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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93화 (691/1,567)

693화. 뭘 사칭한다고? (3)

거지가 진수성찬을 먹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특히나 거지의 기준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진수성찬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구칠은 굉장히 진귀한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지의 신분으로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려진 진수성찬을 먹을 기회라는 게 그리 흔히 오는 게 아니니까.

평소였다면 환호를 지르며 밥상으로 달려들었겠지만, 지금 구칠은 음식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체한다. 반드시 체한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군침 도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그저 고문으로만 느껴졌다.

구칠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홍대광.

구칠에게 화음의 분타주인 홍대광은 자주 봐서 익숙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으니 결코 편하게 느낄 수가 없었다.

차기 개방주 후보이자 개방의 기대주로, 원래대로라면 절대 이런 작은 분타의 분타주로 머물 사람이 아니다. 까마득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아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이와 겸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아파 올 일인데…….

찹찹찹찹찹! 찹찹찹찹찹!

“……거 천천히 좀 먹어라, 화산신룡.”

“왜으이까, 컥, 숭이아 어 가여와여.”

“뭐라고?”

꿀꺽!

입 안에 든 음식을 단번에 삼켜 버린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됐으니까 술이나 더 가져와요!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세 동이나 되는데.”

“모자라!”

“……아, 알겠다.”

“고기도!”

“…….”

홍대광은 힘없이 품 안에서 전낭을 빼 들었다. 슬쩍 열어 남은 돈을 확인한 홍대광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이번 달 운영비인데.’

분타주쯤 되면 어떻게든 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니 본단에서 운영비가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본단도 거지고 그도 거진데 돈을 줘 봐야 얼마나 주겠는가?

쥐꼬리만 한 운영비를 저 망할 놈의 입에 다 붓고 나면 이번 달도 적자다.

“빨리!”

“……알겠다고!”

마지못한 홍대광이 문 밖의 거지를 불러 전낭을 통째로 넘겼다.

“가서 술이랑 고기 더 사 와라.”

“이, 이 돈을 전부요?”

“……그냥 사 와.”

거지는 홍대광과 청명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홍대광의 억장도 함께 무너졌다.

“캬! 간만에 속세 음식을 먹으니 살 것 같네.”

“화산은 음식이 잘 나오잖느냐.”

“쯧. 모르시는 말씀.”

청명이 술을 꼴깍꼴깍 들이켜고는 입가를 쓱 닦았다.

“아무리 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지만, 화산은 도가란 말씀. 자극적인 향신료나 양념은 배제하거든요.”

“…….”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먹던 것만 먹으면 질리니까.”

“……도사는 원래 그런 걸 참으며 수양하는 거 아니냐?”

“그러는 홍 아저씨는 왜 거지 주제에 전낭을 들고 다녀요? 거지는 원래 그런 거 들고 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다.”

일단 말로는 못 이긴다. 말로는.

홍대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청명이 슬쩍 구칠을 돌아보았다.

“안 먹어?”

“……으응?”

“먹어, 먹어! 먹는 게 남는 거야! 거지면 특히 든든히 먹어야지.”

“그…… 내, 내가 알아서 천천히 먹을게, 초삼아.”

조심스러운 구칠의 말에 청명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노기는 구칠이 아니라 홍대광에게 쏟아졌다.

“아니, 진짜 열받네?!”

“……왜 또…….”

“평소에 애를 얼마나 구박했으면 애가 밥도 눈치를 보고 먹어! 내가 그렇게 잘 부탁한다고 구구절절 부탁을 했구만!”

구구절절 안 했어…….

그냥 한 번 말했잖니, 화산신룡…….

“오늘 확 그냥 전각이고 움막이고 할 것 없이 다 불 질러?!”

“자, 잘 대해 줬어!”

“애가 밥을 안 먹잖아, 밥을!”

“머, 먹을게! 초삼아! 내가 먹는다니까!”

홍대광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걸 본 구칠은 황급히 입 안에 음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제야 얼굴을 푼 청명이 흐뭇하게 웃으며 구칠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많이 먹어. 여기 술도 먹고.”

“으읍! 읍!”

음식을 입 안 가득 쑤셔 넣은 구칠의 눈에서도 눈물이 배어났다.

애는 착한데.

애는 참 착한데…….

뭔가 그…… 선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그때 홍대광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웃고 있던 청명이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음식에 이 떨어지잖아!”

“오늘 아침에 감았어!”

“하, 거지가 머리도 감네. 말세야, 말세.”

“…….”

이래도 욕을 처먹고 저래도 욕을 처먹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홍대광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래서 무슨 일이냐? 웬일로 여길 찾아왔느냐? 오라고 오라고 노래를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바빴잖아요.”

“에이. 탓하는 건 아니고.”

다시 한번 술을 꼴깍대고 병을 내려놓은 청명은 홍대광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어때요?”

“…….”

홍대광의 시선이 슬쩍 구칠에게로 향했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요.”

“흠.”

홍대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크게 상관은 없겠지. 아직은 대단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우선 소림의 방장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소림으로 소집한 게 가장 큰일이겠지.”

“그 땡중 발 빠르게 움직이네.”

청명이 씨익 웃었다.

깔아 준 판이니 적당히 해 처먹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빨리 움직이는 걸 보니 법정도 애가 달긴 했던 모양이다.

“체면에 죽고 사는 양반들이니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지는 못할 테고…… 일단은 내부 단속이겠죠?”

“그럴 것이다.”

홍대광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부 단속이라고는 하지만, 구파일방 장문인들끼리 모이는 회합이 이런 식으로 벌어진 건 근 삼십 년 내에 없던 일이다. 이 자체만으로 굉장한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엉덩이에 불이 붙은 모양이네. 낄낄낄낄.”

“……화산신룡. 그렇게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저들이 모이는 이유가 천우맹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건 천우맹에게 그리 좋지 못한 소식일 수도 있다.”

“제까짓 것들이 모여 봤자죠. 서로 네가 옳니, 내가 옳니 하다가 머리채나 마주 잡고 뜯어 대겠죠. 뭐 소림 방장은 머리가 없으니 무사하겠지만.”

“…….”

청명의 말투가 장난스럽긴 했지만, 홍대광은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적이 생겼다고 해도 그간 서로 견제하던 구파일방이 단숨에 하나로 뭉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그나마 조금 더 나은 관계가 되면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구파는 됐고, 다른 쪽은 어때요?”

“일단 오대세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구파일방은 이탈이 없어서 좀 나은 편이지만, 오대세가는 이야기가 다르지. 남궁세가와 더불어 양대 중심이라 불리던 당가가 발을 빼 버린 상황이니까.”

“음.”

“물론 천우맹에 가입한다고 해서 오대세가와 반목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더냐? 더구나 이번에 당가주께서 천우맹의 문파들과 형제의 잔을 나눈 것은 그 의미가 더 특별하지. 천우맹과 오대세가가 적대할 시 천우맹의 편을 들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으니까.”

“당가주께서 큰 결심을 해 주셨죠.”

그 행동 하나가 천우맹의 존재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건 분명했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런 건 됐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그런 것이라고 표현하지 마. 인마!”

물론 홍대광은 기겁했지만 청명은 파리 쫓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주변 동향은 어때요?”

“흐음.”

홍대광이 잠깐 말을 고르며 턱을 긁었다.

“이게…… 상황이 좀 묘하다.”

“왜요?”

“봉문만 하지 않았더라면 종남이 돌풍의 핵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이 있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종남을 충동질하고 은연중에 지원하려 했겠지.”

“주변 문파들도 은근히 찔러 왔을 테고?”

“그렇지. 원래 그런 것들이니까.”

“그렇죠. 원래 그런 것들이죠.”

음식을 먹던 손을 슬쩍 늦추며 구칠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구파일방의 일원인 개방의 차기 방주 후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의 구파일방이었던 화산파의 제일검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 보면 구파일방을 숨도 쉬지 않고 때려 대고 있다. 이야기만 들으면 꼭 마두들이 대화하는 것 같았다.

그때 홍대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튼, 구파가 무당을 중심으로 화산을 압박해 올 확률이 없는 건 아니다. 종남을 제외하면 화산과 가장 가까운 문파는 무당과 소림, 그리고 공동이니까.”

“흐음.”

“그런데 의외로 지금 문제가 되는 쪽은 여기가 아니다.”

“그럼요?”

“사천.”

홍대광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한차례 망신을 당해 숨을 골라야 하는 무당, 화산과 관계가 겉으로나마 그리 나쁘지 않은 소림, 활동이 많지 않던 공동이 갑자기 연합해서 화산은 압박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사천은 다르지. 거기에는 청성과 아미가 있으니까.”

“음…….”

“점창이야 곤륜처럼 두문불출하는 문파니 잊어도 되겠지만, 사천당가는 애초에 아미나 청성과 사이가 좋지 않다. 당가가 천우맹에 가입했으니 관계는 더욱 악화될 터. 조만간 문제가 생긴다면 사천에서 터질 것이다.”

청명은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긁적였다.

“음……. 언질을 해 둬야겠네요. 그런데 당가주님이 이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말씀을 안 하셨지?”

“독왕은 아쉬운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니지. 그 정도 문제는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사람 참…….”

청명이 쓰게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말고도 혹시 문제가 되겠다 싶은 일 있으면 화산으로 바로 알려 주세요. 사소한 일이 크게 번질 수도 있으니 모조리요.”

“알겠다. 그건 걱정 말거라. 화산의 부흥이 곧 나의 부흥이 아니더냐!”

홍대광이 의욕에 가득 차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다가 문득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는데.”

“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뭔 말이에요?”

“혹시…….”

그의 눈에 의혹이 가득했다.

“화산이 남쪽 지방에서 뭔가 하는 일이 있느냐?”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아니, 혹시 화산의 제자를 남쪽에 보내 놓았나 싶어서.”

“아닌데요.”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뜬금없고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게다가 홍대광은 늘 간명하게 요점만을 전한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란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청명의 표정을 읽었는지 홍대광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이게 뭐 그리 큰일은 아닌데, 그래. 네 말처럼 작은 일이 큰일이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이야기해 두마.”

“네.”

“……강서성 쪽에 웬 신진 고수 하나가 출현해서 명성을 쌓고 있다.”

“그게 왜요?”

“끄응. 더 들어 봐. 그 신진 고수라는 놈이 꽤 이름 있는 고수들을 연파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네 말대로 강호에 그런 고수가 난데없이 등장하는 건 꽤 흔한 일이지만…….”

“네. 흔해 빠진 일이죠.”

홍대광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문제는 그 고수가 마치 꽃잎이 휘날리는 듯한 검기를 사용한다는 거다.”

“엥?”

“심지어 본인 입으로 자신이 화산파의 후예라는 말을 했다고…….”

“뭐, 씨바?”

청명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홍대광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아니, 그 새끼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대? 어디 조동아리에 화산을 함부로 올려?”

“켁! 켁켁! 아,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잖으냐! 이, 일단 이것 좀 놓고!”

“종남? 종남이냐! 종남 이 새끼들이 몰래 봉문 풀고 빠져나가서 우릴 엿 먹이려고 하는 건가?”

“케에에엑! 화산신룡! 이것 좀 놓…….”

청명이 홍대광을 대충 패대기치고는 이를 갈아붙였다. 두 눈이 새파란 불꽃을 뿜었다.

“뭐? 화산? 이 새끼가 진짜 대가리에 꽃이 폈나! 어디 감히 화산을 입에 올려? 그 새끼 지금 어디 있다고?”

“가, 강서에…….”

“강서면 내가 못 갈 줄 알고? 좀 유명해졌다 싶으니까 온갖 파리 떼가 다 꼬이네. 아저씨, 거지들 풀어서 그 새끼 추적해요!”

“……어, 어쩌려고?”

“어쩌긴!”

청명이 불을 토하는 기세로 대번에 외쳤다.

“죽여야지!”

“……그 죽이는 건 좀 심한데. 그냥 사지근맥만 끊는 게 어떠냐?”

“그거로는 아쉽죠. 아, 아니지. 사지근맥 끊고 참회동에다가 한 십 년 가둬 놓을까?”

“그 정도면 될 것 같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구칠은 멍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야속할 만큼 푸른 게,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 사람들은 마두야, 마두.’

여긴 마굴이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오늘따라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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