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화. 뭘 사칭한다고? (5)
“흠. 확실히 검진은 쉽지 않구나.”
“그래도 노력과 근성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되는 거지. 천천히 꾸준하게 하루하루 정진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동감.”
차례대로 백천과 조걸, 윤종과 유이설의 발언이었다.
하는 말만 들어 보자면 참 옳고, 무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를 논하고 있으나 막상 들은 이들의 반응은 영 좋지 못했다.
“그 말씀을 왜 사숙이 하십니까!”
“사형! 양심이란 게 있기는 합니까?”
“그런 양반이 옆에 놈 옆구리를 후려 까요?”
“말이면 단 줄 알아!”
사방에서 쏟아지는 맹렬한 비난에 오검은 일제히 여기저기로 고개를 슬쩍 돌리며 외면했다.
“나름 열심히는 했다.”
“열심히만 하지 말고 잘하란 말입니다, 잘! 세상에서 제일 빡치는 게 사고 치는 인간이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래도 내가 사숙인데 말이 좀…….”
“사숙이니 여기서 끝나는 겁니다. 사숙이니까!”
눈을 시퍼렇게 뜨는 청자 배들을 물끄러미 본 백천은 서글픈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옛날이 나은 면도 있었어.’
그때는 가난하고 고달팠지만 그래도 애들이 그만 보면 껌뻑 죽었는데, 이제는 백자 배도 아니고 청자 배 놈들이 눈에 살기를 띠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댄다.
그럼에도 쓴 소리를 할 수 없는 건, 백천을 비롯한 오검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백상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았다.
“관주님께서 호흡을 맞추라고 하시는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
“검진 연습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앞으로 말도 안 되는 검기 뿌려 대는 양반이나.”
백천이 움찔하여 시선을 피했다.
“그…… 미안하다. 습관이 돼 놔서.”
“검진이라는데 갑자기 남의 검기 사이로 불쑥 검 찔러 넣는 사람이나!”
“거기가 비었어.”
“그게 중요해? 지금 그게? 적이 뒈지기도 전에 옆에서 검 휘두르던 사람이 놀라 심장마비로 뒈지게 생겼는데?”
백상이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봤지만 유이설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양심에 거리낄 게 아주 없지는 않은지 치켜든 턱의 각도가 백상에게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가는 놈.”
“……피가 끓어서 그만…….”
“남의 검 지적하다가 정작 제 검은 제대로 못 펼치는 놈!”
“……죄송합니다.”
백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옆으로 획 돌아갔다.
“너는 왜 검진 연습하는데 갑자기 비도랑 침을 빼 드냐?”
“아무래도 저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럼 그게 검진이냐? 응? 검진이야?”
“…….”
백상은 위장에 구멍이 날 것 같은 기분에 명치를 움켜잡았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어떻게 도움 되는 인간이 하나도 없냐.’
이 양반들이 화산오검인데.
그래도 화산에서는 나름 잘나간다고 유명한 양반들인데, 어떻게 된 게 단 한 놈도 제대로 검진을 펼치는 이들이 없었다.
“지금까진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습니까? 오늘 하는 걸 보니 밥 먹다가 숟가락끼리 부딪혀서 살인 날 판이던데.”
“…….”
“그리고!”
백상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럴 거면 그냥 댁들끼리 모여서 검진 연습 하시라고! 왜 애먼 애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애들까지 수련 못 하게 방해를 합니까!”
이 말에는 백천도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상아.”
“뭐요!”
“그……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꾸나.”
“예?”
“……우리끼리 검진을 수련하면 무슨 꼴이 날 것 같으냐?”
“…….”
불같이 화를 내던 백상도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주위에 둘러선 다른 이들의 입에서 나왔다.
“누구 하나 안 죽으면 다행이지.”
“하나만 죽으면 다행이 아니고?”
“그 말이 맞네.”
“그건 수련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게 아닐 겁니다.”
“저 성격에 잘도.”
옳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수군대는 제자들을 보며 백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그냥 싹 다 꺼졌으면 좋겠다.’
이 인간들이 처음부터 이랬으면 말도 안 한다.
예전의 백천은 재수가 좀 없긴 했지만 다른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늘 애쓰는 사람이었고, 유이설은 예나 지금이나 말수는 없지만 예전엔 딱히 지금처럼 튀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너무 조용해서 탈이었지.
윤종이야 모범이라는 말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인간이었고, 조걸은 예전부터 문제가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단체로 ‘정도’나 ‘답’이라는 것을 아주 상실해 버린 상황이니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현상의 원흉을 떠올린 백상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튼 각자 수련하든, 아니면 같이 수련하든, 애들 수련하는 건 방해하지 마십시오.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수련하지 마십시오! 청명이까지 해도 여섯밖에 안 되는데 빠진다고 뭔 문제 있겠습니까?”
“……기왕이면 배우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요!”
“내가 그래도 화산의 대제잔데, 다른 제자들이 배우는 것을 몰라서야 되겠느냐?”
“…….”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함께 수련을 하다 보면 서로 답답한 부분도 생기고, 아쉬운 부분도 있기 마련이지, 그런 부분들을 서로 채워 주고 북돋워 주면서 함께하는 게 사형제 아니겠느냐?”
“……그거 굉장히 훌륭한 말씀이긴 한데, 그걸 보통 모자라고 답답하고 아쉬운 당사자가 이야기합니까?”
“어쩌겠느냐? 너희가 이해하거라.”
백상은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사형만 아니면 진짜…….’
아니, 하필 문파에 하나 있는 사형이 저 양반이란 말인가?
한때는 그게 참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에 더 속이 뒤집어졌다.
심지어 그 와중에 백천의 말에 감동받아 박수라도 칠 기세인 나머지 오검을 보니 뒤집어진 속에다가 소금을 뿌리고 불을 지르는 느낌이었다.
“끄윽…….”
막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 된 백상을 구원해 준 것은 어디선가 달려온 이의 목소리였다.
“대사형!”
“음?”
“현영 장로님께서 사형을 찾으십니다! 유 사매와 윤종, 조걸, 소소도 같이 오랍니다.”
“……으응?”
백천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부르는 인원이 영 심상치가 않은데.’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검진을 마저…….”
“아, 뭐 하십니까! 장로님 부름인데 빨리 가셔야지!”
하지만 백상이 칼같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상아. 요즘 네가 나한테 꽤 각박해진 것 같구나.”
“더 각박한 꼴 보기 싫으시면 빨리 가십시오!”
“그래도 내가 사형인데…….”
“안 가시면 재경각 소각주의 권한으로 사형 앞으로 지급되는 돈은 다 잘라 버릴 겁니다.”
그러자 백천이 냉엄한 얼굴로 외쳤다.
“뭣들 하느냐! 장로님이 부르신다는데!”
오검의 얼굴이 영 못마땅하게 썩어 들었다.
요즘 들어…… 부쩍 저 사람이 한심해진다고 생각하며.
“사칭이라니.”
모든 설명을 들은 백천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사칭할 게 없어서 화산을 사칭한단 말인가?
“그것참 이상한 사람이네. 사칭을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화산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강서에서 화산을 사칭한단 말입니까?”
조걸의 말에 윤종이 혀를 찼다.
“멍청한 놈아. 관련이 있는 데서 사칭하면 바로 걸리지 않느냐!”
“아…… 그것도 그러네.”
“원래 사칭은 당사자가 오지 못하는 곳에서 하는 법이다. 그래야 걸릴 확률이 줄어들지.”
조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만 들어 봐도 백천은 화산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사칭범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화산의 이름이 천하에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티끌만 한 오점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장로님. 말씀하신 부분은 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게…….”
“무엇이더냐?”
“……저놈은 왜 저리 빡쳐 있는 겁니까?”
“……난들 알겠느냐?”
백천은 구석에서 기를 모으는 청명을 흘끗 다시 보고는 못 볼 것이라도 마주한 양 움찔했다.
“혹시 뭐 그놈이 종남에서 보낸 놈이라든가, 아니면 무당에서 보낸 놈이라든가…….”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럼 왜 저러는 건데요…….”
“그러니까 난들 알겠느냐.”
그때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됐고!”
“…….”
“이거저거 따질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성질 같아서는 벌써 나 혼자 뛰어갔는데, 장문인께서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사숙 끌고 가려고 기다리는 거니까.”
청명아.
기본적으로 제자의 입에서 ‘장문인께서 간곡하게 부탁했다.’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 자체가 막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문파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젠 그게 너무 자연스럽기까지 해서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현영이 백천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보면 알겠지만, 이번에는 저 녀석이 영 심상치가 않다.”
“언제나 심상치 않았지요, 장로님.”
“그야 그렇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상치가 않다.”
“……그래 보이기는 하네요.”
현영이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이는 청명이를 슬쩍 보더니 넌지시 다시 물었다.
“검진은 배웠느냐?”
“아직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으음……. 그럼 차라리 검진을 좀 더 익힌 후에 출발하라고 할까. 유사시에는 검진이라도 써서…….”
저기요? 장로님?
검진을 익히는 게 그런 이유였나요? 청명이를 제압하려고……?
당연히 농담이겠으나, 청명이 놈의 위력을 생각하면 마냥 농담으로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상황이 이러니 시간을 끌 수 없겠구나. 바로 출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뭔가 영 탐탁찮은 임무였지만, 현영의 말대로 시간을 끌 만한 일은 아니었다. 강서에서 사칭범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걱정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아르르르르…….”
“뭐야? 아직 남은 개가 있어?”
“원래 저기에 있었어, 미친개.”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적은 내부에 있다.
그는 그 말을 정말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다녀오마.”
“잘 다녀오십시오!”
“느긋하게 다녀오십시오, 사숙!”
“오시는 길에 천천히 유랑까지 즐기다 오셔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좀 즐기고 살 때도 되셨죠!”
“…….”
격하기 짝이 없는 환송을 받으며 백천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이리 모두 나와 환송해 주니 좋은 일이겠으나, 이전과는 달리 영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상아.”
“예, 사형.”
“검진 수련을 한 번 더 했느냐?”
그 말에 백상이 대답 대신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버린 면면과 여기저기 형편없이 찢긴 의복 꼴이, 수련이 아니라 패싸움이라도 한 몰골들이었다.
“……애들이 혈기가 워낙 넘치다 보니.”
“두 번 넘치면 사람 몇 죽겠네.”
“…….”
백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샐 바가지가 할 걱정은 아니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이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를 생각하니 발에 무거운 추라도 단 기분이었다.
“……어쨌든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관주님의…….”
“아, 알아서 합니다. 좀 가십쇼, 좀!”
“……나쁜 놈 같으니.”
옛날에는 사형, 사형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사제였는데. 어쩌다가 저런 시커먼 늑대 같은 놈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그때 백상이 좌우를 슬쩍 살피고 가까이 붙더니 백천의 품 안에 뭔가를 쑥 찔러 넣었다.
“재경각에서 남는 돈 좀 편성하여 여비 두둑하게 챙겼습니다. 밥 굶고 다니지 마십시오.”
“……상아.”
“맛난 것 좀 챙겨 드시고요.”
그래도 사형제는 사형제구나.
감동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백천의 등을 백상이 떠밀었다.
“자자. 이제 얼른 출발하십쇼. 얼른. 잽싸게.”
“그래.”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양팔이 붙들린 채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움찔대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제발 무사히…… 아니, 아무 일 없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백천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쳤다.
“가자!”
“예!”
그게 신호라도 된 양 청명이 놈이 고삐 풀린 경주마처럼 무섭게 내달렸다.
“으아아아, 이 새끼야! 전력으로 달리지 말라고!”
“따라붙어! 빨리! 빨리 따라붙어!”
오검이 기겁하며 그런 그를 따라 헐레벌떡 뛰었다.
이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화산의 제자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잘하는 짓인지.”
“사칭범이 사고 치는 것보다 저 양반들이 사고 칠 게 더 무서운 거 아닙니까?”
“……장문인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우리라도 잘하자. 우리라도.”
위상은 높아졌지만,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는 곳.
그게 바로 화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