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뭘 사칭한다고? (4)
“뭘 사칭한다고?”
현영이 어이없단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자 청명이 홍대광에게 눈치를 주었다. 홍대광은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
몰론 그는 자신이 화산과 한 몸처럼 살아야 한다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화산의 제자처럼 보고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은가?
“그…….”
억울한 마음이 솟구쳤으나, 현종 앞에서 자연히 꿇린 무릎이 지금 그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타문의 장문인에게 무릎까지 꿇을 이유야 없다. 하지만 옆에 있는 화산신룡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문제였다. 편히 앉았다가 돌아올 후환이 너무 두려웠다.
“강서 쪽에 화산의 제자를 사칭하는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허어…….”
현영이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현종은 슬쩍 현상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나 모르게 제자를 강서로 보낸 적이 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문인.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입니다.”
“흐음.”
현종은 가만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칭이라…….”
아주 없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명문의 제자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힘이 된다.
고관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줄을 대려는 사람이 넘쳐나는 것처럼, 명문의 제자라는 신분만으로도 다른 이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대접을 받기 마련이니까.
중원은 넓다.
명문파의 제자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이 넓은 중원에 뿌려 놓으면 한 줌에 불과하다. 저 먼 사천에서 소림의 제자를 사칭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림에서 그 사실을 곧바로 확인해 주기란 어렵다.
그렇다 보니 예전부터 중원에는 명문의 제자를 사칭하여 사기를 쳐 대는 이들이 가끔 나타나고는 했다.
그런 이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각 문파들은 자파의 명예를 위해 어떻게든 이를 처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신분을 속인다는 것은 애초에 사기꾼이라는 소리니, 그 사기꾼이 자파의 이름을 걸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이건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야 할 일인데……. 그런데…….
‘왜 기분이 좋아 보이시지?’
현종의 입가가 실룩거리는 걸 홍대광은 똑똑히 보았다.
심지어는 현종뿐만이 아니었다.
좌우에 있는 장로들도 뭔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운 사람처럼 얼굴을 떨었다. 특히나 현상은 아주 고개를 돌린 채로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크흐흐흐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현종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헛기침했다.
“사실이라면 이거 큰……. 크흐흐흠! 큰일……. 크흠. 그래, 큰일이구나.”
저기…… 장문인. 아까부터 자꾸 왜 그리 웃음을 못 참으시는지?
혹 자기만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나 싶어 홍대광이 의심의 눈길로 그들을 보았다. 그때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아니,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요!”
“…….”
“물론 심정은 이해해요. 사칭범이 나왔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유명해졌다는 뜻이고, 굳이 사칭할 가치가 있을 만큼 대단한 문파가 되었다는 의미니까!”
“하하, 역시 그렇지?”
“아, 좋아할 일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현종은 이제 아예 만면에 떠올라 버린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제야 사정을 이해한 홍대광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아, 그런 거였나?’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해가 되기는 했다.
여긴 화산이니까. 그래, 그 화산. 그럼 그럴 만도 했다.
“크흐흠. 그래, 어쨌든……”
수염을 두어 번 쓸어내린 현종이 고개를 돌려 현영을 바라보았다.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예. 이런 일을 내버려 두는 문파는 없습니다. 심지어 저 소림마저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뒤늦게라도 제자들을 급파하여 사기꾼 놈을 잡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혹 그놈이 살인을 저지르고 잠적이라도 해 버리는 날에는 화산이 그 오명을 모조리 뒤집어써야 합니다. 해명이야 할 수 있겠지만, 해명은 해명일 뿐. 한번 추락한 명성은 되찾기가 어렵습니다.”
현종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홍대광의 말에 현종이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광은 작게 심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다른 시기라면 사실 별로 상관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저해서는 안 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화산의 명성은 지금 천우맹의 이름과 함께 가장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리 명성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허튼 일이라도 벌어질 시에는 그 기세에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 될 겁니다.”
“으음. 과연.”
현종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영이 슬쩍 홍대광을 향해 물었다.
“분타주.”
“예, 장로님.”
“개방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찌 해결하는가?”
“……예?”
“개방에서는 이런 사칭범이 나타났을 때, 어찌 처리하는가를 물었네.”
“그, 그게…….”
홍대광이 잠깐 당혹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대다 답했다.
“개, 개방은 이런 일이 없습니다.”
“응?”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느 할 일 없는 놈이 거지새끼를 사칭합니까. 사칭도 해서 이득이 나야 사칭하는 거지…….”
“아…….”
현영의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스몄다.
“그……. 음, 미안하네.”
“……아닙니다.”
홍대광이 눈가를 훔쳤다.
개방도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분타주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아는 사람이나 알아주지,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그냥 힘 좋아 보이는 거지이자 늙은 거지일 뿐이다.
그렇다고 개방의 고위직을 사칭하자니 이는 위험도가 너무 높다. 그러니 누구도 개방도를 사칭하진 않는다.
“여하튼!”
쿵!
청명이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이 새끼 잡아야 돼요!”
“…….”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딜 사칭할 게 없어서 화산을 사칭해? 대가리에 꽃꽂이를 해 버릴라!”
“……그, 그렇게 흥분할 일은 아니잖으냐, 청명아.”
“예? 이게 흥분할 일이 아니라고요?”
엄마야. 쟤 눈 좀 봐.
살기가 번들거리는 청명의 눈빛에 현종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로 뺐다. 미친개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왜 이게 열받을 일이 아니에요! 거지꼴 나 있는 화산을! 아니, 거지꼴도 아니지! 개방 새끼들도 거들떠도 안 보던 화산을 여기까지 만든 게 누군데!”
청명아. 화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건 참 좋은 일이지만, 아무리 봐도 네가 제일 화산에 심한 쌍욕을 퍼붓고 있구나.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 보는 건 어떻겠니?
“고생은 내가 다……. 아니, 우리가 다 했는데 그걸 쏙쏙 빼 처먹겠다고? 내 밥상에다 숟가락만 얹어도 빡칠 마당에 닭다리를 뽑아 가?”
“…….”
“이런 새끼는 매화나무 거름으로 쓰는 것 말고는 다른 활용법이 없어요. 제가 가서 잡아 올게요.”
“너는 안 돼.”
“왜요!”
“악명을 쌓지 말라고 잡아 오는 건데, 네가 가면 악명이 더 쌓이잖느냐.”
“…….”
천하의 청명도 이 말에는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반만 죽여서 데리고 올게요.”
“죽여서 끌고 올 생각이었냐?!”
현종은 타는 속을 부여잡았다. 그때 현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음?”
“단순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다른 문파라면 사칭이 확실하겠으나, 화산이라면 그자가 정말 화산의 후예일 수도 있습니다.”
“아…….”
순간 스치는 생각에 현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전에 화산을 떠났던 이들과 그들의 후예를 단죄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화산을 떠난 사람들은 그들이 전부가 아니다. 현종의 윗대에도 화산을 떠난 이들이 있다.
“떠난 이들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예.”
“흐으음.”
잠깐 고민하던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런 거라 해도 어째서 화산을 찾아오지 않고, 그 먼 강서에서 화산의 후예를 자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구나.”
현종이 슬쩍 청명을 바라본다. 이상하게 잠잠한 모습에, 현종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이상하군.’
그가 아는 청명이라면, ‘떠난 놈이면 화산의 제자도 아닌데 어딜 화산의 제자를 사칭하느냐’며 길길이 날뛰어도 백 번은 날뛰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모습이 거짓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현종은 일단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래, 듣고 보니 아무래도 좌시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현영.”
“예, 장문인.”
“제자들을 보내 화산의 제자를 칭하는 자를 찾도록 하고,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거라. 필요시에는 화산으로 압송하는 것도 허락한다.”
“예, 알겠습니다. 청명이를 보낼까요?”
“……왜.”
“예?”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현영을 본 현종이 다시 말했다.
“왜 굳이?”
“…….”
“이 문파에는 제자가 저놈밖에는 없느냐! 밥상에 오르는 짠지도 아니고, 왜 이리 하루 삼시 세끼 청명이 놈만 찾아 대느냐!”
“아, 아니. 그래도 제일 확실하니까…….”
“확실하겠지! 그놈의 목숨 줄이 확실히 끊어지겠지. 안 된다! 이번에는 정말 안 돼! 분타주의 말대로 한창 화산의 명성이 오르고 있는데 저놈을 보내서 또 무슨 사고를 치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진짜요?”
불쑥 치고 들어온 목소리에 현종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청명을 바라보는 얼굴이 무척 떨떠름했다.
“……뭐가?”
“아니 그…… 눈에 흙이 들어가면 보내 주신다는 말씀이요.”
순간 현종의 얼굴이 망연해졌다.
“……아, 아니. 그냥 확인만 해 보려고요. 제가 뭐 설마 장문인 눈에 흙을 처넣기야 하겠어요? 저도 양심이 있는 인간인데.”
“청명아.”
“예?”
“……없을 것 같아서 그런다.”
“뭐가요?”
“그 양심…….”
화산의 장로들이 고개를 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홍대광의 눈시울도 덩달아 함께 붉어졌다.
오로지 청명만이 분위기를 파악 못 하고 눈을 부라렸다.
“아무튼 이번에는 저도 양보 못 해요. 제가 그 새끼 면상을 꼭! 두 눈으로 봐야겠어요!”
“……언제는 양보한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그럼 이번까지만 양보 못 한다고 할게요.”
“다음에는 양보할 거고?”
“……어?”
고민하지 마! 이 새끼야!
현종은 치미는 말들을 꾹 누르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현영아.”
“예, 장문인.”
“청명이 보내기 전에 교육 단단히 시키거라. 해서는 안 될 일들 똑바로 주지시키고, 일 터지면 말릴 애들 꼭 함께 보내라.”
“보내도 됩니까?”
“말린다고 안 가겠느냐? 보아하니 안 보내 주면 담이라도 넘을 기세구나.”
“그렇긴 하지요.”
현영이 예상했다는 듯 히죽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장문인. 언제 청명이가 나가서 사고 친 적이 있었습니까?”
“……진심이냐?”
현종이 흘겨보자 현영은 잽싸게 말을 바꿨다.
“그…… 사고야 쳤지만 항상 그 이상으로 벌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크게 벌어 올 테니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시면 됩니다. 하하핫!”
그 말을 들은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둘 다 나가.”
“…….”
“소소한테 위장약 좀 지어 오라 이르고.”
“……네.”
대충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청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자, 잠깐!”
그 순간 현종이 다급하게 그를 부여잡았다.
“왜 그러세요?”
“하나! 하나만 약속하거라! 약속해야 보내 줄 수 있다!”
“뭔데요?”
쏟아지는 당부는 다급하고 절박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자가 항렬이 높을 시에! 너보다 항렬이 더 높은 이일 시에는 패거나 반죽음으로 만들지 말고 멀쩡하게 제압해서 데리고 와야 한다! 약속할 수 있지? 응?”
“아, 그거요?”
청명의 입꼬리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맹세할게요.”
“…….”
“저보다 ‘항렬’이 높으면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게요. 절대로요. 아니면 제가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
“진짜라니까요? 맹세한다니까?”
왜일까. 이리 확실하게 맹세를 하고 있는데 왜 이리 불안할까.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에 서글프기까지 한 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