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86화 (684/1,567)

686화. 그날을 기대하지. (6)

“……천마라니…….”

무거운 정적 속에 당군악의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가?”

“당연히 알죠.”

“그는 이미 죽었네. 백 년도 전에!”

“네, 알아요.”

그의 목을 벤 사람이 다름 아닌 청명이다. 청명이 그 사실을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온다는 건가?”

청명이 슬쩍 고개를 돌려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설소백의 입을 통해 듣는 쪽이 낫다 여긴 것이다. 청명의 의도를 알아챈 설소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짝 긴장한 설소백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정 설명을 들은 당군악과 맹소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청명이 북해에서 마교와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세한 사정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천마의…… 부활이라.”

맹소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흡사 짐승의 목울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가?”

“네.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강호사에 나타난 천마는 한 놈이 아니었죠.”

“그렇지. 천마라는 말은 결국 마교의 교주이자 수장을 지칭하는 상징적 단어니까.”

“네. 그런데…….”

청명이 잠깐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쩌면 그게 그냥 단순한 호칭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말 천마가 부활을 반복해 온 건지도 모르죠.”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맹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론 청명은 그런 맹소를 이해했다. 그 역시 이렇게 부활을 겪지 못했다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가 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은 이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직접 겪은 일.

마교의 주교가 모든 것을 바쳐 치른 초혼의 의식이 실패로 돌아간 것.

그리고 무엇보다…….

- 기억해라, 화산의 제자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마(魔)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진정으로 마도천하가 열릴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마도…….

‘천마의 마지막 말.’

들을 당시에는 죽음을 앞둔 놈의 저주 따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의미심장했다.

“명확한 근거를 대라고 하면 솔직히 할 말이 없어요.”

“음…….”

“저도 제가 옳다고 확신할 수 없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 천마는 이미 부활했을 거예요. 그럼 과거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겠죠.”

당군악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끔찍한 일이 또…….’

정마대전.

마교대전.

그 전쟁을 칭하는 이름은 너무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큰 전쟁에는 명확한 호칭이 붙는다. 하지만 너무도 끔찍했던 그 전쟁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많은 이들이 언급을 피하다 보니 결국엔 중구난방으로 이름이 붙어 버렸다.

입에 올리기에도 께름칙할 만큼 끔찍한 전쟁이 다시 한번 벌어진다고?

“천마가……. 그래. 천마가 돌아온다면 그리되겠지. 애초에 마교를 전멸시킨 것도 아니었으니까. 천마를 잃은 마교도들이 그저 썰물처럼 물러나서 자취를 감췄을 뿐.”

“그 전에 화산을 한 번 불태웠고요.”

“음.”

당군악이 씁쓸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믿는 거예요?”

“물론이네.”

설득에 한참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믿지 않고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군악의 말은 의심 없이 담담했다.

“이곳의 모두가 자네를 믿고 모였다네. 우리가 자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

“…….”

“사천 사람은 쉽사리 믿음을 주지 않으나, 한번 믿음을 주면 의심하지 않네. 자네가 굳이 우리에게 거짓으로 위협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맹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

“워낙 황당한 이야기라 선뜻 믿기에야 어려웠지만…… 당가주께서 하신 말씀이 맞다. 화산신룡의 말이라면 당연히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겠지.”

설소백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북해는 당연히 믿습니다. 겪은 게 있으니까요.”

청명이 세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가 현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거라.”

청명은 어쩐지 묘한 기분에 잠겼다.

과거에 그는 지금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지금처럼 신뢰를 받지는 못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그의 강함을 맹목적으로 숭상하는 이는 나올지언정,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어 주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몸을 담고 있던 화산에서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누구보다 신중해야 할 각 문파의 수장들이 뚜렷한 근거도 없는 그의 말을 믿는다 말하고 있다.

다시 얻게 된 이 삶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여 주었기에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지, 청명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주는 신뢰가 가슴 한구석을 가득 채웠다.

“……천우맹을 만든 이유가 뭐였다고 보세요?”

청명은 살짝 떨려 나온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모두가 묵묵히 대답을 했다.

“북해에서 운남까지 이어지는 무역로, 중원 서부를 근간으로 한 영향력의 확장. 그리하여 각 문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며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거기에 기존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변되는 체제 자체를 뒤엎는 것도 있지.”

“새외오궁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천천히 말했다.

“물론이죠. 하지만…… 사실 저한테는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진짜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그의 두 눈이 굳건히 빛났다.

“살아남는 것.”

“…….”

“큰 파도가 올 거예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거대한 파도가. 홀로 버텨 내는 건 불가능해요. 서로 부둥켜안고, 밀려 나가려는 이를 잡아 주고, 이를 악물고 버텨 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러자 당군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큰 파도가…… 마교로군.”

“예.”

“장일소가 지르는 불이 될 수도 있고.”

“그렇죠.”

단호한 청명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예요. 천우맹의 존재가 오히려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을 수도 있고, 파도를 더 높게 만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이미 우리는 겪었으니까요. 현재에 자만하며 안일하게 지냈던 이들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그 전쟁의 상흔에 신음한 것은 화산뿐만이 아니다.

이곳에 네 문파들은 각기 마교에 큰 피해를 입었다.

“등을 맡길 수 있다는 건 그저 문파끼리 서로 돕는다는 의미로 한 상징적인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정말 등을 맞대고 싸워야 할 거예요.”

긴장감이 사위를 휩쓸었다.

그들은 모두 너무나 잘 알았다. 청명은 어지간해선 이런 심각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이 말에 실린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그런 각오가 필요해요”

한편 청명은 자신의 말속에 담긴 변화를 깨달았다.

사실 처음 천우맹을 구상할 때는 화산을 대신해서 피를 흘려 줄 방패막이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역시 더 이상 이 세 문파를 단순한 방패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천우맹은 말 그대로 하나의 맹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산과 그를 지켜 줄, 그리고 그가 지켜 내야 할 벗.

그때 맹소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맹을 만들어서 이익만 취하면 될 것 같았는데, 일이 조금 복잡해지는군.”

허헛 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린 그는 이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자네가 생각하는 시기는 언제지?”

“몇 년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당장 내일일지도 모르죠.”

“몇 년……. 아니, 며칠 내일지도 모른다…….”

가만 되뇌며 생각을 정리한 맹소는 명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단 하나뿐이군.”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먼 미래를 보고 맹을 운영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오. 그건 맹주와 당가주의 역할이지. 내가 해야 할 건 하나. 그 커다란 파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야수궁이 해야 할 게 뭐냐는 거지.”

“으음.”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야수궁의 전력을 강화하는 데에 전념하겠소. 일단은 야수궁이 강해지는 게 우선이니까.”

어쩌면 조금 이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맹소의 말은 청명마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과거의 반복이 될 뿐이오. 과거 남만야수궁은 화산과 매화검존께 구원을 받았소! 그러니 이번에는!”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현종과 청명을 바라보았다.

“야수궁이 화산을 지킬 것이오.”

청명은 말없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해 온 것들이, 화산이 지켰던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해빙궁도 마찬가지입니다.”

“…….”

설소백이 의지견정한 얼굴로 말했다.

“북해빙궁은 감히 화산을 지킨다는 말은 하기 어렵습니다. 저희의 전력이 그만큼 대단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압니다. 하지만…….”

아이의 것이라기엔 무척 단단하고 올곧은 눈빛이었다.

“빙궁은 가장 앞서 싸울 것이며, 가장 마지막에 후퇴할 것입니다. 적어도 의기만은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듣고 있던 현종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키는 게 아니지요.”

“…….”

“함께 싸우는 겁니다. 형제란 그런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군요.”

당군악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무작정 수련을 반복할 게 아니라,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각 문파간의 연계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또한…….”

맹소가 말을 덧붙였다.

“머릿수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추가적으로 천우맹에 입맹 할 곳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아이고! 뭘 그리 멀리서 찾으십니까! 여기! 녹림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 임소병을 힐끗 본 맹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신뢰할 수 있는 곳으로 말이오.”

“저를 보시면 딱 신뢰가…….”

“도적놈은 조용히 하고.”

“……네.”

시무룩해진 임소병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맹소가 조금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할 거요.”

“예?”

“만약 마교의 침공이라는 끔찍한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이번엔 지난 전쟁보다 몇 배는 혹독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오. 과거에는 매화검존께서 천마를 막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이가 없소.”

“…….”

“만약 천마가 과거의 무위 그대로 돌아온다면…… 어쩌면 우리는 승산 없는 싸움을 해야 될지도 모르오. 그는 천마니까.”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금제일마.

인간이되 인간을 넘어선 자.

그의 이름은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화인처럼 새겨져 있다. 그 이름 앞에 어찌 태평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때 청명이 담담히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막았죠.”

“음?”

“그러니 이번에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한 천우맹이니까요.”

그 말에 맹소는 슬쩍 미소 지었다.

‘화산이라…….’

과거, 야수궁은 화산의 매화검존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어쩐지 이 작은 화산의 검수에게 구원을 받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명심하셔야 돼요. 함께 죽는 형제 같은 건 의미가 없어요. 함께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죠.”

“…….”

그냥 의지를 북돋우려는 말이라 하기엔 이상하리만치 무게가 실린 듯한 말이었다. 모두가 청명의 말에 집중했다.

청명은 앞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남자고요.”

당군악이 웃으며 그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맹소 역시 지체 없이 그 위로 자신의 두툼한 손을 올렸다.

설소백의 아직 작은 조막손이 올라왔고, 그 위로 현종의 주름진 손이 얹혔다.

슬쩍 눈치를 보던 임소병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아래로 쑥 집어넣어 청명의 아래에 붙였다.

“함께 죽지 않고.”

“함께 살아남는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드시!”

오랜 준비와 소통 끝에, 마침내 천우맹이 그 진의를 찾고 서로를 의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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