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그날을 기대하지. (2)
흥얼흥얼 콧노래가 울렸다.
푸르게 물든 화산의 정취를 배경으로 퍼지는 소리가 얼핏 평화롭게까지 느껴졌다.
콧노래를 부르는 이가 장일소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 듯 흥얼대며 산을 내려가는 그를 향해 호가명이 슬그머니 다가갔다.
“방주님.”
“흐음?”
장일소가 호가명을 돌아보더니 색이 옅은 눈을 반짝였다.
“왜 그러느냐?”
“혹…… 제가 몇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너도 참,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구나. 내가 언제 그런 걸 막은 적이 있었니?”
물론 그런 적은 없다.
장일소는 대단한 폭군이다. 타고난 성정이 비할 데 없이 잔혹하며, 통제할 길이 없는 기분파인 동시에, 인간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웃어젖히는 인간 말종이기도 하다.
하나 그런 장일소가 결코 어기지 않는 한 가지는, 그 어떤 말도 막지 않는다는 점이다.
- 왕이 몰락하는 건 패악을 저질러서가 아니다. 듣지 않기 때문이지. 아무리 패악이 심한 왕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말을 듣는 동안은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그게 장일소의 지론이었다.
폭군임과 동시에 언로를 막지 않는 자.
도무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가지를 양립시키는 게 바로 장일소였다. 그리고 이런 면이 지금의 장일소를 만들었다.
“방주님.”
호가명이 짧게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저는 도무지 방주님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흐음?”
장일소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왜? 헛짓을 한 것 같으냐?”
“제가 어찌 감히 방주님의 행동에 그런 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래 보인다는 말이로구나?”
얼핏 무례하게 들릴 수 있을 질문에도 장일소는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그저 즐거운 얼굴로 평소처럼 혀를 찼다.
“쯧쯧쯧. 가명아, 가명아.”
“예, 방주님.”
“너는 그게 문제란다.”
뒷짐을 진 그가 산 아래를 향해 발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계책을 짜고 실리를 계산하는 것에 있어서는 내가 너를 따를 길이 없다. 훌륭하지.”
“…….”
“그런데…….”
말을 하던 그의 입가에 큰 웃음이 걸렸다. 마치 너무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고 신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 같았다.
“꼭 하나를 몰라.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전부가 아니야. 응? 더 큰 것을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할 줄도 알아야지. 그리고 때로는 먼 것을 위해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 수고를 감당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란다.”
“……오늘의 방문이 만인방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장일소가 눈을 돌려 봉우리 위를 흘끗 바라보았다. 눈빛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아니면 이 내가 굳이 썩은 향내 나는 도관에 발을 들일 일이 있겠느냐?”
“…….”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호가명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너는 천우맹의 존재가 저 구파나 오대세가의 꽉 막힌 늙은이들 눈에 어찌 보일 것 같으냐?”
“그야…… 눈엣가시 같을 겁니다.”
“그래. 겨우 그 정도다.”
천우맹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껏 구파나 오대세가는 천우맹 이상 가는 세력들과도 맞붙어 왔다. 그리고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들은 경계하기야 하겠으나 천우맹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변화를 처음 감지했을 때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변화를 막으려 들지 않겠습니까?”
“틀렸다.”
장일소가 각종 장신구로 번쩍이는 손을 나긋이 저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들은 내 눈앞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우선은 그저 기다린다.”
“…….”
“이 변화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흘러갈지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지.”
“아…….”
호가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구파나 오대세가 같은 명문들은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런 이들을 움직이게끔 하는 게 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이다.”
“…….”
호가명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장일소의 눈에 순간적으로 새파란 살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늦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지금 누리는 것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찮게 여기는 자에게 짓밟혀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장일소의 두 눈에 비틀린 욕망이 번뜩였다.
“그 두려움이 있을 때, 여유를 부리던 강자는 옹졸해지고, 자비롭던 강자는 꼬투리를 잡아 댄단다. 그러고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한껏 벌어졌다. 동시에 비단신으로 감싸인 발이 땅을 콱 짓밟았다.
“피를 부르지.”
그 목소리.
씹어뱉는 듯 한 음절, 한 음절 끊어 말하는 목소리가 섬뜩하게 호가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휘감는 전율과 긴장에 호가명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어느새 장일소는 다시 느슨하게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 바로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
“나야 그저 엉덩이를 걷어차 준 게지. 그리 여유 부리고 있다가는 천우맹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고.”
잠자코 있던 호가명의 눈에 의문이 일었다.
“하나 그런다고 그들이…….”
하지만 차마 뒷말까지 잇지는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이런 행동이 과연 구파와 오대세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표현하는 건 장일소를 의심하는 일이 되기에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장일소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부연했다.
“가명아.”
“예, 방주님.”
“사람이란 건 말이다? 응?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지거든.”
“…….”
“저들이 천우맹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한 네 문파가 모여 연합을 구축했다고는 하지만, 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비한다면 천우맹은 아직 부족한 곳이 아닙니까?”
“그렇지. 네 말이 맞지. 하지만 말이다.”
장일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천우맹에 또 하나의 문파가 든다고 치자. 예를 들면…… 그래, 녹림이라든가.”
“예.”
“그때 구파일방이 달라질 게 있더냐?”
“…….”
“혹여 서부에 있는 청성이나 아미, 그게 아니면 곤륜이라도 천우맹에 합류한다면?”
가만히 머릿속에 그려 보던 호가명이 입을 다물었다.
“구파는 구파. 그래, 그저 구파일방일 뿐이지. 그들은 앞으로 천년이 흘러도 딱히 다를 게 없단다. 열 개의 문파. 이건 이제 깰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니까.”
“……예.”
“하지만 천우맹은 아니지. 천우맹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고…….”
장일소의 얼굴이 뒤틀렸다.
“그 확장성에는 제약이 없다. 과거에 구파였던 문파! 지금 오대세가인 문파. 거기에 새외사궁이었던 문파. 심지어 사파였던 이들마저 천우맹의 맹도가 될 수 있다!”
“…….”
“그곳에 녹림이 있었다는 게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 그곳에 굳이 내가 찾아갔다는 게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
호가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삼 장일소의 무서움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사실 장일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선물을 주고 이뤄질 리도 없는 제안을 하고, 몇 마디 늘어놓은 뒤 돌아온 것뿐이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 상황을 전해 들은 이들도 그리 생각할 것인가?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장일소가 딱히 별다른 목적도 없이 화산을 방문했다고 생각할까?
그럴 리 없다고 여길 것이다.
본디 천우맹이 장일소와 손잡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나, 일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천지가 뒤엎어져도 일어나 리 없다 여기던 일이 이제는 천분지 일, 만분지 일의 가능성은 있는 일이 되어 버렸을 터.
과연 그들은 그 가능성을 말끔하게 무시할 수 있을까?
“눈앞으로 확 밀려들어 와 사람을 짓누르는 불안은 사실 그리 대단치 않단다. 그 상황만 모면하면 안도감을 느끼게 되니까.”
“예. 방주님.”
“사람을 괴롭히는 진짜 불안이라는 건 그런 것이지. 하나도 두려울 것 없이, 푹신한 원앙금침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 찰나에 발바닥을 간질이며 스멀스멀 밀려오는 미세한 껄끄러움.”
“…….”
“그 껄끄러움이 점점 커질 때 비로소 사람은 두려움을 알게 되는 법이지.”
장일소는 화산에 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저들의 사이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애초에 천우맹과 구파일방은 그리 좋은 사이도 아니지.’
균열을 만든 것이든, 숨겨 둔 걸 헤집어 놓은 것이든 상관없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나 버린 균열은 이제 저들 스스로 더욱더 키워 나가게 될 테니까.
“뭐, 애써 무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건 다 무시할 수 있어도 녹림왕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은 모른 척하지 못할 게다. 그건 천우맹이 사파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호가명은 새삼 감탄한 얼굴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임소병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에이, 그럴 리가.”
“……예?”
장일소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신도 아니고, 그놈이 어디 있을지 어찌 알겠니?”
“……하면?”
“있어도 상관없고, 없어도 상관없었지. 그놈 대신 얼굴을 들이밀 이를 미리 화산에 보내 두었거든. 다만 그놈이 보이길래 적당히 말을 바꾼 것뿐이다.”
“…….”
“그놈에겐 미안하게 됐네. 뭐라도 씹은 얼굴이던데. 하하하핫.”
장일소가 양팔을 과장되게 벌렸다. 화려하게 수놓인 소매가 크게 펄럭였다.
“그 분위기를 보았느냐?”
“……예.”
“변화란 기대를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되지.”
“…….”
“나는 천지를 모르고 흥분해 있던 놈들에게 친절하게 현실을 들이밀어 준 것뿐이다. 지금부터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마구 벌어진다는 것을 내가 직접 알려 준 거야. 이제 그곳에 있던 놈들은 더 이상 천우맹의 존재가 즐겁지 않겠지.”
“…….”
“구파도! 오대세가도! 그곳에 모인 놈들도! 아무것도 모르고 밥이나 퍼먹고 있는 병신 같은 것들도 모두가 알게 될 거다! 이제 더는 지금과 같은 평화가 이어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렇게 저들이 품은 불안이 의심을 낳고, 그 의심이 피를 부를 게다.”
호가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리는 그저…….”
장일소가 웅장하게 펼쳤던 팔을 내리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혼란에 빠진 세상에서 이득만 취하면 그만이란다. 알겠니, 가명아?”
“……예, 방주님.”
물론 장일소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그 속에 무엇을 더 품고 있는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어차피 호가명은 장일소의 생각을 모두 알아선 안 되고, 장일소 역시 호가명의 생각을 모두 이해해선 안 된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은 가치가 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가 되는 건…….”
“음?”
“저 화산이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
이 말에는 장일소도 바로 답을 내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하러 온 거지.”
“……예?”
“세력이란 결국 사람이 모인 것. 그 세력을 이루는 사람을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리로만 계획을 짜는 건 미련한 짓이란다.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아.”
장일소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아주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화산……. 그래, 화산. 화산신룡.”
그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화산신룡이란 말을 입에 올린 순간 팔에 다시 소름이 내달린 것이다.
“……오지 않았다면 일을 그르칠 뻔했어. 그래, 그런 건 눈으로 봐야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지, 그런 짐승은!”
호가명은 조금 넋을 놓고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귀기가 어려 있었다.
호가명은 오랜 세월 장일소를 모셔 왔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장일소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대체…….’
화산신룡.
명성이 지금 천하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어린 도사에 불과하다. 장일소에 비한다면 하룻강아지란 말도 과분할 이가 아닌가.
그런 화산신룡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장일소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호가명은 감히 짐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화산이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겠느냐 물었지?”
“……예.”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저들이 과연 해야 할 일들만 할지…….”
이제는 많이 멀어진 화산의 봉우리를 보며, 장일소는 슬쩍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천하를 불구덩이에 밀어 넣게 될지!”
“…….”
“하하하하하하핫! 지켜보는 맛이 있겠어.”
잠깐 멈춰 선 호가명은 앞으로 나아가는 장일소의 등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장일소가 보던 화산의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장일소의 내심을 모두 짐작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세상 그 어느 문파도, 그 어떤 이도 장일소를 적으로 돌려 살아남은 적이 없었다.
불길에 휩싸여 환히 타오르고 잿더미가 되어 가는 화산의 전각들이 벌써 보이는 듯했다.
‘어찌하겠소.’
물론 저들의 죄는 아니다. 그저 상대가 지독하게 나쁠 뿐이다.
패군 장일소는 그런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