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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84화 (682/1,567)

684화. 그날을 기대하지. (4)

“뭐? 몰라?”

“…….”

“아무도 몰라?”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위기라는 것을 겪기 마련이다.

물론 임소병은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자잘한 위기 따윈 수도 없이 넘겼고, 목숨의 위기도 몇 번이고 뛰어넘어 왔다.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겪어 온 어떤 위기보다 지금 이 상황이 열댓 배는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

“하……. 하하하…….”

임소병은 최대한 밝게 웃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움츠러든 근육은 그가 원하는 만큼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진정?”

청명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번들거리는 살기를 보고 있으니, 이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본적으로 도사는 승려와 다르다.

중원의 불교는 중인들을 구제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도인의 목적은 양생이다. 그렇기에 중들은 절간에 틀어박혀서도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지 않는 반면, 도인들은 심산유곡에 처박혀 도를 갈고닦아 마침내는 등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도인들은 굳이 애민정신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기본적인 목표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도인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높은 도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도인들도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을 좋은 마음으로 대하려 애쓰게 된다.

그런데…….

‘뭔 놈의 살기가…….’

살다 살다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괴팍한 살기가 사파의 마두도 아닌, 도사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지, 해석할 일이 아니지!’

해석이 끝나기도 전에 목에 매화 검이 박히거나, 주둥이에 매화파열권이 처박힐 판인데.

“도, 도장 제, 제발 진정 좀 하시고…….”

“……진정. 그래, 진정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그, 그렇…….”

청명이 살기 번들대는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눈앞에 있는 쥐새끼 모가지만 부러뜨려 버려도 내가 속이 편해지고 진정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하다못해 그 잘난 얼굴을 두 배쯤 빵빵하게 만들어 주거나!”

“……그럼 주거요…….”

“죽으라고 치는 건데 죽어야지!”

청명은 임소병의 멱살을 움켜잡고 격하게 흔들어 댔다.

“뭐? 아무도 못 알아봐? 그럼 장일손지 나발인지 하는 새끼 눈에는 귀신이라도 붙었어? 어?”

“…….”

이건 억울하다. 지나치게 억울했다.

숱하게 있는 세상의 귀재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머리를 맞대 보라고 했어도 그중 장일소가 화산에 들이닥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멀쩡한 놈이 벌이는 일을 예상하지 못하는 건 실수이자 실책이지만, 미친놈이 미친 짓 할 걸 예상하지 못한 게 죄는 아니잖은가?

그렇기에 임소병은 나름 떳떳했다.

다만, 아주 작은 문제 하나가 있다면……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놈은 논리가 통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헤헤. 도장……. 살다 보면 가끔 예측 못 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헤헤. 그래서 세상이 재밌는…….”

빠아아아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명의 주먹이 임소병의 턱을 깔끔하게 돌려 버렸다.

“꺄아아악!”

죽빵을 얻어맞은 임소병이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구르다 구석에 처박힌 임소병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그래도 제가 명색이 녹림왕인데…….”

“녹림왕이니까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본 모양이지? 내가 계급장 떼고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줘?”

“……아니요.”

그건 절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죽어, 죽어! 아니! 지금 죽을 게 아니라 진즉에 죽었어야지! 왜 살아서 사고를 쳐!”

“그…… 도장께서 살려 주신 건데요.”

“오냐! 내가 살린 목숨 내가 거둬 간다! 모가지 딱 빼라!”

“히이이이이익!”

임소병이 기겁을 하며 몸을 뒤집고 빠르게 기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가 주저앉아 있던 곳에 청명의 암매검이 날아와 깊숙이 박혔다.

“지, 진짜 죽일 셈입니까?!”

“가짜로 죽는 것도 있어?”

“도장! 이건 오해입니다!”

“오해?”

청명의 눈이 뒤집히는 걸 보며 임소병이 재빠르게 부연했다.

“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패군 장일소는 보통 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없었다 해도 분명히 다른 놈을 준비해 뒀을 겁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

“헤헤. 그러니까 지금 이 사태가 꼭 저 때문에 벌어진 건 아니라는 거지요…….”

“호오. 그래?”

청명이 히죽히죽 웃었다.

“응?”

“어?”

그 웃음에 임소병과 오검의 얼굴이 일제히 불안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청명은 벼락같이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흡사 귀신 같은 얼굴에 백천을 비롯한 오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명을 향해 내달렸다.

“청명아아아아아악!”

“진정해라, 진정!”

물론 정파 놈이 사파의 거두를 죽이는 거야 칭찬받을 일이지만, 지금 청명이 놈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냥 두었다가는 정말로 대참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직감한 백천은 아예 청명의 다리를 움켜잡고 매달렸다. 나머지 오검도 필사적으로 청명의 사지를 하나씩 잡고 매달렸다.

“안 놔? 놔! 아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진짜! 저 주둥이 확 그냥!”

하지만 청명의 분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게거품을 물고 핏대 선 목을 쭉 뺀 꼴이 얼마나 사납고 흉흉한지, 금방이라도 목이 몸뚱이를 이탈해서 임소병을 물어뜯기라도 할 기세였다.

“노, 녹림왕이시라니까!”

“녹림왕이니까 이러는 거라고! 내 말 못 들었어? 저 인간이 녹림왕이 아니었으면……. 아니, 그래도 죽였겠지만! 녹림왕이면 더 죽어야지!”

윤종은 일단 청명을 가라앉히는 데에 집중했다.

“그래도 이, 일단은 진정하고 말로 하자. 따지고 보면 녹림왕의 잘못도 아니잖으냐?”

“뭐?”

그러자 청명의 고개가 윤종에게로 획 돌아갔다.

“사형.”

“으, 으응?”

“나도 알아.”

청명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슬쩍 느슨하게 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일소 같은 놈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저 인간의 말대로 거기에 있는 사람 중에 비슷한 역할을 해 줄 놈이 하나는 있었을 거야. 제 발로 왔든, 아니면 장일소 놈이 보내 놨든.”

“그, 그렇지.”

“게다가 그 장일소 놈이 저 인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 내 말이 그거다!”

물론 임소병이 사고를 친 것은 사실이지만, 따져 보면 그에게도 억울한 면은 있었다. 그런 부분을 제대로 살피고 냉철하게 따지는 것이 도인의 본분…….

“하, 지, 만!”

청명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사정이고 나발이고 빡치는 건 빡치는 거지!”

“…….”

“내가 그 사정까지 이해해 줄 거면, 저쪽도 내 사정을 이해해야지! 나는 그 많은 걸 다 고려하는데 저쪽은 왜 내가 빡치는 걸 고려 못 해! 내 마음도 이해를 해 줘야 할 것 아냐!”

공자님도 이쯤 되면 차라리 박수를 칠 논리였다. 하지만 논리야 어떻게 되었든 오검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끄으응.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아니, 죄를 짓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이 꼴까지 봐야 하나.”

청명이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임소병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뗐다.

“그…… 꼭 그렇게 화를 내실 일만은 아닙니다, 청명 도장.”

“……응?”

“물론 상황이 좀 애매해진 것은 맞지만, 그 이상으로 좋은 효과도 있었으니까요.”

“무슨 좋은 효과?”

“하핫!”

청명이 관심을 보이니 임소병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어깨를 쫙 폈다.

“적어도 그 장일소 놈이 입을 털어 준 덕분에 이곳에 온 이들이 다들 화산, 그러니까 천우맹과 녹림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지 않습니까?”

“……그렇지.”

“후후후. 그러니 잘된 일이지요.”

그는 양손을 허리에 대고 선언하듯 말한다.

“이제 더는 천우맹과 녹림와 관계를 어떻게 곱게 설명해 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겁니다. 이제 저들이 알아서 잘 생각하겠지요. 귀찮음을 하나 덜었으니, 공식적으로 녹림을 천우맹에 입맹시키고 형제가 되었음을…….”

파아아아아앗!

청명의 몸이 빛살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 오검 중 누구도 차마 그런 그를 잡지 못했다.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차라리 죽어어어어!”

“악! 아아아아악! 아악! 누가 말려……. 아아아아아아아악!”

임소병 위에 올라탄 청명의 허리가 차지게 획획 돌아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 광경에, 오검들은 모두 흐뭇하게 웃었다.

“잘 패네.”

“어허, 시원하다.”

“저도 가서 좀 거들어도 됩니까?”

“……그건 좀 참자꾸나.”

“예.”

세상에는 매를 버는 인간도 있다.

* * *

“…….”

현종은 아연한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손님들도 다 돌아갔고, 이제 남은 것은 천우맹뿐이었다. 뒷일에 대해 논의도 해야 하는 참에 당군악의 제안으로 녹림왕과 청명을 함께 불러들였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온 임소병의 얼굴이 뭔가 좀, 아니……. 많이 이상하다.

“그…….”

현종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천천히 청명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내가 패기는 했는데, 팰 만해서 팼고, 녹림왕이 아니었으면 패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회를 쳐 버렸을 것이다!’라는 뜻을 얼굴로 똑똑히 전하고 있는 청명을 보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도 녹림왕인데…….’

아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우리 제자 놈이 열받는다고 녹림왕을 두들겨 패서 얼굴을 퉁퉁 불은 만두로 만들어 놓았다고 어딜 가서 말해도 누구 하나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오히려 다행…….

“크흠.”

현종은 헛기침을 하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하필 시선이 옮겨 간 곳에 웃음 참느라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당군악이 있어서 재빨리 반대쪽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그…… 음, 그래.”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큰 문제 없이 행사를 마무리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현종의 차분한 말에 맹소가 참다못해 말했다.

“……녹림왕이 얻어맞은 것 같은데. 많이.”

“여하튼 큰 문제 없이요.”

“…….”

천하의 맹소가 할 말을 잃고 청명과 임소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거…… 중원에서의 문제는 내 기준과는 좀 다른 것 같군.”

“제 생각도요.”

양궁의 궁주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임소병은 그저 말없이 눈가를 훔쳤다.

“우냐?”

“……아닙니다.”

“그래. 아직 눈물이 나오는 걸 보니까 그렇게 슬픈 게 아니야. 어디 계속해 봐. 내가 진정한 슬픔이 뭔지 알려 줄 테니까.”

“…….”

청명이 뿜어내는 패기에 모든 수장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크흠.”

현종은 다시 한번 크게 헛기침하며 노련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지금은 만신창이가 된 임소병을 위해서라도 다른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은 것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웃음이 진정되고 평소처럼 진중한 얼굴이었다.

“개파가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된 것은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이야 제자들이 했지. 우리가 뭔 고생을 했소.”

“그도 맞는 말입니다만.”

맹소의 직설적인 화법에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개파를 선언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천하만민에게 천우맹의 개파를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으음.”

다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맹이 어떤 목적으로 생겨났는지 제대로 잘 전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당군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사뭇 날카로워지는 그 눈빛에 모두가 그다음 나올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만인방과 장일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장일소의 이름이 나오자 방 안에 일순 긴장이 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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