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그날을 기대하지. (1)
현종은 장일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자가 뭐라 말한 것인가?
형제? 만인방과 천우맹이?
아니, 만인방과 화산이?
현종의 눈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 어렸다.
그 역시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은 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을 만나 보았다. 누군가는 교활했고, 누군가는 대의로 가득했으며, 누군가는 의뭉스러워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지금 앞에 선 장일소처럼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별것 아닌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의 폐부를 찔러 대는 느낌이었다.
현종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에 비해 여유가 가신 목소리였다.
“패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종의 대답을 들은 장일소가 붉은 입술을 가만히 뒤틀었다.
“그리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건만, 모를 게 뭐가 있겠소. 말 그대로인데. 우리 만인방이 천우맹에 들고 싶다는 거요.”
“…….”
현종의 두 눈에 황망함이 어렸다.
“만인방이 천우맹과 함께한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텐데. 맹주께서는 이 만인방의 손을 잡으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중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인방?
저 만인방과 천우맹이 손을 잡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성사만 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지금의 천우맹도 강호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 천우맹에 만인방이 합류하는 날에는 기존의 모든 세력도를 찢어발기고 다시 써야 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제안을 먼저 한 이가 천우맹이 아니라 만인방의 장일소라는 점이었다.
장일소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그가 결코 누군가의 아래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이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름 아닌 천우맹에 고개를 숙여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장일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중인들은 제멋대로 엉켜 버린 머릿속을 어쩌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았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사위를 짓누르고, 자신의 의도대로 중인들을 휩쓸어 간다. 마치 거대한 손으로 화산에 오른 이들을 움켜잡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중인들은 그런 장일소를 보며 경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천우맹의 맹주에 오른 자.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결코 휩쓸려서는 안 된다.
현종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패군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했습니다.”
장일소가 슬쩍 흥미로운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째서? 만인방과 화산의 관계가 영 좋지 않기 때문에?”
현종이 장일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화산의 장문인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천우맹의 맹주로서 서 있습니다. 사사로운 은원을 따질 계제가 아니지요.”
“하면?”
“만인방과 천우맹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일소가 계속해 보라는 듯 말없이 현종을 응시했다.
“천우맹과 만인방은 서로 걷는 길이 다릅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굳이 엮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장일소의 낭랑한 목소리가 화산에 쩌렁쩌렁 퍼져 나갔다.
“만인방이 사파라서 받아들이기 싫다 이거요?”
“……패군.”
“그것참 묘한 말이군.”
장일소의 시선이 현종의 뒤에 선 설소백과 맹소에게로 향했다.
“북해빙궁이나 남만야수궁도 따지고 보면 정파는 아닐진대,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들과 만인방이 뭐가 다르다는 것이오?”
현종이 살짝 입을 다문다.
정사의 구분이란 사실 그리 명확하지 않다. 스스로 어떤 방향을 표방하느냐에 따라 구분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문파가 딱히 자신의 방향을 정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둘을 나누는 확실한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장일소가 지적했듯이, 남만야수궁은 중원의 시선으로 보자면 정파라기보다 사파에 가까운 곳이었다.
“묘하네. 중원의 사파는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새외의 사파는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현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어젖혔다.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게 아니면!”
쿵!
그러다 돌연 그의 발이 바닥을 내리밟았다. 강력한 진각이 땅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천우맹의 친우라는 건 그저 맹주의 마음에 든 곳인가로 정해지는 거요?”
끌끌 혀를 찬 장일소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아이 소꿉장난이로군.”
천우맹의 존재 자체를 단번에 격하해 버린 그는 양팔을 과장되게 펼쳤다. 길게 늘어진 소매가 펄럭이며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금세 뭔가 큰 소리를 낼 것 같던 장일소는 의외로 뒷짐을 지더니 잠시 침묵했다. 모인 시선이 달아오르고, 지켜보는 이들이 바짝바짝 마른 입가를 축일 시간을 주겠다는 듯.
“패군.”
그사이 현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우맹과 함께하는 이들은 그리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흐음?”
장일소가 이채를 띠고 현종을 바라본다.
“중요한 것은 신뢰겠지요.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를 원합니다. 하나 아직 천우맹은 만인방에게 등을 맡길 만한 신뢰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
“언제고 천우맹이 만인방에게 굳건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저희가 굳이 만인방을 배척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신뢰라……. 신뢰…….”
그는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요. 신뢰. 그렇지, 신뢰 중요하지. 내 맹주의 그 말에는 확실히 동의하는 바요.”
“…….”
“하면 이제 천우맹의 신뢰를 어찌 얻을 것인가가 문제인데…….”
장일소의 시선이 현종의 뒤에 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을 한차례 훑었다.
“어떻소이까. 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한 곳을 무너뜨리면 우리를 신뢰해 주시겠소?”
“저!”
“저, 저런 미친!”
명숙들의 입에서 헛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패군 장일소.
그의 명성을 누가 모르는가. 그가 이끄는 만인방의 강함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감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저리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장일소가 아니라 장일소보다 더한 이가 오더라도 마찬가지다.
“패군!”
참다못한 청성의 이벽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지금 그 말을 감당하실 수 있겠소이까?”
그러자 장일소가 고개를 슬쩍 돌려 이벽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벽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주춤 물러섰다.
“으…….”
사냥꾼을 마주한 짐승의 심정이 이러할까?
기다란 눈매 안으로 불타는 듯한 장일소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전신이 날카로운 칼로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 어찌…….’
이벽은 크게 당황했다. 장일소가 대단한 것이야 익히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돌연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감당? 감당이라고?”
내력 실린 웃음소리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내력이 약한 이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웃음이 내부를 진탕시키고, 고막을 터뜨릴 듯 때려 댔다.
목구멍으로 울컥 피가 치솟는 이가 생겨날 때쯤, 그의 웃음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그러자 텅 빈 정적이 공간을 싸늘히 훑고 지나갔다.
“우습구나.”
웃음기 없이 담담한 장일소의 목소리가 구파와 오대세가의 장로들에게로 꽂혔다.
“눈앞에서 이를 드러낸 적에게는 웃는 낯을 보이는 이들이, 작은 모욕은 참아 내지 못하다니.”
그는 정말로 하찮은 걸 내려다보듯 끌끌 혀를 찼다.
“내게 화를 내기 전에 목에 겨눠진 칼부터 처리하는 게 어떻겠소? 잘나신 분들이니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
모인 이들 중 누구도 그 말에 쉬이 반박하지 못했다. 누구든 대답을 해 보라는 듯 그들을 보던 장일소는 피식 웃어 버렸다.
“재미없군.”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현종을 보았다. 그는 양손을 모아 현종에게 포권 했다.
“천우맹의 개파를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사사로운 원한은 잊고 언젠가 마주 앉아 대작할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현종은 그런 장일소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살펴 가십시오.”
“흐음.”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든 장일소는 묘하게 웃었다.
“맹주.”
“예.”
“내 제안을 그저 농이나 허언이라 생각하지 마시지요.”
“…….”
“정 그게 어렵다면…….”
장일소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석상처럼 굳어졌다.
“저기 있는 녹림왕처럼 드러내지 않고 천우맹을 지원할 수도 있음이니.”
“…….”
녹림왕?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중인들의 시선이 장일소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 선 건 화려한 차림새의 귀공자였다.
‘녹림왕이라고? 저자가?’
‘녹림왕이 왜 여기에 와 있지?’
의혹으로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임소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하하핫.”
임소병의 날카로운 눈길에도 장일소는 깔깔 웃어젖혔다. 그리고 더 이상의 용건이 없는 듯 몸을 획 돌렸다.
“돌아간다.”
중인들은 그의 등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어째서 그가 이 먼 곳까지 나타나 이런 기행을 벌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감히 장일소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질문은커녕 불러 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면.
“어이.”
“…….”
장일소가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렸다.
청명이 차디찬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바닥에 놓인 궤짝들을 향해 턱짓했다.
“가지고 꺼져. 저딴 거 필요 없으니까.”
“쯧쯧쯧.”
장일소는 혀를 차더니 청명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 주었다.
“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선물은 사양하는 게 아니란다.”
“그것도 객 나름이지.”
“호오?”
청명이 눈이 점점 가느스름해졌다. 동시에 날카로운 눈빛이 점점 거칠게 변해 갔다.
“네가 나를 보고 살아 돌아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나를 볼 때가 네 마지막 날이다.”
“흐으으음.”
장일소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그날을 기대하지.”
팔짱을 낀 청명의 손끝은 제 팔뚝을 꽉 움켜쥔 채였다. 화를 참느라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끝이 희게 질릴 정도였다.
“꺼져. 참아 주는 건 여기까지니까.”
“하하하핫! 고마워라. 목이 잘리기 전에 냉큼 달아나야겠어!”
술래잡기를 시작한 아이처럼 웃은 장일소는 몸을 획 돌리고는 소리쳤다.
“가자!”
“예!”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장일소의 뒤로 백홍포를 입은 만인방도들이 일제히 뒤따랐다.
달아난다고는 말했지만 걸음걸이는 어딜 봐도 달아나는 이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비하자면 한 발 한 발에 실린 힘이 개선장군과도 같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넋을 놓았던 이들은 장일소가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몸에 바짝 실려 있던 힘을 풀었다. 개중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이들까지 있었다.
백천은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꽉 깨문 채 장일소의 뒷모습을 뇌리에 똑똑히 새겼다.
“저 개자식…….”
그의 나직한 욕설에, 청명이 가만히 말했다.
“잘 기억해 둬, 사숙.”
“…….”
“저건 괴물이다.”
백천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청명이 누군가를 이리 높이 평가하는 일은 드물다.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우리가 목에 칼을 박아야 할 놈이지.”
“…….”
“잊지 마.”
백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