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85화 (683/1,567)

685화. 그날을 기대하지. (5)

“흐음.”

야수궁주 맹소는 팔짱을 낀 채 굳은 얼굴로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이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자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들 나름의 사람을 보는 방법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비슷한 느낌의 짐승을 떠올리곤 하지.”

당군악은 예전에 청명과 셋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흥미로운 눈치로 맹소를 보았다.

“그러셨지요. 저를 처음 보았을 때는 흑표가 떠오른다 하셨던가요?”

“그렇소. 아, 그리고 커다란 구렁이도 떠오르지.”

“호오.”

맹소가 당군악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보통 뱀이란 으레 독을 품어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뱀은 밟기만 해도 이를 세우는 반면 커다란 구렁이는 좀처럼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소. 툭툭 치거나 들어도 귀찮다는 듯 자리를 피하지.”

당군악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현종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렇게 무심하던 뱀이 사냥을 할 때가 되면 다른 짐승들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민첩하게 먹잇감을 낚아채 통째로 집어삼키오. 그리고 한번 배가 부르면 몇 달이고 사냥하지 않고 느긋해지지.”

당군악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과연, 여전하십니다. 그럼 맹주를 볼 때는 어땠습니까?”

“커다란 들소 같았소. 우두머리 들소.”

이건 굳이 부연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맹소식의 판별이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당군악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는 화산신룡이 구렁이 같다고 하지 않으셨소?”

“……사나운 족제비.”

“…….”

묘하게 전보다 등급이 낮아진 듯한 표현에 당군악이 쓰게 웃고 말았다.

“그도 일리가…….”

“족제비. 사나운 족제비. 커다란 아주 커다란…… 집채만 한 족제비.”

“…….”

“발톱에는 독이 묻어 있고 독기를 품어 사시사철 으르렁대는…….”

“거기까지.”

더 안 들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족제비가 보기와는 달리 엄청나게 사나운 동물이라는 점에서부터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맹소의 웃음이 조금 씁쓸해졌다.

“한데, 이번에 패군을 볼 때는 말이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맹소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맹소가 장일소를 보며 대체 어떤 동물을 떠올렸는지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그자가 두렵소이다.”

조금 의외인 맹소의 말에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맹소의 덩치는 태산과도 같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약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군악과 현종은 이미 맹소의 사람 됨됨이를 어느 정도 짐작했고, 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무척 솔직한 사람이고, 허세를 부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 들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저 커다란 덩치 때문에 우둔하게 보일 뿐, 굉장히 냉철하고 영민한 사람이다.

“장일소는 어찌 보면 흉포한 범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교활한 여우 같기도 하오. 맹독을 품은 독사 같으면서, 때로는 뙤약볕에 일광욕을 하는 거대한 코끼리 같기도 하단 말이지.”

맹소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공작 같으면서도, 물속에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악어 같기도 하고…….”

그때 진지하게 듣고 있던 청명이 슬쩍 임소병에게 물었다.

“악어가 뭔데?”

“……지금 저한테 그런 걸 묻고 싶으십니까?”

“몰라?”

“예.”

“모르면 끝나?”

“…….”

임소병은 이제 얼굴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무어라 크게 항변하려는 찰나 현종이 도끼눈을 뜨고 획 청명을 노려보았다. 이에 찔끔한 청명이 목을 움츠리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뭐가 말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면서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걸 보면 오히려 너무 많은 게 보인 거 아닌가요?”

맹소는 고개를 저었다.

“부분은 보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어느 짐승과도 맞아떨어지지 않았어. 짐승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너무 극명하게 두드러졌으니까.”

“그게 뭐죠?”

“욕망.”

맹소의 말을 들은 이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짐승이라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야. 때로는 과도하게 사냥하기도 하고, 약한 것을 놀잇감으로 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법과 도가 없으니 잔혹한 짓을 하기도 하지.”

“신랄하네요.”

“그게 사실이니까.”

맹소는 담담했다. 야수궁은 대대로 동물을 친구처럼 여기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승을 숭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짐승도 인간만큼 탐욕을 부리지는 않지. 그 장일소에게서는 규모가 짐작도 안 갈 만큼 커다란 탐욕이 느껴졌다. 괴이할 정도로 말이야. 탐욕의 화신이라는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이는 처음 봤다.”

그 말에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한 것뿐이지만, 확실히 장일소는 범상치 않았다.

“탐욕의 화신이라…….”

당군악이 턱을 쓸어내렸다. 얼굴엔 표정이랄 게 딱히 없었지만,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복잡한 기분을 모두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저는 장일소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만…….”

운을 뗀 당군악의 입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생각하는 장일소의 껄끄러운 부분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예측이라 하셨소?”

“예.”

당군악은 예전에 만인방으로 찾아가 만났던 장일소의 모습과 이번 만남을 떠올려 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람은 누구든 경향이라는 걸 지닙니다. 이를 파악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인물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예측할 수 있지요.”

“음……. 그렇지요.”

“하지만 장일소는 그게 불가능합니다.”

당군악이 어둑어둑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 만남에서도, 그리고 이번에 그가 화산에 발을 들였을 때도 느낀 거지만…… 장일소의 행동은 예측이 불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산을 떠난 그가 이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지요.”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실로 껄끄러웠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이곳에 모인 이들의 가슴을 휩쓸었지만, 그중 가장 중점적인 감정은 분명 껄끄러움이었다.

장일소에게는 사람의 신경을 긁어 대는 무언가가 있었다. 각 파의 수장들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무언가가.

“우선 그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이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도 파악해야겠지요.”

당군악의 말이 끝나자 중인들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지금 그 말에 어느 정도 답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을 테니까.

임소병은 얼굴을 느리게 문질렀다.

그래도 열심히 추궁과혈을 한 보람이 있는지,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부어터진 만두 같던 얼굴이 웬만큼 제 모양을 되찾았다.

“왜 지금이라…….”

가만히 되뇌던 임소병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입장의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여쭤도 되겠소?”

“음…….”

임소병은 잠깐 말을 고르는 듯 고민하다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만인방과 녹림 사이에는 기나긴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건 그저 겉으로 보이는 관계였을 뿐입니다. 만인방도 녹림도 서로를 완전히 집어삼킬 생각 따위는 없었습니다. 녹림은 그저 내부 단속을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했고, 만인방 역시 대적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지요.”

“어째서요?”

임소병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만일 만인방이 녹림을 무너뜨리고 병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신주오패의 균형이 무너지겠지.”

“그럼 누가 움직이겠습니까.”

가만 듣던 현종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군.”

“예. 바로 그렇습니다.”

장일소를 완전히 파악하고 짐작하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하겠으나, 어쨌든 임소병은 그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이 가능했다.

“잔잔한 호수는 작은 조약돌 하나만 떨어져도 큰 파문이 일기 마련입니다. 사파의 세상과 정파의 세상이 다르다고는 하나, 만인방은 서로 엮이지 않고 살기엔 너무 크고 강해졌습니다. 여기서 더 세력을 확장한다면 반드시 그들의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지요.”

“한데…… 그런 상황에 천우맹이 생겼다?”

“예.”

임소병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마 세상에서 천우맹의 개파를 가장 반기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장일소일 겁니다. 고요한 숲에 불을 지르면 바로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불타는 숲에 불을 지른다고 해서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습니까?”

“…….”

“영웅이든 효웅이든 결국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임소병이 차디찬 눈으로 딱 잘라 말했다.

“난세에 태어나지 못한 효웅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저 썩어 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양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장일소 같은 이에게는 실로 끔찍하겠지요.”

“흥.”

임소병의 귓가에 낮은 코웃음 소리가 스쳤다. 청명이었다.

녹림왕이 말을 하는 와중에 코웃음을 친다는 것은 평소 둘의 관계를 고려한다 해도 무례한 짓이었다. 하지만…….

“……난세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이어진 조소 어린 말에 실린 어둠을 느낀 이들은 그 무례를 탓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크흠.”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임소병은 짧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장일소의 목적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을 겁니다. 불을 더 크게 지르는 거지요. 그리고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그가, 그리고 만인방이 미쳐 날뛰어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

“…….”

“그 수단까지는 제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흐음.”

당군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맹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이 천우맹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단 의미로군.”

“예. 일단 제 판단은 그렇습니다.”

“혼란. 혼란이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니, 거의 틀리지 않은 말일 것이다. 장일소가 화산을 방문한 명확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게 가장 큰 고심거리였는데, 그저 혼란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확실히 그의 행동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면…….”

“예.”

임소병은 당군악이 할 말을 미리 알아채고 답했다.

“뭔가를 더 할 겁니다. 반드시.”

“…….”

“혼란을 더 가중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무언가를 하려 들 것입니다. 장일소라면 말이지요.”

“으음.”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당군악이 청명을 힐끗 보았다.

‘이상하군.’

평소라면 대화가 여기까지 진척되기도 전에 벌써 몇 번이나 고함을 지르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할 만큼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다른 이라면 모인 이들의 면면을 고려하여 침묵하겠거니 여기겠으나, 청명이 어디 그럴 인사던가?

“화산신룡.”

“네?”

“어찌 생각하는가?”

“흐으으음.”

결국 당군악이 넌지시 묻자 청명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그 장일소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음?”

“뭐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

“지금 나눈 대화에 답이 다 나와 있네요. 그놈은 천우맹이 필요하다는 뜻이잖아요.”

“응?”

“혼란이 필요하다. 그 말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사파 쪽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 필요하다는 것 아니에요?”

“……그렇겠지.”

“그럼 그놈은 적어도 한동안은 천우맹을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놈의 입장에서는 천우맹이 클수록 자기 목적을 이루기가 쉬워지니까. 그럼 된 거죠.”

“…….”

순간 맥이 살짝 풀린 당군악은 청명을 멍하니 보았다.

이 어린 도사는 한 번씩 너무 당연하게 핵심을 짚어 낸다. 모호한 안개에 휩싸여 알아채기 힘들 만한 핵심을 말이다.

임소병이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네?”

눈빛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한 번씩 화산신룡께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숨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당분간은 장일소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

“아니면 정말 신경 쓰이시는 게 따로 있는 겁니까?”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임소병뿐만이 아니었다. 추궁하듯 쏟아지는 눈빛에 청명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제 이야기할 때도 됐죠.”

청명이 모두를 한차례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천마가 올 거예요.”

그의 표정도 말투도, 목소리도 모두 지나치게 담담했다. 마치 이미 정해진 사실을 말하는 듯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천마?”

당군악이 조금 넋을 놓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아직은 제 생각이지만, 거의 확실해요. 천마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어지간한 일로는 흥분조차 하지 않는, 그 당군악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맹소의 손도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천마라는 이름이 강호인들에게 아직 얼마나 큰 화인으로 남아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듯했다.

청명은 마치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그때는 알게 되겠죠.”

“…….”

“진짜 혼란이 뭔지. 진짜 난세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