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화. 그날을 기대하지. (3)
“그럼 귀맹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언제고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맹주님!”
“가주님께서도 강녕하십시오!”
산문에 선 현종이 화산을 나서는 이들을 일일이 전별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산오검은 반쯤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끝났네.”
“……이제야 끝났네요.”
“뒈지는 줄 알았네, 진짜…….”
그들의 얼굴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로가 주렁주렁했다.
“차라리 적이랑 싸우는 게 낫지……. 사람 상대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청명이라도 없었으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일단 그 새끼는 멀리 내보내 놓고 진행하죠.”
“……머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가슴이 격렬히 동의하는구나.”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 수명이 제법 깎여 나간 듯했다.
조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 미친놈만 안 왔어도 이렇게 진이 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내 말이!”
장일소를 떠올린 그들은 모두 얼굴을 굳혔다. 일순 찾아온 정적을 깨며 백천이 나직이 뇌까렸다.
“……패군이라…….”
장일소의 첫인상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패군이라는 별호와 만인방의 방주라는 무게감에 걸맞지 않은 복장과 치장이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장일소가 화산에 머무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일다경이라 불러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짧은 시간 만에 화산의 제자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화인을 남겼다.
그 증거로, 그가 떠날 때쯤에는 누구도 그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일소는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한 적들과는 분명 뭔가 달랐다.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실 강함으로 따지자면 마교의 주교가 몇 배는 인상적이었는데.”
“예, 확실히.”
장일소와 주교 중 누가 더 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수준으로는 장일소 정도 되는 이의 무위를 보는 것만으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자에게는 무위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느꼈다.”
윤종의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히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괴물이라…….’
청명은 장일소를 괴물이라 평했다.
보통 강호에서 괴물이니 천재니 하는 수식어는 그 사람의 무위와 재능을 논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명은 무위를 두고 말한 게 아닌 듯했다.
‘장일소라는 인간 자체가 괴물이라는 의미겠지.’
이건 어찌 보면 더없는 찬사다.
그리고 백천도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먼발치에서나마 구파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 가주들, 맹소 같은 새외의 절대자들을 눈으로 봐 왔다. 하지만 장일소처럼 존재감만으로 그를 짓누른 이는 없었다.
백천이 입술을 살짝 짓깨물었다. 그때, 윤종이 슬쩍 말을 보탰다.
“장일소만이 아닙니다, 사숙.”
“음?”
“그 뒤를 따르던 붉은 옷을 입은 만인방 놈들도 무시무시했습니다.”
그 말에 백천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홍포를 입은 만인방의 무사들.
장일소라는 말도 안 되는 거물의 존재감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던 기세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강하다.’
새삼 만인방이라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은 만인방의 무력대와 싸워 이겼다. 그러니 지금 당장 붙는다면 이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장일소와 만인방도들을 직면하고 나니 그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본 만인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거로군.”
“……예.”
“그리고.”
백천이 씹어뱉듯 말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고.”
“…….”
무당과의 비무 이후 청명이 녀석이 말했었다. 명성이 높아지고 화산이 세상에 인정받을수록 상대해야 할 이들은 더욱 강해지고 무서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젠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음?”
그때 가만있던 조걸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엔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활기가 실려 있어서 더욱 귀를 확 잡아끌었다.
백천이 바라보자 조걸이 씩 웃었다.
“꼭 우리끼리만 상대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
백천은 대답 대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저쪽에서 도열하여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 그리고 사천당가의 식솔들이 보였다.
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
“만인방이 대단하기야 하죠. 그런데 그렇다고 혼자 천우맹을 상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수틀리면 단체로 몰려가서 밟아 버리면 되죠!”
“…….”
“뭐 애초에 그 새끼들 여기저기 원한도 많이 샀던데 몰려가서 팬다고 누가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그동안 화산이 쪽수가 딸려서 당했던 설움을 그대로 갚아 주면 됩니다!”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는 왜 인성이 날이 갈수록 청명이를 닮아 가는가.’
혹시 나도? 에이……. 설마…….
백천은 끔찍한 생각을 털어 내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윤종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새삼…… 소림이나 무당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냐?”
“그들은 지금껏 만인방 같은 곳을 항상 상대해 왔다는 거잖습니까.”
생각지 못했던 말에 백천은 한 대 얻어맞은 듯 입을 다물었다. 윤종이 말을 이었다.
“소림은 비무대회 때 봤고, 무당은 직접 상대하기까지 했지만…… 솔직히 그들에게서는 만인방만 한 위압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소림이나 무당이 만인방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그만한 적대감을 품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백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소림이나 무당이라면 만인방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당과 비무를 할 때는 결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어쩌면 장일소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정말 윤종의 말대로 그들이 완전한 적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우맹이 개파 한 이상 언젠가는 무당이나 소림도 화산의 적이 될지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새삼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그 소림이 적이 된다니……. 소림…….
“어?”
문득 스친 생각에 백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혜, 혜연! 혜연 스님은? 스님은 어디 계시냐?”
“예?”
“행사 시작되고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누구 혜연 스님 본 사람 있느냐?”
“어?”
“그러고 보니……?”
모두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볼 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 제가 한번 찾아보겠…….”
“……여기 있습니다, 시주.”
“히익!”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걸이 기겁하며 몸을 획 돌렸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혜연이 반장을 하고 있었다.
“스, 스님!”
“아, 아니, 스님. 왜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모두의 격한 반응 속에, 혜연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오늘따라 더 유난스레 반짝이는 머리를 보던 오검은 괜히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숙소에 있었습니다.”
“어, 언제부터요?”
“행사가 시작하기 전부터 계속.”
“…….”
백천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니, 행사 시작이면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그동안 처소에만 박혀 있었다는 말인가?
“아, 아니……. 왜?”
“그게…….”
혜연이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이전에 전갈을 받았었습니다. 천우맹이 개파 하는 자리에 제가 앉아 있으면……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소림과 화산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 여길 거라고…….”
“아…….”
“그러니까 절대 눈에 띄지 말라고 하시기에.”
“아…….”
그렇다고 사람들이 물 샐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화산 안에서 숨어 있었단 말인가?
“장로님께서 잠시 들르기는 하셨습니다. 그때도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는 절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고…….”
……그럴 만하지.
아니, 정확히는 소림의 입장이면 그럴 만했다. 이 사람은 그냥 제자도 아니고 혜연이니까.
일반적인 소림의 무승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혜연은 일반적인 무승이 아니다. 소림이 미래를 걸고 육성하는 소림의 기대주이자, 백 년 내 제일기재로 그 명성이 천하에 널리 퍼진 인물이 아닌가.
이제껏 함께 다니기는 했지만 그건 화산이 그리 크게 주목받지는 않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대단한 혜연이 화산에 머물고 있다는 게 공공연히 드러나면 여러 구설을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건…… 그래, 그건 이해하겠는데.”
“그, 그런데 얼굴은 왜 반쪽이 되셨어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세상에, 광대 나온 것 좀 봐……. 폐관이라도 하셨어요?”
피죽 이야기가 나오니 혜연의 얼굴이 처연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요?”
“……방에만 박혀 있다 보니 식사를…….”
“헐? 닷새 동안 아무것도 못 드신 거예요?”
“세상에…….”
“아, 아니, 먹긴 먹었습니다.”
“예?”
그럼 뭐가 문젠데?
“그…… 화산 분들이 바쁘시니 당가 분들께서 대신 식사를 날라다 주셨는데…….”
“……주셨는데?”
머뭇거리는 혜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흡사 도둑질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던 그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 죄다 풀떼기만…….”
“…….”
“…….”
“아…….”
상황을 이해한 모두는 뭐라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입을 닫았다. 혜연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어떻게 풀만 먹고 삽니까.”
아……. 그래서 이렇게 헬쓱하게…….
그때 혼자 이해를 못 한 조걸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치 없이 크게 말했다.
“그런데 원래 스님들은 풀만 먹고 살지 않습니까?”
“걸아.”
“예, 사형.”
“일단 닥치거라.”
“…….”
백천은 살짝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는 얼굴로 윤종에게 말했다.
“윤종아.”
“예, 사숙.”
“스님 식당으로 모셔 가서 밥 챙겨 드려라.”
“예.”
“삶은 계란이랑 그…… 밥 아래에다 고기 좀 깔고.”
“……예.”
윤종이 혜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앞장섰다.
“가시지요, 스님.”
“……감사합니다.”
반장하며 감사를 표하는 혜연의 얼굴에 화사한 생기가 돌았다.
동글동글한 그의 머리가 이전보다 더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생각만 해도 좋은 듯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백천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먹어야 살긴 하지.”
무심한 유이설의 목소리가 백천의 귀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사매.”
“예, 사형.”
“청명이는 어디에 있느냐? 아까부터 그놈도 안 보이던데.”
시야에서 청명이 일각만 보이지 않아도 위통이 도지는 백천이 습관적으로 청명이를 찾기 시작했다. 유이설은 무표정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요.”
“어디?”
“저기.”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저 멀리 있는 전각의 구석이었다. 백천의 눈이 뒤흔들렸다.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청명이 누군가를 벽에다 몰아세우고 삿대질을 해 대고 있었다.
“……녹림왕 같은데?”
“그렇죠?”
“…….”
소림제일기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기를 먹으러 가고, 화산제일기재는 녹림왕을 핍박하고 있다.
‘진짜 이래도 괜찮을까?’
새삼 강호의 미래가 컴컴하다 느끼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