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매화검수라고, 들어 보았소? (2)
꿀꺽.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소란스러웠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찬 주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만큼은 흥미로 반짝였다.
화산과 종남.
그 두 문파의 관계를 아는 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설사 그 관계를 모르는 이라고 해도 백주대낮의 주루에서 검을 빼 들고 마주한 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 리 없었다.
“놈!”
태행삼검의 대형인 만리검(萬里劍) 과혁소(過赫笑)가 으르렁대며 사내를 몰아치려는 순간이었다.
“잠시.”
검을 뽑은 사내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주변을 쭉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본인은 이 자리에서 검을 나누어도 딱히 관계가 없으나, 검에는 눈이 없는 법. 혹여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이오.”
“…….”
“어떻소? 기왕 검을 나눌 것이라면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가는 것이?”
“이놈이…….”
과혁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놈의 교묘한 언변 때문에, 그들은 주변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마구 휘두르는 무뢰한이 되어 버렸다. 본디 이런 일은 명문 종남의 제자인 그들이 먼저 논했어야 할 일이다.
“좋다! 하지만 설마 남들의 눈이 없는 외진 곳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과혁소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남의 눈이 없는 곳에서 무릎 꿇고 빈다고 해서 용서해 줄 생각은 없다.”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사내가 슬쩍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쯤이면 적당히 검을 나눌 만하겠구려. 어떻소이까?”
서로를 마주보며 눈빛을 교환한 태행삼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좋다.”
“흐음. 그럼.”
사내가 검을 든 채로 창 위로 발을 올렸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어엇!”
“저, 저저!”
중인들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 여긴 칠 층인데!”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다급하게 창 쪽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곤죽이 된 시신이 아니라 멀쩡히 서서 위를 바라보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내려오시오.”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도 저리 멀쩡한 것은 저 사내의 무학이 결코 낮지 않다는 증거였다.
태행삼검 역시 그리 생각하며 얼굴을 굳혔다.
“으음.”
그들은 주루의 계단과 창문을 번갈아 보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예!”
선두에 선 과혁소가 망설임 없이 단번에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그의 두 형제도 뛰어내렸다.
“오!”
“내, 내려가 보자!”
주루를 채우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쿵! 쿠웅!
태행삼검이 바닥에 내려섰다.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차마 막을 새도 없었다.
‘큭.’
충격을 받은 다리가 찡하며 말도 못 하게 저려 왔다. 발등이 찢어진 듯 아팠고 발목이 시큰거려 제대로 서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구부러진 무릎을 억지로 꾸역꾸역 편 태행삼검은 건너편에 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주루에서 뛰어내린 것만으로도 그들은 보법을 시전하기 어려울 만큼 큰 충격을 받았는데, 저 사내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입만 산 애송이는 아니라는 건가?’
과혁소가 살짝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
“무명소졸이라고는 하나 이름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네 이름조차 밝힐 수 없는 겁쟁이더냐?”
“하하핫.”
사내가 한번 크게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그리 도발할 것 없소이다.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니 말이오. 내 이름은 진양건(陳陽建)이라 하오.”
“배분은 어찌 되느냐?”
“으음?”
과혁소가 차가운 눈으로 진양건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이 화산의 제자라면 배분 정도는 있겠지?”
“하하. 그게 뭐가 중요하겠소?”
“……뭐라?”
진양건은 검을 부채처럼 가볍게 흔들었다.
“내 배분이 그대들보다 높으면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겠소?”
“…….”
“아니면, 내 배분이 그대들보다 낮다면 배분을 이용하여 찍어 누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이놈이…….”
진양건이 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의 배분이 어찌되건 그대들이 한 짓이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 굳이 배분을 논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아니, 나는…….”
“중요한 것은 불의(不義)한가, 그렇지 않은가! 무도(無道)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 위모는 상대의 배분 따위로 불의를 의로 바꾸지 않는 사람이오!”
그가 힘주어 외치자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든 이들이 감명받은 얼굴로 박수를 쳐 댔다.
“옳다!”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말만 하는구나!”
과혁소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저 저자의 배분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 때문에 지금 태행삼검은 실력에 자신이 없어 배분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 한 이들이 되어 버렸다.
‘빌어먹을 놈이!’
혓바닥에 뭘 발랐는지 모르지만 저놈은 금세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자기 쪽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형님.”
“안다!”
괜히 말을 더 섞어 봐야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이해한 과혁소는 검을 들어 진양건을 겨누었다.
“네놈의 혀가 무섭다는 건 알았다. 네 검이 그 혓바닥의 반이라도 따라가면 좋겠구나.”
그러자 진양건이 슬쩍 과혁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셋 같은데?”
“겁먹을 것 없다, 애송아. 설마 우리가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합공을 할 일이 있겠느냐? 나 혼자 상대해 줄 것이니 지린 오줌이나 말리거라.”
“아니, 그 반대요.”
진양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혼자서는 무리요. 셋 모두 한 번에 덤비시오.”
“……뭐라?”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당신 혼자서는 나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당신의 형제들과 함께 덤비라고 했소.”
진양건은 뽑아 든 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래야 상대할 맛이 조금은 날 테니까.”
과혁소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패할 걸 생각해 변명거리를 찾는 모양이구나! 네놈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그건 오해요. 나 진양건은 떳떳함을 아는 이요. 당신들이 셋이기에 패했고, 혼자라면 이길 수 있었다고 변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진양건은 태연히 어깨를 쭉 폈다.
“그저 당신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 싶은 것뿐이오. 그게 검수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지.”
“네 이놈! 화산의 본산제자들도 감히 우리 앞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지 못할 것을……!”
“당연하오. 나는 평범한 화산의 제자가 아니니까.”
“……뭐라고?”
진양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매화검수라고, 들어 보았소?”
“……매화검수?”
“몰랐다면 이제 알게 될 것이오. 매화검수가 무엇인지.”
앞으로 겨누어진 진양건의 검이 빛을 반사했다.
“바로 이 검을 통해 말이오.”
“…….”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과혁소가 이를 갈아붙였다. 그때 그의 뒤에 서 있던 동생들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형님. 저리 말하는데 소원대로 해 줍시다!”
“우리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소!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저 풋내기 놈이 뼈저리게 깨닫도록 해 줘야 하지 않겠소!”
과혁소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그러자꾸나!”
맏형의 허락이 떨어지자 형제들이 앞으로 나와 그의 좌우를 채웠다.
“애송이 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나는 후회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오.”
“놈!”
과혁소의 두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어느새 구름처럼 몰려든 이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이 대치를 지켜보았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는 것이, 금방이라도 피를 뿌릴 것만 같았다.
짧은 침묵을 깨고 과혁소가 외쳤다.
“혼쭐을 내 줘라!”
“예!”
“이노오오오옴!”
태행삼검이 동시에 진양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둔중해 보이는 과혁소마저도 벼락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진양건과의 거리를 좁혀 냈다.
그들이 태행삼검이라 불리며 명성을 떨친 이유를 신법으로써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양건은 그 가공할 속도를 보고서도 딱히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과혁소가 휘두른 검이 순식간에 머리에 닿을 지경이 되고도 그저 빤히 그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헉!”
“저, 저!”
심약한 이는 벌써부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진양건의 머리가 둘로 갈라지는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채애애앵!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더니 일제히 달려들었던 태행삼검이 동시에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이, 이놈…….”
과혁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진양건이 그의 검은 물론이고 좌우에서 공격해 들어가던 동생들의 검마저 일격에 쳐서 날려 버린 것이다.
“흐으음.”
진양건은 조금 못마땅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타인을 겁박하다니. 아무래도 종남은 너무 오만해진 것 같소.”
“가, 감히 그 입에 종남을 올려?”
“똑똑히 보시오.”
진양건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도를 지키는 검이란 이런 것이지. 이게 바로 화산의 검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양건의 검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중인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거…….”
순식간에 수십으로 불어난 검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더 불어났고, 이내 희고 붉은 검기를 사방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주변은 순식간에 진양건의 검기로 가득 차올랐다. 붉고 흰 검기가 마치 꽃들이 형형색색 만발한 꽃밭을 보는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저, 저거!”
“저게 화산의 매화검법이구나!”
들은 바가 있는 이들이 저마다 고함을 내질렀다.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양, 피어오른 검기들은 태행삼검을 향해 일시에 터지며 뿜어졌다.
“뭐, 뭣!”
과혁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위가 검기로 가득 차 버린 것 같은 광경.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그 숱한 검기가 태행삼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더없이 화려한 검기가 허공으로 비산했고, 남은 것은 바닥에 쓰러진 태행삼검 세 사람뿐이었다.
스르릉.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납검한 진양건은 쓰러진 이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종남에서는 힘으로 타인을 겁박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오. 하지만 화산은 결코 그런 행태를 좌시하지 않소. 기억하시오. 검은 나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최고다아아아아아!”
“화산! 역시 화산이구나!”
“화산파가 괜히 사해에 명성을 떨치는 게 아니었어! 정말 그림에서 나온 사람 같구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진양건은 진평을 향해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아……. 아, 예! 괜찮습니다.”
진양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행이오. 혹여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시오.”
“예, 예! 대협,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진양건은 가볍게 포권 한 후 미련이 없이 몸을 획 돌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환호와 찬사는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진평의 얼굴에 작은 의혹이 스쳤다.
‘뭐가 좀 다른 것 같은데…….’
그가 직접 보고 온 화산의 제자들과는 그 분위기부터 행동까지 분명 뭔가 달랐다. 작은 이질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아니, 설마.’
저만한 실력을 가진 이가 설마 화산을 사칭하지는 않겠지. 설마.
하지만 진평은 몰랐다.
사람들을 뒤로하고 장내를 빠져나가는 진양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아주 찰나간 스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