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화. 여기가 어디라고! (5)
“흐음.”
장일소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네 명의 수장들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곳은 화산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천하를 오시하는 네 문파의 수장들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로는 천하를 지배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이 뒤따르고 있다.
스스로를 사(邪)에 속한다고 정의하는 자라면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에게서는 초조함은커녕 거리끼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이 만인방의 앞마당인 것처럼, 그의 표정과 손짓에선 여유가 그득그득 넘쳐났다.
그런 그를 보는 현종의 눈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맞닿은 그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나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쉬이 짐작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이윽고 현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는…….”
“…….”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던 현상의 몸에서 대번에 힘이 빠져나갔다.
“눈이 많습니다.”
“……운검아.”
현상의 눈이 운검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빈 소매로 향했다.
저 만인방 놈들 때문에 운검은 팔을 잃었고, 사경을 헤맸다. 조금만 잘못되었다면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운검이 되레 현상을 만류하고 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느낌에 현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장일소를 노려보았다.
물론 장일소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히 현상뿐만이 아니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명이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장일소의 목을 잘라 내겠다는 듯 말이다.
작정한 화산의 문도들이 일제히 뿜어내는 살기는 중인들마저 기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 살기를 온몸으로 받는 장일소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모를 일이네.”
그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혀를 찼다.
“화산과의 전쟁에서 피해를 본 건 되레 우리 만인방이란 말이지. 그 일로 만인방은 망신을 당해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민망할 지경이고, 화산은 그때 얻은 명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리 각박해서야 도문이라 불리겠는가? 흐음.”
현종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장일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평정을 깨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곳에 화산의 장문인으로서만 서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천우맹의 맹주였다.
그러니…….
현종은 양손을 공수하여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만인방주를 뵙소이다.”
그러자 장일소도 그를 마주 보며 포권 했다.
“반갑소.”
가볍게 인사를 나눈 현종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일소에게 물었다.
“만인방에서 이곳까지는 실로 먼 거리이거늘, 어찌 화산까지 찾아 주셨습니까.”
그러자 장일소의 입가가 요사스레 비틀렸다.
“이유야 뭐 빤한 것 아니겠소.”
“…….”
“당연히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서 찾아온 길이지.”
“……축하?”
장일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일소가 대인은 못 되는 사람이나, 스스로 소인은 아니라 자부하지요. 강호에 이런 큰일이 있는데 축하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
“가져오너라!”
“예!”
장일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위하듯 그의 등을 지키던 만인방의 무사들이 뒤쪽에서 무언가를 들고 왔다.
‘궤짝?’
그들의 어깨에 들린 궤짝은 모두 세 개로, 그 크기가 상당해 보였다. 중인들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조금씩 고개를 빼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쿵! 쿵! 쿵!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듯한 궤짝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열어라.”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만인방도들이 궤짝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오!”
“으으음!”
그러자 동시에 중인들의 입에서 신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재보(財寶).
처음 그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가장 좌측에 있는 궤짝에 가득 들어찬 보화(寶貨)였다.
눈부신 금자와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그 커다란 궤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물깨나 봤다 자부하는 구파일방의 장로들조차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다음.”
“예!”
채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궤짝이 열렸다. 여기저기서 억눌린 듯한 신음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흡!”
“저, 저거…….”
굳이 뽑아 보지 않아도 그 날카로움이 짐작될 만한 보검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신병이기!’
‘세상에, 저걸 저만큼이나.’
‘만인방의 부가 하늘을 찌르고 땅을 덮는다고 하더니…….’
값어치로만 따진다면 첫 번째 궤짝에 든 보화가 더 값질지 모른다. 하지만 무인들에게 있어서 보검이란 금전적 값어치로는 매길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천금을 주어도 구할 방법이 없는 게 바로 보검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것을 저토록 큰 궤짝에 가득 채워 가져오다니…….
스르르릉.
궤짝 앞에 선 만인방도가 가장 위에 놓인 보검을 들어 가볍게 뽑아 보였다. 드러난 날의 자태에 모두의 입에서 끝내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보아도 보통 보검이 아니다.
중인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세 번째 궤짝을 바라보았다. 먼저 열어 보인 두 궤짝들이 저리 엄청났으니, 마지막 궤짝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해진 것이다.
장일소는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열어라.”
“예!”
궤짝의 뚜껑이 거칠게 열렸다. 그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맑은 향이 중인들의 코를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두 궤짝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영약이다!’
‘저게 전부…….’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상상할 수도 없는 가치의 물건들이다. 저 궤짝을 둘러싼 게 만인방도가 아니었다면 이들 중 몇몇은 벌써 저곳으로 달려 나갔을지도 모른다. 중인들의 눈에는 숨기지 못한 탐욕이 번들거렸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대기 시작했다.
“천우맹의 개파에 바치는 선물이오.”
장일소는 여유가 흐르는 웃음을 머금은 채 현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종은 장일소가 내보인 재물들을 보며 곤란한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방주의 뜻은 감사하오나, 개파 선물이라기엔 다소 과한 것 같습니다.”
“과하다?”
장일소는 우스운 말을 들은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맹주. 나는 장일소요.”
“…….”
“이 정도 선물은 내게 전혀 과하지 않소. 오히려 천우맹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
현종이 그 말을 어찌 받아들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광경이 중인들에게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단 사실이었다.
“게다가…….”
장일소는 비릿하게 웃으며 현종의 뒤쪽에 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입으로만 지껄이는 축하는 진정한 축하가 아니지. 진정으로 축하할 마음이 있다면 아쉬울 정도로 무언가를 내어 놔야 하는 법.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소?”
텅! 텅! 텅!
장일소의 말이 끝나자 궤짝이 뚜껑이 다시 차례로 닫혔다. 만인방도들은 닫은 궤짝을 현종의 바로 앞까지 밀어 놓았다.
“어떻소? 이 정도면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전해졌으려나?”
현종이 말없이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시선에 장일소는 깔깔 웃어젖혔다. 그러더니 나긋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맹주. 우습지 않소?”
“…….”
“만인방은 화산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이곳까지 찾아와 선물을 내밀었소. 그런데 되레 만인방으로 인하여 큰 이득을 본 화산의 장문인은 그 사사로운 원한을 잊지 못해 객을 배척하는군.”
장일소의 말에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도 천우맹의 맹주로서 휘하의 문파들을 포용하실 수 있으실지.”
“이 새끼가!”
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한 청명이 소리쳤다. 평소라면 그런 그를 가장 먼저 만류하고 나섰을 백천조차 이번에는 잠잠했다. 아니, 되레 유례없이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며 검을 움켜잡았다.
장일소의 입매가 더욱 크게 휘었다.
노골적인 조소였다.
안하무인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축하를 위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말투, 행동 그 어디를 보더라도 조롱과 비웃음뿐이었다.
그 방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게 실로 정당해 보이는 것은 이자가 장일소이기 때문이다.
‘……크다.’
백천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까부터 전신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저자가 얼마나 잔혹한지, 얼마나 강한지 백천은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막대한 중압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장일소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모인 수많은 이들을 짓누르고 들었다.
실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저게 패군.’
지금껏 그 이름과 명성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주눅 들게 한 이들은 꽤나 많았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숨이 막히게 한 이는 명백히 장일소가 처음이었다.
‘존재감만으로는 마교의 주교조차도 상대가 안 되겠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백천은 살짝 시선을 틀어 한 발 앞에 선 청명의 등을 보았다.
그의 등은 미동조차 없었다.
청명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때, 장일소가 다시 입을 뗐다.
“화산이, 천우맹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러 왔건만 온통 실망뿐이네. 하, 흥미가 떨어졌다.”
그는 경계의 시선만 흘끗흘끗 보내며 숨죽이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감히 장일소와 시선을 마주할 패기가 없는 이들뿐이었다.
“돌아간다.”
코웃음을 친 장일소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던 그때였다.
“축하란…….”
“…….”
뒤를 잡아채는 나직한 목소리에 장일소가 몸을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슬쩍 돌려 현종을 응시했다.
“방주의 말대로 입으로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호오?”
조금의 감정적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화산의 장문인이라고는 하나, 최근까지는 그저 삼류 문파의 장문인에 불과했던 이다. 그런 이가 자신을 이렇게 똑바로 마주 봐 온다는 사실이 장일소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니 묻고자 합니다.”
“…….”
“패군께서는 무엇을 보고자 하십니까?”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은 현종의 눈과 들불처럼 화르륵 타오르는 장일소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 들었다.
“……나쁘지 않네.”
장일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현종을 향해 돌아서 기껍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짤랑거렸다.
“내가 뭘 원하는지 물었소?”
“그렇습니다.”
“흐음. 원하는 바라…….”
장일소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이런 건 어떻소?”
“……?”
“우리 만인방이…….”
고혹적이기까지 한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천우맹의 형제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맹주께서는 어찌하시겠소?”
날카로운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댄 듯 섬뜩한 기운과 시린 정적이 화산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