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3)
“끄으으응.”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청명은 잠시간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야?”
아침? 이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보려 해도 쏟아지는 햇살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볕이 이불을 부드럽게 데우고 있으니 따뜻해서 다시 잠이 솔솔 쏟아…….
아, 아니! 이게 아니고!
청명이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늦잠을 잤다고?’
그가 누구던가? 바로 매화검존 청명이다.
물론 그 어떤 재능도 없이 노력만으로 매화검존이란 별호를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그만큼 막 나가진 않는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노력에도 효율이 있었던 게 맞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실력으로 바꾸기 위해 검을 처음 잡은 날로부터 게으름을 부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늦잠이라고?”
내가? 이 내가?
청명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내, 내가…….”
게으름은 죄악이고 나태함은 중죄다.
그런데 다른 놈들도 아니고 내가 늦잠을 자다니!
“끄으으으으!”
청명이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 긁어 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배때기에 기름이 차면 게을러진다더니! 새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육체의 한계를 여실히 느껴야만 했던 전쟁 중에도 지금처럼 늦잠을 자는 일이 없었는데, 몸뚱이에 힘이 그득그득 차 있는 지금 늦잠을 자?
청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해가 그냥 떠 있는 정도도 아니고, 거의 중천에 떠 있었다.
“히이이이익!”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청명은 허겁지겁 의복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상하게 꿈에 장문사형이 나온다 했다! 그 얼굴을 봤으니 일진이 좋을 리가 있나!”
- 뭐 이 새끼야?
“아니! 지금 놀아 드릴 시간 없다니까요!”
청명이 귓가에 들려오는 환청을 무시하며 옷을 마구 걸쳐 댔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씻고 나갔겠으나, 지금은 고양이 세수를 할 시간도 없었다.
“으라차!”
내력으로 몸에 묻은 먼지만 단번에 날려 버린 그는 빛살처럼 빠르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연무장에는 이미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와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대제자들마저 한쪽을 차지한 채 땀을 쏟아 가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죄, 죄책감이…….’
그 바람에 청명은 제 가슴속에도 아직 양심이라 부를 만한 것이 한 줄기쯤 남아 있다는, 경천동지할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왔어?”
“…….”
“너 어디 갔었냐?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던데.”
“…….”
“청명아. 수련 좀 작작 해라. 맨날 새벽부터 나가서 그렇게 수련해 대는데 몸이 버티겠어? 오늘은 또 얼마나 했기에 이렇게 늦게 왔어?”
“……으응?”
“쯧쯧.”
윤종이 살짝 걱정 어린 얼굴로 혀를 찼다. 그 눈빛에 담긴 안타까움을 보고 있자니 심장 어딘가를 바늘로 콕콕 찔러 대는 느낌이 들었다.
“제일 센 놈이 제일 쉬지 않고 수련을 해 대니, 남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쉬지도 못하잖아!”
조걸이 퉁명스레 말하자 이제는 옆구리까지 쑤셔 오기 시작했다.
‘아니, 왜 하필 오늘…….’
평소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삿대질을 하며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어…… 다들 일찍 나왔네?”
“음……. 보통은 네가 새벽에 수련하러 나가면 반 시진 정도 내에는 다들 수련을 하러 나와.”
“……반 시진?”
“그런 편이지.”
청명이 떨리는 눈으로 수련을 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촤아아아악!
검과 검이 충돌할 때마다 바짝 근육이 선 몸에서 땀방울이 튀어 올라 연무장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얼마나 많은 땀이 스몄는지 바닥의 색이 달라질 지경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광경을 그저 흐뭇하게만 봤겠지만, 지금은 저 땀방울이 비수처럼 날아와 자신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뒷목이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나가 죽어야지.’
사형제들은 물론이고 사숙에 사숙조들까지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을 하는데, 혼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드러누워 잠을 자다니.
- 하하! 꼴좋다!
“카악! 시끄러워!”
“응? 뭐가?”
“……아, 아니.”
청명은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다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다들 평소보다 좀 과격한 것 같은데?”
“과격하다기보다는 열심히 하는 거지. 평소보다 더.”
“으응?”
청명이 무어라 물으려던 찰나 검을 내린 백천이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후우!”
“…….”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고 있자니 이들이 지금 얼마나 진심으로 수련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겨우 행사 끝났는데 뭘 이렇게 과격하게 해?”
“그러니까다.”
“응?”
백천이 청명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천우맹도 생겼고, 화산의 위상도 과거와는 달라졌지.”
“…….”
“그러니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이들도 더욱 강해지겠지. 굳이 그 장일소와 만인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인데 상대가 강해진다면 결과야 빤한 것 아니더냐? 그러니 더 강해질 수밖에.”
백천의 말에 청명은 미묘한 시선으로 연무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지시를 하는 사람이 없다.
과거에는 운검이 악을 써야 수련했고, 나중에는 청명이 두들겨 패서 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연무장에 있는 누구 하나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모두가 제 알아서 수련을 하고 있다.
면면에 떠올라 있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뭔가 손끝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백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렇게 수련을 하는데, 우리가 네놈보다 수련을 적게 하면 평생 가도 따라잡을 일이 없잖느냐!”
그러자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던 유이설이 살기까지 감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중요하지!”
조걸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솔직히 나는 천하제일인이니, 화산제일인이니 그런 건 관심 없다!”
“…….”
“그냥 너보다 조금만 더 세지면 된다! 그래서 네 면상에다 죽빵 한 번만 꽂을 수 있으면 나는 마음 편히 등선할 수 있다!”
조걸의 말에 윤종과 백천이 적극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먹 뻗은 그대로 승천할 듯.”
“그 정도 업적이면 태상노군이 맨발로 뛰쳐나와서 맞이해 주실 것 같습니다.”
“…….”
아니, 이 새끼들이?
“백 년은 멀었어!”
“백 년이면 얼마 안 걸리네.”
“그 정도는 투자할 만하지.”
“저 새끼 한 대 치는 데 백 년이면 남는 장사지.”
“맞아.”
청명의 눈동자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이 새끼들 진심이야.’
저 눈은 절대 농담을 하는 눈이 아니다.
아니, 내가 뭔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농담이고.”
“농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반은 진담이고.”
청명이 말을 잃자 백천이 피식 웃었다.
“다들 알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
“수련을 조금 더 하는 정도, 조금 더 노력하는 정도로 크게 뭔가를 바꿀 수 있다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겠지.”
청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럼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테니까.”
“뒤통수 조심하라고!”
“처신 똑바로 해!”
삿대질을 해 대는 조걸과 그 뒤에서 같이 삿대질을 하는 당소소를 보던 청명의 얼굴은 조금 멍했다. 화산의 문하들이 수련에 매진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청명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 무작정 달려 나가면 뒤따라오는 이들이 보이지 않지. 정말 네 사제들이 너를 따라잡으려 하지 않는다 생각하느냐?
‘예전에는 어땠더라?’
그때도 연무장에는 수련을 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청명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들이 흘리는 땀이 두 눈에 똑똑히 보인다.
- 조금 늦춰 주거라.
‘사형…….’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였습니까?
“……하여튼 잔소리는…….”
“뭐, 인마?”
청명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딱히 감정이 북받친 건 아니지만,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왠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낮게 한숨을 쉬며 표정을 갈무리한 청명은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화산오검을 보았다.
“이렇게 수련해서 잘도 따라잡겠다! 잘도!”
“……근데 이 새끼가!”
백천이 이를 갈았다.
챙!
이내 그의 검이 깔끔하게 뽑혀 나온다.
“오냐!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간만에 한 수 배워 보자! 생각해 보면 너랑 대련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호오?”
청명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동룡이가 요즘 좀 이기더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네? 감히 내 앞에서 검을 뽑아!”
“내가 사숙이야, 이 새끼야!”
“사숙이니 살아 있지. 사숙 아니면 벌써 뒈졌어.”
“오냐! 오늘 아주 뒈져 보자!”
백천이 두 눈에서 불을 뿜어내고는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어어어어엇!”
“그걸로 죽겠냐!”
두 사람이 뿜어내는 검기가 순식간에 사방을 휩쓸었다.
“뭐, 뭐야!”
“미쳤나?”
갑작스레 시작된 과격한 대련에 화들짝 놀란 제자들이 검기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분분히 달아났다.
마찬가지로 뒤로 몸을 뺀 나머지 오검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살벌하네.”
“아무리 봐도 대련이 아닌데요?”
“사형제한테 저렇게 살수를 써도 되나?”
하지만 그토록 살벌하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기 속에서도 백천과 청명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오늘 내가 네 턱 갈기고 등선한다!”
“거 꿈도 크시네. 등선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카가가각!
백천의 검은 청명이 가볍게 휘두른 검에 막혀 튕겨 나갔다.
‘흠.’
손목이 살짝 시큰해 오자 청명의 입가가 씩 말려 올라갔다.
‘많이 컸네.’
과거의 그는 몰랐다. 이렇게 검을 맞댈 수 있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뒤를 좇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잃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청문의 말대로 그가 그때 사형제들을 조금 더 돌아보았다면 미래가 조금쯤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후회는 남겨도 미련은 남기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그가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
“손목에 힘 더 빼라고! 힘도 없는 게!”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백천은 아예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달려들었다. 청명이 씨익 웃었다.
‘걱정 마세요, 사형.’
이 대련을 지켜보는 다른 화산의 제자들을 흘끗 본 청명이 소리쳤다.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그의 검이 화려한 꽃을 피워 낸다.
다시 피어나는 매화였다.
“아아, 개운하다.”
청명은 한껏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살짝 땀이 맺힌 이마를 훑어 내었다.
배부른 고양이 같은 얼굴로 주위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몸 움직였더니 배고프네. 나 먼저 밥 먹으러 간다.”
“…….”
청명이 휘적휘적 저만치 걸어갔다. 발걸음이 얼마나 경쾌해 보이는지, 보는 이들이 절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청명의 등을 보던 이들이 슬쩍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바닥에 아예 나동그라진 채, 자잘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백천을 보며 모두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한 대를 못 때리네.”
“……백 년 가지고는 좀 부족할지도 모르겠는데요.”
“걸아. 사숙 의약당으로 옮겨라.”
“……넵.”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