조리 빼앗길 금전입니다. 그들에게 내어 주느니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결정타가 된 모양이었다. 상만희는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전표를 구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일이 끝난 뒤에 받아 가시는 건…….”

“아니 될 말입니다.”

진양건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사례금이 아니라 저들에게 나눠 줄 돈입니다. 화산이 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가난한 이들에게 금검부와 화산의 이름으로 구휼을 먼저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아……. 그, 그렇지요.”

“언제까지 준비가 가능하십니까?”

“……그게…….”

진양건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만인방의 위협이 생각보다 그리 거세고 급박하진 않은 모양이군요. 그럼 느긋하게 준비하십시오. 다만 너무 오래 시간을 끄시면 제가 또 해야 할 일이 있는지라…….”

“아, 아닙니다! 급하지 않다니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두 시진! 제가 두 시진 내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급하실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당겨야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말씀하신다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상만희는 더 주저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본능적으로 탁자 위에 놓인 전표 뭉치로 향했다. 하지만 진양건은 그 돈은 제 것이 아니라는 듯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표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대협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화산의 도움에도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응당 해야 할 일을 행할 뿐입니다.”

“그럼 잠시!”

상만희는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좌우의 총관들에게 명했다.

“전장에 가서 전표를 찾아 오거라! 당장!”

“부, 부주님. 급하신 마음이야 알겠으나 아직 저자가 화산의 제자라는 게 확인된 것도 아니고, 저자의 말에 화산이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표를 먼저 준다는 건…….”

“멍청한 소리!”

상만희가 버럭 고함을 쳤다.

“태행삼검을 이길 수 있는 고수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태행삼검을 일 검에 쓰러뜨릴 수 있는 고수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이가 뭐 하러 소림이나 무당도 아닌 화산의 고수를 자처한단 말이더냐?”

“……그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화산을 움직이는 데는 헐값이나 다름없다. 협의만 아는 멍청한 도사 놈들을 그만한 돈으로 부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그러니 잔말 말고 찾아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총관들이 결국 고개를 숙인 뒤 바삐 사라지자 상만희는 득의양양하게 속으로 웃었다.

‘멍청한 도사 놈. 정말이지 순진하기 짝이 없군. 이 기회에 철모방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지.’

하지만 그는 몰랐다.

부주실에 홀로 남은 진양건이 지금 그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흐으으으으…….”

벌어진 입술 새로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좌우를 살핀 청명이 지옥의 마귀 같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 남창인가?”

똬리를 틀고 서로 잡아먹을 기회만 노리는 두 마리의 뱀들을 향해, 굶주린 짐승이 접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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