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9화. 여기가 어디라고! (4)
저벅.
저벅.
저벅.
정적이 내려앉은 화산에 발소리가 울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딱히 특별할 게 없는데도 묘하게 지켜보는 이들을 숨죽이게 하는 걸음걸이였다.
선명하다 못해 화사하기까지 한 홍색 비단에 그 뜻을 알 수 없는 새하얀 자수들이 어지러이 새겨진 무복.
혼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동시에 괴이하고 위압적인 무복을 입은 이들이 화산의 산문으로 다가왔다.
이를 본 이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백홍포(白紅袍)!’
사파는 자유롭다.
기본적으로 정파는 제자들에게 자문을 상징하는 의복을 입게 한다. 문파를 떠나 홀로 움직이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문에 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에 반해 사파는 문도들의 복장에 딱히 제한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장 녹림만 하더라도 호피든 가죽이든 입고 싶은 대로 걸쳐 대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사파에서도 문파의 최정예들에게는 문파를 상징하는 옷을 입힌다.
그리고 저 백홍포는 만인방의 정예를 상징하는 옷이었다.
정파보다 되레 사파들이 더 두려워하는 의복. 바로 그 옷을 입은 만인방의 문도들이 지금 화산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 산문에 도달한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내로 진입했다. 음울하고도 날카로운 기운이 퍼지자 이제 억눌린 이들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뭐냐!”
“이놈들이!”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위협적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와 동시에 만인방도들의 걸음도 멈추었다.
딱히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만인방도들은 살기 흉흉한 눈으로 양측 궁의 궁도들을 노려보았다.
“저…….”
으드드득.
이를 지켜보던 백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백천도 안다.
화산의 가장 강대한 적은 당연히 마교다. 지금도 마교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리고 가장 지고 싶지 않은 적은 종남이다. 종남에게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지고 싶지 않다.
가장 뛰어넘고 싶은 이는 소림이고, 이겼을 때 가장 통쾌할 적은 무당이다.
하나.
“이……!”
가장 증오스러운 적.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생살을 뜯고 그 뼈를 갈아 마시고 싶은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만인방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만인방 놈들이 제 발로 이 화산에 나타난 것이다.
“이…… 이 개자식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백천이 검을 움켜잡고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순간.
턱.
옆에 서 있던 청명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아 세웠다.
“기다려 봐.”
“청명아!”
“……기다려 보라고.”
“…….”
백천은 입을 꽉 다물고 청명을 보았다.
감정이라고는 단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써늘한 청명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입술을 깨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백천 이상으로 만인방을 증오하는 이가 있다면 청명이다.
운검이 사경을 헤맬 당시 앞뒤 따질 것 없이 검 하나 들고 만인방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던 이가 바로 청명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청명이 백천을 만류하고 있다.
“……빌어먹을.”
백천은 검에서 손을 뗐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이 그의 분노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용건을 밝혀라.”
“물러서라!”
야수궁과 빙궁의 무인들이 이를 드러내며 만인방도들을 위협했다. 그러자 용기백배한 중인들이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감히 사파 놈들이 어디 겁도 없이 여기에 발을 들이는 것이냐!”
“만인방이면 만인방이지! 섬서가 네놈들 땅인 줄 아는 거냐?”
호가호위.
범을 등에 업은 여우가 위세 부리기를 마다할 리 없다.
상대가 아무리 만인방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이곳이 바로 그 화산임을 감안한다면 겁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중인들이 거칠게 기운을 끌어 올렸다.
“물리칩시다!”
“살아 돌아가게 만들지 마라!”
“내 오늘 만인방 놈들의 피 맛을 보겠구나.”
그러더니 야수궁과 빙궁의 무인들 바로 뒤까지 바짝 붙어 서선 금세라도 그들을 뚫고 나갈 듯 위협적으로 발을 굴러 댔다.
하나 그때.
“흐으으음.”
만인방도들의 사이에서 묘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모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근거리에서 범의 울음소리를 들어 버린 토끼는 움직이지 못한다.
지금 중인들은 그 이유를 몸으로 실감했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것뿐이건만, 전신이 굳어지고 눈 한 번을 함부로 깜빡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채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만인방도들이 일제히 좌우로 갈라섰다. 그렇게 생겨난 길을 따라 한 사람이 아주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남자의 신이라기엔 과도하게 화려한 비단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자에게는 저 신발이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그 화려한 비단신 위로 용이 금사로 수놓인 순백의 장포가 몸을 휘감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보다 몇 치는 더 큰 키에 흰 장포를 입으니 선이 가는 그의 육체가 실제보다 배는 더 커 보였다.
장포 아래로 자연스레 늘어뜨려진 손가락에는 형형색색의 보석 반지가 열 개 가득 빼곡하게 끼워져 있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분이라도 바른 것처럼, 만지면 가루가 묻어날 듯 새하얀 피부. 그리고 선명한 핏빛으로 물든 입술.
짙고 빽빽한 속눈썹과 그 아래 자리한 연한 빛깔의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단 한 올 빠져나온 것 없이 완벽하게 넘긴 머리 위에는 순백의 관이 얹혀 있다.
기괴하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행색이었다.
그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옥 목걸이와 황금 목걸이가 맞부딪히며 짤랑거렸다.
만일 평범한 이가 이런 꼴로 돌아다닌다면, 광대가 따로 없다며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누구도 감히 그를 두고 웃을 수 없었다. 아니, 웃음이 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저 말도 안 되는 기괴한 복장도 저 사내의 몸에 걸쳐진 순간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니까.
“……패군.”
누군가 신음하듯 뇌까렸다.
패군 장일소.
이 대단한 존재감을 지닌 사내가 바로 신주오패 중 하나인 만인방의 방주이자, 천하를 오시하는 패군 장일소인 것이다.
저벅.
장일소가 앞으로 한 발 더 나섰다.
금방이라도 만인방에 달려들 듯 기세를 올리던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몸의 무게중심을 뒤로 빼고 말았다.
마음 같았으면 벌써 몸을 돌려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패군 장일소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중인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만인방이 화산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색이 될 만한데, 심지어 장일소가 나타났다. 만인방이 등장한 걸 보면서도 설마 장일소가 직접 이 화산에 방문했으리라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먼 섬서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장일소는 너무나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저벅.
마침내 중인들의 앞에 선 장일소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뜻 모를 시선으로 앞에 선 있는 이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
양측 궁의 무인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하지만 뒤에 선 중인들은 감히 장일소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이들을 패기 없다 탓할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장일소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마치 화산 전체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만 같다.
“흐으으음.”
장일소의 입에서 다시 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피 맛이라…….”
그러자 한 사람의 얼굴이 순간 핼쑥해졌다.
조금 전 오늘 만인방의 피 맛을 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분명 낯빛이 달라진 이의 존재를 확인했음에도 그런 조무래기를 일일이 탓하고 싶지 않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이런 좋은 날에 그런 언사는 좀 과하지. 그렇지 않니?”
“…….”
“아니면…….”
그의 시선이 모두를 훑고 지나갔다.
“적당한 피로 흥취를 돋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어찌 생각하지?”
감히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패군 장일소의 위세는 만인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만인방이 있기에 장일소가 장일소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일소가 있기 때문에 만인방이 만인방일 수 있는 것이다.
신주오패 중 다른 문파들은 과거부터 그 세력을 이어 왔다.
하나 만인방만은 그렇지 않다.
만인방은 장일소가 만들어 낸 신흥 문파. 그가 홀로 연 문파가 천하의 쟁쟁한 사파들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결국은 신주오패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천하의 수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수위에 손꼽히는 자.
사파의 무인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정파인들조차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마는 자.
그런 패군의 말에 누가 감히 함부로 입을 열 수 있겠는가?
“나쁘지 않지.”
하나 중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중인들이 파랗게 질린 채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한 사람을 확인한 그들은 저도 모르게 좌우로 물러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 넓지 않은 길을 따라 화산의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무심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그 피가 네 목에서 흘러나온 피라면 말이야.”
이채를 띤 장일소의 두 눈이 걸어 나오는 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남은,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청년. 감히 장일소를 맞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나약하게 보이는 이였다.
“흐으음?”
하나 장일소의 눈에는 순간 환희 비슷한 것이 어렸다.
그는 고개를 살짝 내리더니 팔을 얼굴 앞까지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으로 그 소매를 걷어 내었다.
새하얀 팔뚝에 확연히 소름이 돋은 것을 빤히 바라보던 장일소가 일렁이는 눈으로 화산의 사내, 청명을 바라보았다.
“알겠군!”
장일소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네가 바로 그 화산신룡이구나.”
“맞았어.”
청명 역시 그런 장일소를 마주 보며 웃었다.
“네 목을 잘라 줄 사람이지.”
순간 중인들의 경악 어린 시선이 청명에게로 쏟아졌다.
제정신인가?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다른 이도 아니고 패군 장일소다.
이곳에 구파의 장로들이 아니라 장문인들이 왔다고 해도 감히 패군 장일소에게 저런 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화산의 장문인도 아니고, 일개 제자가 감히 장일소를 도발한다? 이건 장일소가 당장에 저자의 목을 쳐 날려 버린다고 해도 항변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나 장일소의 반응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금방이라도 노기를 토해 낼 줄 알았던 장일소가 팔을 내리더니 파안대소를 터트린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뭐가 그리 웃긴지 배까지 잡으며 웃어 대는 모양새에, 장내에는 되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낭랑한 장일소의 웃음소리만이 화산에 높게 퍼져 나갔다.
한참을 그리 혼자 웃은 장일소는 경탄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너 재미있는 아이구나. 아니……. 아이라는 말은 사과하지. 재미있는 놈이야.”
그러더니 흰 손으로 자신의 목을 천천히 움켜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목을 주기 어려울 것 같고. 언제 한번 나를 찾아오거라. 좋은 술을 대접하지.”
“너 같은 놈과 대작할 생각은 없어.”
“괜찮다. 괜찮아.”
장일소의 얇은 입꼬리가 요사스럽게 올라갔다.
“팔다리를 꺾고, 턱을 뽑아 술을 흘려 넣으면 다들 맛있다고 마셔 대더구나.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웃음만이 화사할 뿐, 입에서 나온 말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청명은 오히려 장일소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냥 깔끔하게 목만 잘라 줄 테니까.”
“그래? 하하핫. 그거 참 고맙구나!”
칼날 같은 청명의 눈빛과 여유로운 장일소의 눈이 허공에서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시.”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획 돌아갔다.
어느새 현종을 비롯한 천우맹 네 문파의 수장들이 연무장으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장일소 앞에 거리를 두고 선 순간,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침묵이 화산을 육중하게 억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