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87화 (685/1,567)

687화.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1)

반질반질.

“…….”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대체로 기분 좋은 일이다.

물론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웃지 말아야 할 때 웃어서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사람도 간혹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누가 보아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저리 온화해 보일 수 있나? 관음보살이신 줄…….’

‘더 동글동글해 보이네.’

참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공을 쓸 때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중 하나가 되는 혜연이 평소에는 이렇게 귀엽고 동그래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핼쑥하던 얼굴에 살이 차오르고 표정 역시 더없이 밝으니 보는 사람이 다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조걸이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스님인데 고기 좀 먹었다고 사람이 저리 온화해지면 안 되는 거 아닙…….”

“어허!”

“쉿!”

“조동아리!”

연이어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에 조걸이 입을 삐쭉거렸다.

“아니…… 고기만 먹었으면 이젠 말도 안 하죠. 그런데 어제 술판에선 아주 그냥 혼자서 화산에 있는 술을 다 마셔 버릴 기세로 들이켜시던데.”

“…….”

“스님이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명색이 스님인데?”

“너는 도사가 그래도 되냐, 인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할 말이 딱히 없지만.”

조걸이 배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해서 그럽니다, 이상해서. 저는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어지럽고 메스꺼운데.”

“……사실 나도 그렇다.”

“전 툭 치면 토할 것 같습니다.”

“우욱…….”

안색이 검게 죽은 화산의 제자들은 연무장을 오가는 다른 문파 사람들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하나같이 저런 문파들만 모여서는…….”

혜연뿐만 아니라 저들 역시 기묘했다.

화산의 제자들도 나름 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 청명이 놈의 영향으로 두주불사(斗酒不辭)를 미덕으로 삼게 된 곳이 바로 화산이 아니던가?

그런데 문제는 어제 그 화산을 상대로 술을 마신 다른 문파들도 하나같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단 점이다.

우선 당가.

당가는 기본적으로 독과 암기를 다룬다. 그렇기에 필수적으로 해독에 일가견이 있다.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밥에 미량의 독을 섞어 먹는 괴이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양반들이 술 좀 마신다고 쉽게 취할 리 만무했다.

그리고 남만야수궁.

그 양반들은 굳이 이유와 논리를 따질 것도 없었다.

남만야수궁의 궁도들을 눈앞에서 본다면 누구라도 ‘아, 이 양반들은 술 서 말을 처먹고 고기 열 근은 간식으로 먹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정작 화산 사람들을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그 두 문파가 아니었다.

이 두 문파만 놓고 봐도 천하의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주당들이건만, 북해빙궁의 궁도들은 그 차원을 가뿐히 넘어섰다.

- 이게 술이라고?

- 북해에서 이런 약한 술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싱겁다고 안 마신다!

- 물 말고 술 가져오라고!

“……굉장했지.”

“간장이 철로 만들어져 있나…….”

“추운 지역일수록 독주를 마신다고 듣기는 했는데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북해빙궁의 궁도들 앞에서는 당가도 야수궁도 모조리 손을 들고 말았다.

안 그래도 좀 싸늘하고 정 없어 보이는 인상들인데, 독한 술을 사발로 퍼 마시고도 표정 하나 변하질 않으니 이는 지켜보는 이들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고 보면 설 궁주도 술이 엄청 센 거 아닙니까?”

“……그런 것 같던데? 어제 보니까 야수궁주님이랑 대작하시더라.”

“그, 그놈 순진하게 생겨 가지고는…….”

“어허! 궁주님이시다. 말조심해라.”

“……쯧. 얼마 전까지는 동생이었는데.”

조걸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여하튼 으…… 위장이 쓰려 죽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다른 문파 사람들에 비해 배는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했다.

술자리가 깊어지면서야 당가나 야수궁, 북해빙궁끼리 서로 친해져 함께 거나하게 마셔 대기는 했지만, 결국 초반에는 가장 익숙한 화산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백천 역시 끊임없이 잔에 채워지는 술을 받고 또 받다가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는 거의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놈들은 어쩌고 있느냐?”

“……싹 다 뻗었죠, 뭐.”

“…….”

“조금 전에 소소가 깨우러 갔으니 곧 올 겁니다. 대가리에 침 박히기 싫으면 일어나겠죠.”

백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무장에 모여드는 다른 문파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비틀대며 걸어오는 이들의 모습에서 힘이라고는 솜털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화산에 들 때의 모습과, 중인들 앞에서 도열하던 모습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우, 우욱!”

“에헤이! 여기 토하면 안 되지!”

“끄으……. 물. 누가 시원한 물 좀…….”

“우웨에에에에엑!”

“야, 이 빌어먹을!”

가만 지켜보던 백천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이 누렇게 뜬 이들이 비틀거리며 연무장으로 모이니 풍기는 술 냄새에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왜…….’

녹의를 입은 이들은 사천에서는 사신과도 같은 위상을 가진 이들이고, 짐승 털 조끼를 입은 이들은 남만에서는 맹수보다 더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다.

저 하얀……. 흰……. 어, 씨. 옷 좀 빨지, 저게 뭐야.

아무튼 원래는 하얬을 옷을 입은 이들은 북해에서는……. 어휴, 말을 말자.

여하튼 그런 양반들이 숙취에 절여져선 여기저기 토악질을 해 대는 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천불이 났다.

‘왜 화산에만 들면 다들 이렇게 되는 거지? 여기 터가 안 좋나?’

그때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외쳤다.

“똑바로 서라, 이놈들아! 똑바……. 우욱! 똑…바로…….”

“소,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린다.”

“어떤 놈이 여기다가 오줌을 싸 놨어! 이 미친놈이 정도껏 마셔야……. 응? 야수궁에서 데려온 개? 아……. 그럼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없어, 이 미친놈들아! 도관에 개 오줌이라니!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백천 역시 어젯밤만 해도 오고 가는 술잔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빨리 다 꺼졌으면 좋겠다.’

그래, 이게 우정의 참모습이지. 마주 보기만 해도 속이 시끄러운 게! 청명이 놈을 보면 그렇지 않던가!

“……우리 애들은?”

“저기 오네요.”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옷매무새고 나발이고 거의 벌벌 기어서 연무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천우맹을 만든 게 잘한 일일까?’

하나씩 떼어 놔도 답이 없는 것들을 한데 뭉쳐 놓은 꼴이 된 건 아닐까?

“끄으으으……. 사, 사숙……. 죽을 것 같습니…다.”

“뭐, 뭔 술을 그렇게 많이 가져와서…….”

백천은 그런 제자들을 보며 빙그레 웃고 다정히 말했다.

“얘들아.”

“예?”

“뒈지기 싫으면 저기 가서 똑바로 서라. 비틀거리는 놈은 앞으로의 인생도 비틀린다는 사실, 꼭 명심하고.”

“……눼.”

모두가 애써 자세를 다잡으며 비척비척 연무장으로 향했다. 백천은 저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왜 항상…… 이런 식일까.’

도대체 왜.

어찌어찌 도열한 천우맹의 맹도들과, 몸에서 빠져나가는 위엄을 어떻게든 붙들어 놓으려는 수장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핼쑥해진 맹소의 얼굴을 보는 야수궁도들의 심정도 무척이나 복잡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청명이 놈과 술내기를 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모습을 두 번 본다고 익숙해지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마저도 얼굴에 생기가 빠져나간 당군악을 바라보는 당가인들의 마음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터였다.

물소 떼를 전멸시킬 만큼의 극독을 먹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당군악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뭘 들이키신 거지?’

‘얼굴 푸석한 것 보소…….’

‘세상에……. 가주님이.’

물론 현종의 얼굴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청명이 놈이 멀쩡한 몰골을 유지하고 있어서 화산파 제자들은 나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지옥과도 같았던 술대전의 승리자가 누군지는 명백했다.

“서 계신다!”

“똑바로 서 계셔!”

“역시 궁주님이시다!”

북해빙궁도들은 금방이라도 설소백에게 달려들어 헹가래를 칠 기세였다.

사실 저토록 어린 궁주가 무시무시한 인간들 사이에 껴서 술을 마시고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단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울 만했다. 설소백은 정말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설소백 역시 같은 생각인지, 파리하게 죽은 얼굴로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가 묘하게 씰룩이는 것을 보며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끄응, 한 병만 더 먹이면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평소라면 곧장 타박을 했을 사람이 이 자리에 여럿이지만, 누구 하나 그를 구박할 여유가 없었다. 소리라도 잘못 질렀다가는 말이 아니라 다른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군악이 퀭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맹주……. 한 말씀 하시지요.”

그러자 단상에서 제자들을 내려다보던 현종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이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몸을 돌려 새우처럼 허리를 웅크렸다.

당군악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걸…….”

그때 맹소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이고 나발이고…… 집에 갑시다.”

“……제자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하루쯤 더 쉬어 가시는 건…….”

“여기 진동하는 술 냄새를 맡고 있으면 멀쩡하던 양반도 취하겠소.”

……모두가 맹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맹소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간다고 다시 안 볼 것도 아니고 곧 다시 보게 될 테니 괜히 시간 끌지 마십시다.”

당군악이 동의하며 끄덕였다. 그리고 본분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어제 나눈 대화들은 잊지 마십시오. 말씀드린 부분은 제가 화산파와 상의하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소. 으……. 아, 믿는다고.”

털썩.

“아이고! 소백아아아!”

“설 궁주! 정신 차리십시오!”

“소소야! 소소 어디 있느냐!”

그때 설소백이 끝내 힘을 다하고 쓰러졌다. 소란이 일자 그 틈을 타 현종은 단상 뒤쪽으로 고개를 빼고 헛구역질을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며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개판이네.”

컹! 컹컹!

아니. 진짜 개 말고 이 새끼들아! 도대체 화산에 왜 개를 끌고 와, 개를!

난장판, 아수라장, 아비규환, 목불인견…….

그 어떤 말을 갖다 대도 모두 어울렸다.

단상 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틈타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속출했다. 백천의 머릿속에서 천우맹의 미래가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여차저차, 어찌어찌 우왕좌왕한 끝에야 화산을 방문한 세 문파들도 산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올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가파르기 짝이 없는 길에 절망하며 말이다.

“그럼 다들 잘 계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건승을 기원합니다!”

“가시는 길 무탈하셔야 합니다!”

서로 좋은 말들을 주고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온기 어린 말과 훈훈한 표정과 내심은 판이했다.

‘내 다시는 화산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다음에는 절대 안 온다. 다른 놈들 보내야지.’

‘웬만하면 다신 오지 마라.’

‘힘들어 뒈지겠네.’

모두가 영업용 미소를 띤 채 매우 부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했다. 선두에 선 당군악과 맹소가 손을 흔들었고, 화산이 준 수레에 실린 설소백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힘겹게 손을 들었다.

마침내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이들을 보며 백천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들 저 몸으로 화산을 내려갈 수 있을까?”

“…….”

“절벽을 타야 될 텐데.”

조걸과 윤종, 그리고 유이설이 살짝 미묘한 시선으로 떠나는 세 문파를 보았다.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백천은 미미하게 주억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자.”

“…….”

“일단 장문인부터 처소로 모셔라. 걸이 너는 꿀물 좀 타 오고.”

“……네.”

백천의 명에 따라 조걸이 달려가고, 몇몇은 현종을 부축하러 바삐 움직였다. 백천은 한숨을 쉬었다.

‘다사다난하네…….’

컹컹!

“아, 개 놔두고 갔어! 아오, 빌어처먹을! 내가 승질이 뻗쳐서 진짜! 아아아악!”

백천의 비명이 화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천우맹이 생기고 세상이 달라지건 말건 화산은 그저 화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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