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4)
“패군이라…….”
법정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패군이 직접 왔단 말이지?”
“예, 방장.”
법계는 슬쩍 방장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기 어려울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법정은 역시 알 수 없는 낯으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경을 외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참선에 빠지는 것은 얼핏 예의에 어긋나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법계는 이게 법정이 깊은 사유를 할 때 보이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법정은 천천히 눈을 뜨고 법계를 바라보았다.
“구파의 반응은 어떻더냐?”
“뒤숭숭합니다.”
법계가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눈빛이 침중했다.
“물론 각 문파마다 반응이 판이하긴 했습니다.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문파도 있고, 천우맹에 큰 관심을 보이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는 이 상황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겠지.”
법정이 조금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짓더니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천우맹 말씀이십니까?”
“그래.”
법계가 잠깐 고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천우맹의 존재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예. 생각보다 강력하고, 생각보다 위협적이지는 않은…….”
생각을 정리하며 몇 마디 하던 법계는 결국 고개를 내젓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모르겠습니다. 방장. 그들이 이 강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말입니다.”
법정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하다니.”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중놈이 사특한 소리를 하는구나. 저들이 강호에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무슨 대책을 세우고 말고 한단 말이냐?”
“방장……. 문제를 일으키고 나서는 늦지 않겠습니까.”
법계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법정은 그저 웃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
“천우맹의 맹주를 화산의 장문인이 맡고 있는 이상은 너와 다른 구파에서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패도를 추구하는 이가 아니다.”
법정의 말을 들은 법계는 머릿속에 현종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화산의 제자들은 분명 도사들 같지 않다. 하지만 현종에게서는 고아한 도가의 인품이 느껴졌다. 그런 이가 패도를 추구하여, 분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지.”
“……예?”
“영향력이라는 것은 내가 휘두르고 싶지 않다 하여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퍼져 나가고, 주위를 뒤흔들지.”
“무슨 의미신지…….”
“세인들은 생각보다 소문에 민감하지 않으냐.”
법정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네가 천우맹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 그곳을 방문한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터. 그 소문이 퍼져 나갈수록 천우맹이 움직이지 않으려 해도 맹에 줄을 대려는 이들의 행렬이 이어질 게 당연하겠지.”
“확실히…….”
“그렇게 누군가가 얻게 된다면 당연히 누군가는 빼앗길 수밖에 없는 법. 잃은 이들이 잠자코 침묵할 거란 기대는 들지 않는구나.”
법정은 침중한 눈으로 일렁이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말했던 장문인들의 회합은 어찌 되었느냐?”
“모두 참석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만…… 무당에서는 아직 회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거, 사람 참.”
법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허도진인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한 문파를 이끄는 이는 응당 감정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하거늘.
“결국 무당도 올 수밖에 없을 터이니, 한시라도 빨리 모두를 불러들이거라.”
“예, 방장.”
“아미타불.”
불호를 왼 법정의 눈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아직 단속할 수 있다.’
분명 이건 소림에게 있어서는 큰 기회다. 은연중에 소림을 적대시하고 은근하게 말을 무시해 온 문파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소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난 날의 실기를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 일에 영향을 받은 것이 구파와 오대세가만은 아닐진대.’
그리고 패군이라는 이름이 자꾸 걸렸다.
장일소.
나직한 불호가 다시 한번 울렸다.
“개방에 연락을 넣어 혹 평범치 않은 일이 벌어지거든 바로 연통을 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방장.”
빠르게 들려온 답변에 법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이 불기 전 날의 밤처럼 숨 막히게 고요했다.
아직은.
* * *
“이게 다 뭐야?”
청명은 산문 안쪽에 쌓인 커다란 짐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또 어디 가야 되는 거야? 개파식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누굴 어디다 팔아먹으려고!”
“……그런 거 아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현종이 가지 않아도 된다며 말리는 걸 뿌리치고 아득바득 화산 밖으로 나간 것은 청명이었다. 하지만 청명의 머릿속에서 그런 기억 따윈 이미 새까맣게 지워진 지 오래였다.
윤종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선물이란다.”
“응? 선물?”
“그래. 개파 선물.”
그러자 어느새 곁에 다가온 조걸이 고개를 갸웃했다.
“개파식이 끝났는데 이제 와 뭔 선물입니까?”
“그건 직접 화산을 방문한 이들이 가져왔던 거고, 이건 섬서의 상가들과 주변 다른 성의 상가들이 보내온 선물이라 하더구나.”
“엥?”
윤종도 적잖이 황당하다는 듯 웃어 버렸다.
“섬서에 있는 다른 중소 문파들까지 선물을 보내온 모양인데, 심지어는 이게 다가 아니야. 아침부터 선물을 지고 나르는 이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이야…….”
조걸이 감탄하며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 옆에 선 청명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안 놀라?”
“뭘?”
“이런 선물이 계속 온다니까?”
“뭐 빤한 소리를.”
청명은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는 짐들을 보다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이게 일상이었지.’
그때는 화산으로 오는 물품들을 분류할 이들을 따로 고용할 정도였다.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들과 관계를 맺고,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고관대작들의 집에 선물이 끊임없이 들어차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현영 장로님 얼굴에 또 웃음꽃이 피셨겠네요.”
“아주 창고에 터를 잡으신 것 같던데.”
“이제 좀 익숙해지실 만도 한데.”
“……그런 건 바라지도 말아라.”
윤종이 피식 웃고는 말을 돌렸다.
“대충 봤으면 준비해라. 관주님께서 청자 배와 백자 배는 인시까지 대연무장으로 집합하라 하셨다.”
“아,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집합하는 겁니까? 그동안은 오전 수련 말고는 자율로 수련했었는데.”
“검진을 익힐 모양이다.”
“검진이요?”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비동에서 나온 비급 중에 검진도 있지 않았느냐?”
“……저는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그때 나온 검진을 익힐 모양이다.”
“이제 와 갑자기 검진은 왜요?”
조걸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윤종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생각해 보거라. 이번에 우리가 대별채와 싸우면서 집단 전투를 하지 않았더냐?”
“예. 그랬었죠.”
“그때도 나름 진영을 갖추고 호흡을 맞추기는 했지만, 제대로 검진을 펼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나은 전투를 할 수 있었겠지. 운검 사숙조께서 그 전투로 느낀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아…….”
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운검 사숙조께서 한동안 모습을 거의 안 보이셨던 게…….”
“그래. 그 바쁜 와중에서도 틈틈이 검진을 해석하고 연구하셨던 모양이다. 참 대단하시지. 본인의 수련도 빼먹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어휴, 몸이 열 개도 아니고.”
조걸은 살짝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어디 가서 노력으로 빠지지야 않는 편이지만 운검은 그런 그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고 있다. 개인 수련을 등한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제자들을 가르치고, 검진을 연구하며 백매관까지 운영한다.
잠은 제대로 자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검진이 그리 좋은 거라면 저희끼리라도 먼저 배울걸 그랬네요. 다섯이면 검진을 펼치는 게 가능하잖습니까? 그랬으면 지금까지 한 고생이 좀 줄었을 텐데.”
“검진을?”
“예.”
“우리가?”
잠깐 대화가 멎었다. 묘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윤종과 조걸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뭐?”
“…….”
“왜 날 봐?”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두 사람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저 새끼랑 검진을?’
‘손발이 맞을 리가 있나.’
진을 이룬 이들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펼쳐 내는 것이 검진임을 감안할 때, 저 모난 톱니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틈만 나면 거품 물고 뛰쳐나가려 들겠지.
청명은 둘의 눈빛이 영 못마땅한 듯 뚱한 얼굴로 말했다.
“자꾸 내 탓만 하는 것 같은데, 나 없이 사형들끼리 하면 뭐가 잘 돌아갈 것 같아?”
“그건…….”
하긴 생각해 보니 이 역시 맞는 말이었다.
일단 유이설이 제대로 검진과 호흡을 맞춰 줄 것 같지가 않다.
백천은…… 노력이야 하겠지만, 분명 어느 순간 눈이 돌아가서 날뛰고 있을 테고.
조걸은…….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십니까, 사형?”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윤종이 빙그레 웃었다.
‘포기하자.’
검진은 얼어 뒈질. 여태 그런 것 없이도 잘만 싸웠다! 그럼 됐지!
“여하튼 사숙조께서는 검진을 익히는 게 옳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럼 배워야죠.”
조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너는 준비하고. 너는…….”
윤종이 뚱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너는 굳이 안 와도 될 것 같은데.”
“뭐야? 사람 차별해?”
“자, 청명아. 머릿속으로 생각해 봐라.”
“응?”
“다들 검진을 펼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앞에선 적들이 우르르 몰려와.”
“응.”
“그럼 너는 어디 있을 것 같으냐?”
“맨 앞에.”
“누구랑?”
“혼자서.”
윤종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한 모양이구나.”
“…….”
“그러니 이따 보자. 가자, 걸아.”
“예, 사형!”
저만치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청명은 피식 웃었다.
‘검진이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지금까지는 오검이 주력이 되어 싸웠지만, 앞으로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검을 들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 검진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진이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수단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제대로 검진을 펼쳐 낼 수 있게 된다면 희생을 확실히 줄일 수 있게 될 테니까.
운검이 어떤 마음으로 검진 수련을 시작했을지 짐작한 청명은 괜히 코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제는 딱히 뭘 시킬 필요가 없네.’
그동안은 어떻게든 눈치를 채게 만들거나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윗선에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스스로 다음 해야 할 일을 찾아내고 있다.
이젠 화산이 하나의 문파로서 온전히 굴러가기 시작했단 의미다.
가슴 한구석이 차오르는 느낌에 청명은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들도 물론 있었다. 쌓이는 선물의 산과 화산의 정경을 번갈아 보던 청명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이렇게 순순히만 진행될 리가 없는데.’
그가 예상하던 것보다 반발이 적었다.
천우맹이 예상보다 강해서?
‘그럴 리가.’
과거의 화산은 지금 천우맹을 구성하는 네 문파를 합친 것보다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문파와 연합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럼에도 온갖 방해와 시샘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천우맹을 저 욕심 많은 것들이 그저 방조한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
청명의 발걸음이 산문 쪽으로 바삐 향했다.
‘분명 뭔가 벌어져도 벌어진다.’
이제 수련하여 강해지는 것은 화산의 일이고, 화산에 닥쳐올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청명의 일이다.
“거지 아저씨를 만나 봐야겠네.”
청명이 경쾌한 걸음으로 산 아래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