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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92화 (690/1,567)

692화. 뭘 사칭한다고? (2)

“쯧.”

청명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눈앞의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전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와 이곳저곳이 빠져 있고 벽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모양새가 흉가까지는 과해도 폐가라고 부르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폐가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거지새끼들에게는 궁궐이나 다름없을 곳이다.

“여하튼 요즘 것들은 배가 불러서는!”

거지가 어디 지붕이 있는 데서 잠을 자는가?

그가 한창 강호에서 활동할 때는 거적때기라도 쥔 거지는 다른 거지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는데!

이러니까 근성이, 어?!

“쯧.”

불편한 얼굴로 혀를 끌끌 찬 청명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다른 놈들 같으면 한소리 했겠지만, 청명이는 마음이 넓으니까. 꼰대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꼰대들과는!

“거지 아저씨 있어요?”

부서져 버린 문 대신 입구를 가린 천을 젖히며 전각 안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얼레?”

하지만 이내 청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보통 거지굴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모습이 있다.

대충 거적을 덮고 여기저기 드러누운 거지들과 텅텅 비어 있는 쪽박. 세상에서 제일 바쁘고도 할 일 없는 직업이 거지이니 그게 오히려 당연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거 처리했어?”

“악! 지금 제가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알아서 좀 하십시오!”

“아니, 내가 할 수 있으면 했지! 나야말로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전서구! 전서구 어쨌습니까! 누가 구워 처먹었나! 전서구가 왜 안 보여?”

“그거 아까 제가 보냈는데요?”

“뭐, 인마? 그걸 보내면 어떻게 해! 이쪽이 더 급하다고 했는데! 네가 낙양까지 뛰어갈래?”

“……죄, 죄송합니다.”

뭐야? 뭐가 이리 바빠?

전각 안에는 거지들이 말 그대로 득실거렸다.

화음에 거지가 이렇게나 많을 리는 없으니 아마 섬서에 있는 다른 거지들까지 끌고 온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거지들이 거지답지 않게,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몇몇 거지들은 다 쓰러져 가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책상 위에 서류가 하늘을 찌를 기세로 쌓여 있었고, 붓을 잡은 손은 일류고수가 검을 펼치는 속도로 맹렬히 종이 위를 누볐다.

“종횡거사가 다녀갔다고? 나는 못 봤는데!”

“제가 봤습니다! 그냥 쓰십시오!”

“패월도가 어느 쪽으로 갔다고 했지?”

“아까 두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그 양반은 하남으로 넘어갔다니까요!”

“확실해?”

“확실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합니까! 다시 확인해 볼 수도 없는데!”

“끄으으응.”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청명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애초에 고개를 돌릴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관심 좀 주지…….”

청명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도 그럴 게,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이런 무시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지 않던가.

결국 청명이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저기요!”

“아, 누구요!”

“그…… 거지 아저씨! 홍대광 아저…….”

“바쁘니까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슈!”

“…….”

세상에. 살다 살다 거지새끼한테 무시를 당하다니.

‘이런 굴욕은 처음이야.’

확실히 그와 거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청명이 화를 못 참고 막 소리를 내지르려는 찰나였다.

“어, 왔어?”

“엥?”

갑자기 반기는 듯한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던 거지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내려놓더니 빠르게 달려왔다.

“초삼아!”

초삼이란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거지를 잠깐 보던 청명은 조금 늦게야 아, 하며 알은체를 했다.

“구칠이냐?”

“사람 얼굴도 잊어버렸어?”

“아니, 그게 아니라…….”

청명이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너 많이 컸다.”

“아아. 좀 그렇지? 헤헤. 여기 와서 좀 잘 먹었더니 키가 갑자기 부쩍 크더라고.”

“그러게. 그래 보이네.”

처음 봤을 때는 볼품없이 작은 어린아이 같았는데, 이제는 꽤 장정 느낌이 난다. 그래 봐야 다 큰 거지지만.

“아저씨가 밥 잘 주나 봐.”

“화음 사람들이 인심이 워낙 좋아서 배곯을 일은 없어. 그리고 내가 너랑 친하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나한테는 고기도 챙겨 주시더라.”

사람 좋게 웃는 구칠을 보던 청명의 눈이 쭉 찢어졌다.

“그래 봐야 거지지. 자꾸 여기서 이러지 말고 화산으로 오라니까?”

“……괘, 괜찮아.”

“뭘 만날 괜찮대? 퍽이나 괜찮겠다, 거지가.”

구칠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이게 더 마음이 편해. 애초에 도관 같은 데는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거지보다야 낫지.”

“헤헤. 나는 거지가 더 잘 어울려.”

청명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하지만 구칠의 마음은 굳건했다. 그는 절대로 청명을 따라 화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화산에 가면 죽어난다던데.’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정보가 도는 곳이 바로 개방이다. 그러다 보니 개방도들은 어떤 문파가 얼마나 수련을 하는지도 웬만큼은 꿰고 있었다.

세상에 퍼져 있는 수많은 문파들 중 독보적으로 곡소리 나게 사람을 몰아친다는 소문이 파다한 게 화산이다.

‘죽어도 안 가!’

아무리 각박한 거지 생활이라 해도 화산의 도사보다는 낫단 이야기가 화음 거지들 사이에 파다하다. 그런데 구칠이 미쳤다고 화산에 오르겠는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끄응.”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구칠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에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이야기해라. 진짜 꼭이야.”

“당연하지! 우린 친구잖아. 내가 감히 아직도 너랑 친구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짜식이, 귀엽게.”

조금 우물쭈물하는 구칠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때.

“아니! 바빠 뒈지겠는데 왜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빨리 일 안 돕고!”

날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구칠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 그, 그게 아니라…….”

“구칠이 너 이 새끼 요즘 빠졌어! 예전처럼 한번 혼나 볼래?”

“아닙니다! 그게…….”

“당장 여기로 안 튀어 와?”

퉁명스런 얼굴로 꽥꽥 소리치는 거지를 본 청명의 눈에 쌍심지가 화르륵 켜졌다.

“근데 저 새끼가?”

“넌 또 누구…….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익!”

소스라치게 놀란 거지의 손에서 죽간들이 와장창 쏟아졌다.

“초, 초삼……. 아, 아니, 화산신룡!”

종팔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귀신보다 청명보다 훨씬 무섭다.

“뭐? 혼나? 이 새끼가 그때 덜 맞았나?”

“아이고오오오오!”

종팔은 그 자리에 파고들기라도 할 듯 납작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거꾸로 매달아서 껍질을 벗겨 버리려다가 불쌍해서 살려 줬더니. 뭐? 예전처럼 혼나? 에라, 이 새끼야!”

빠악!

청명이 벗어 던진 신발이 종팔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뒤통수를 감싸 쥐었던 종팔은 몇 번 굴러 대며 몸부림치다가 재빨리 일어나 다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시정하겠습니다!”

“확 마!”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바삐 움직이던 거지들의 시선이 모였다. 잠시간의 정적 후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화, 화산신룡!”

“히이이이익! 저 양반이 여긴 왜……!”

“왕초! 빨리 왕초 찾아봐!”

새파랗게 질린 거지들이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벽에 바짝 달라붙은 꼴이 호랑이라도 마주친 모양새였다.

“……저 양반들은 또 왜 저래?”

“하……. 하하하……. 하하…….”

청명이 물음에 초삼의 입에선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친구야.’

그렇게 물으면 내가 대답이 궁색하지 않겠니?

화음의 거지들은 네 소식을 워낙에 자주 들어서 성격도 잘 아니까 범보다 더 꺼린다고 솔직히 대답할 순 없잖아.

“아니…….”

“잘못했습니다!”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쇼!”

여기저기서 밥이 아닌 목숨을 구걸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청명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누가 화냈어? 왜 다들……!”

“히이이이이익!”

“일단 튀어!”

“우, 우리 뒤에는 개방이 있다!”

청명은 경기를 일으키는 거지들을 가만보다 빙그레 웃었다.

“구칠아.”

“으응?”

“……잠깐 나가 있어.”

“…….”

“나가, 뒈지기 싫으면.”

“……고, 고맙다.”

구칠이 빠져나간 뒤 전각에선 돼지 멱따는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쯧.”

잠시 후, 청명은 다소곳하게 모여 앉은 거지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모두 무릎을 꿇고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청명이 푸닥거리를 한 것치고는 나름 멀쩡한 편이다.

“거 도사가 왔는데 다들 귀신 보듯 하면 사람이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그, 그럼요. 그럼요. 저희가 잘못했습죠!”

“그렇지? 화나겠지?”

“암요! 암요! 이를 말이겠습니까?”

“그래, 내가 화…….”

“암요! 암요!”

“에라, 씨!”

청명이 신발을 벗어 던지자 거지들이 사사삭 흩어졌다가 재빨리 다시 모여들었다.

“쯧.”

거지 하나가 신발을 고이 다시 가지고 오자 청명은 그걸 받아다 신으며 심호흡했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래, 거지들에게 화를 내서 뭐 하겠는가? 달라질 것도 없는 것을?

청명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근데 뭐가 이렇게 바빠?”

그러자 거지들이 재빨리 구칠에게 눈치를 주었다.

가급적이면 저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그나마 친분이 있는……. 아니, 말을 해도 얻어맞을 확률이 적은 구칠이에게 대답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번에 천우맹 개파식 때문에 사람들이 엄청 다녀갔잖아.”

“그렇지.”

“그거 명단 다 작성해야 하거든.”

“어? 그걸 왜?”

구칠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강호에서 이름이 있는 이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이동했다, 이런 게 다 정보가 되거든.”

“그게 정보가 된다고?”

“그럼. 그런 정보를 돈 주고 사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별걸 다 팔아먹네.”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구칠의 말대로 그 사실 자체로도 정보가 되겠지만, 세력들이 어떻게 이동했는가는 강호의 판세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정보를 다루는 개방에서는 이런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주변에서 움직이는 양반들에 대한 정보를 작성하고 본단으로 보내느라 정신이 없어.”

“……일은 우리가 벌였는데 너희가 돈을 벌어먹네?”

“헤헤. 서로 돕고 사는…….”

“그럼 수수료는 내야지.”

“…….”

“뭐 이건 너랑 이야기할 건 아니고. 그래서 거지 아저씨는 어디 있는데?”

“분타주님은 지금 잠시 밖에 일을…….”

그때였다.

촤라라락!

입구의 천이 확 걷히더니 오만상을 찌푸린 홍대광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아니, 이 거지새끼들이 다 미쳤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처놀고 자빠져 있어? 다 뒈지고 싶어서 환장……. 어? 화산신룡? 언제 왔어?”

활화산처럼 솟구치던 고함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심지어는 상냥해지기까지 했다.

‘저, 씨……. 간사한 인간 같으니.’

‘우리한테도 그 반만 해 봐라! 반만!’

거지들은 홍대광이 얼마나 집요하고 끔찍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돌연 푼수처럼 헤헤 웃으며 사람을 대하는 걸 보니 복장이 뒤집어질 수밖에.

“뭐 좀 물어보러 왔는데…….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아저씨!”

“응?”

“내가 저 새끼 잘 관리해 달라고 했는데, 저 새끼가 목에 힘을 주고 다니잖아요!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저 새끼? 누구…….”

청명이 가리킨 곳을 본 홍대광의 두 눈에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그렇게 팼는데도 기가 안 죽네! 너 뭐 처맞는 데 취미 있냐, 이 새끼야!”

홍대광이 들고 있던 쪽박이 종팔의 머리에 직격하며 산산조각 났다.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풀썩.

엎어진 종팔을 몇 번 밟은 홍대광이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 가둬 두고 사흘 동안 밥 주지 마!”

“이, 일손이 모자라는데요?”

“그럼 깨워서 일시키고 사흘 동안 밥 주지 마!”

“……예.”

“쯧.”

홍대광이 얼굴을 재빨리 느슨하게 풀고는 청명을 돌아보았다.

“아. 미안하다, 화산신룡. 내가 관리를 잘했었는데 자리를 비운 동안 애새끼가 맛이 가 버린 모양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잘 관리해 보마.”

“잘 좀 하세요, 잘 좀. 아니면 내가 여기 와서 상주해 버릴 테니까.”

“……차라리 내가 지금 때려죽일까?”

“그럼 편해지잖아요. 안 돼요.”

“…….”

마귀가 꼭 지옥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 홍대광이 재빨리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빨리 뭐든 대답해 주고 이 마귀를 이 전각에서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무슨 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근데 목이 좀 깔깔한데.”

“뭐 하냐, 이 거지새끼들아! 가서 술! 술이랑 오리고기! 거기에 동파육이랑 어육탕 사 와라!”

“궁보계정도.”

“그래, 궁보계정도! 빨리!”

청명이 낄낄 웃으며 휘적휘적 안으로 향했다.

“어?”

그런데 동시에 자신의 소매가 쭉 당겨지자 구칠이 고개를 들어 청명을 보았다. 멍하니 있으니 청명이 턱짓했다.

“뭐 해? 들어와. 너도 먹어야지.”

“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 다 일하는데.”

“아, 그래?”

청명이 거지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먹지 뭐. 간만에 얼굴도 좀 보게.”

“아닙니다! 사람 하나 빠진다고 별일 안 생깁니다!”

“구칠아, 제발! 제발 가서 편히 먹어라! 부탁이다!”

“…….”

청명이 히죽 웃었다.

“들었지?”

“…….”

“가자.”

“으응…….”

친구를 잘 두면 만사가 편하다고는 하지만…….

‘이게 과연 친구를 잘 둔 걸까?’

구칠은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생각하며 미적미적 청명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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