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8화. 여기가 어디라고! (3)
“……정말 축하드립니다, 청명 도장.”
“아이고! 이렇게 먼 곳까지 어떻게 오…….”
눈앞에 보이는 이를 향해 와락 달려들어 그의 손을 잡으려던 청명이 순간 멈칫했다.
어? 뭐지?
시체가 걸어왔나?
아는 사람이다. 그래, 정확히는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몰골이 청명이 알던 것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어디서 흠씬 맞으셨어요?”
“……아니요.”
“그럼 무슨 병에 걸렸다든가?”
“……멀쩡합니다.”
“그럼 왜?”
청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유령문의 소문주…… 아니. 이제는 유령문의 문주가 된 도운찬이었다.
천우맹의 개파까지 얼굴도 보이지 않던 그가 개파식이 다 끝나고 나서야 화산에 도착한 것이다.
그것도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말이다.
“요, 요즘 뭐가 잘 안 되세요?”
청명의 얼굴에 보기 드문 죄책감이 어렸다.
그러고 보면 유령문에 일을 맡겨 놓고 바빠서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다. 황문약이나 황종의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안 되긴요.”
“음?”
하지만 순간 도운찬의 얼굴에 밝은 빛이 피어올랐다. 턱 끝까지 내려온 어둑어둑한 그림자과 푸석푸석한 피부,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고 절명해 버릴 것 같은 창백한 안색으로도 이런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너무 잘돼서 문제입니다, 잘돼서……. 청명 도장께서 말씀하셨던, 문파가 발전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뭔 말인지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유령문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니 사는 게 완전히 달라지더군요.”
“그, 그렇죠? 그런데 왜…….”
댁 얼굴은 왜 그러세요? 피죽도 못 드신 것처럼.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잘돼서 문제입니다. 이게…… 처음에는 적당히 일을 하면서 큰돈을 벌게 되니 다들 화기애애했었죠.”
“…….”
“그런데 일이 점점…… 아니, 점점이라는 말도 좀 이상합니다. 말 그대로 산사태처럼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아. 산사태요.”
“예……. 산사태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일이 미친 듯이 불어나고 또 불어나서……. 일이…….”
도운찬의 얼굴에 시퍼런 공포가 어렸다. 마치 일이 불어나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제자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밤낮으로 표물을 나르는 걸로도 모자라서 장로들까지 모조리 끌려 나가고, 그러고도 부족해서 이제는 저마저도 본문을 비우고 물건을 나르고 있습니다…….”
청명은 드물게 적잖이 당황했다.
“무, 문주시잖아요?”
“……문주고 나발이고.”
“…….”
도운찬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개파식에는 어떻게든 참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긴급 배송이 생기지 뭡니까……. 북경에서 사천까지 배송을 마치고 남은 힘을 다해 지금 도착했습니다.”
“어디서요?”
“사천이요…….”
“그러니까…… 북경에서 사천까지 갔다가, 여기까지 오신 거라고요?”
“정확하게는 아니죠. 그 전에는 해남에서 출발했었으니까요. 북경에서 해남에 갔다가 해남에서 북경으로, 거기서 사천으로 갔다가 다시 여기까지…….”
“히이이이이익!”
청명의 눈이 크게 지진을 일으켰다.
아니, 미쳤나?
“그,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특급 배송은 무척이나 비싼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배송입니다. 먼 거리가 아니라면 굳이 우리를 쓸 이유가 없지요.”
“아, 그, 그렇죠. 알긴 아는데…….”
청명은 다시 한번 도운찬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 보니 그냥 얼굴이 조금 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예전에 비해서 살까지 엄청 빠져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그, 그렇게 고생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네요.”
청명더러 마귀의 현신이라 하면 되레 지옥의 마귀가 억울하다며 눈물을 쏟고 욕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청명도 지금 도운찬의 몰골 앞에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그…… 일을 좀 줄이는…….”
“예?”
“그…… 업무를 좀 줄여 볼게요. 잘 말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
순간 도운찬의 눈에 새파란 빛이 번뜩였다.
“일을 줄이다니요! 그럼 돈이 줄지 않습니까, 돈이!”
“…….”
“지금 유령문 창고가 모자라서 증축을 해야 할 판입니다! 아니, 창고를 새로 하나 지어야 할 판입니다! 돈이! 돈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들어온단 말입니다!”
“……아까는 일이 산사태처럼 들어온다면서요.”
“일도 산사태! 돈도 산사태!”
도운찬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일전에 보았던 고고한 무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젠 말 그대로 돈에 맛이 가 버린 장사치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람은 벌어 봐야 안다더니, 크으! 이게 돈이 생기니까! 이게!”
“…….”
“캬아! 진즉에 일을 했어야 하는 건데! 도장의 혜안은 알아주셔야 합니다! 사실 제가 화산에 들르느라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섬서까지 올 시간이면 제가 두 탕은 더 뛸 수 있는데, 그럼 제가 받아야 할 대금이…….”
청명은 돈에 미쳐 버린 그를 바라보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제.’
요즘은 어째 그보다 그의 주변이 더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도장!”
그때 돌연 도운찬이 눈을 희번덕대며 청명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청명이 움찔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도운찬은 그가 물러날 틈도 주지 않고 어깨를 와락 움켜잡아 왔다.
“확장합시다!”
“……예?”
“제가 제자를 더 받겠습니다! 배송할 수 있는 인원을 늘릴 테니 사업을 좀 더 확장해 봅시다! 북경뿐만 아니라 남경 쪽과 새외 쪽까지 배송할 수 있으면 버는 돈이 더 늘어날 겁니다!”
“아, 아니, 잠시만요! 이거 적당히 해서 돈 모으시고 나면 다시 유령문을 부흥시키겠다고 하셨…….”
“부흥? 이게 부흥이지, 이게! 이거보다 더한 부흥이 어디 있습니까! 밥상에 말린 제어(鳀鱼: 멸치)만 올라와도 눈이 돌아가던 놈들이 이제는 고기에 신물이 난다고 하는 판인데, 부흥? 부흥이요?”
지, 진정 좀 하고, 이 양반아.
“사업을 키우는 겁니다! 평생 갑시다, 도장!”
“노력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으니 꼭 확인해 보십시오!”
“…….”
말을 잃은 청명이 입도 벙긋을 못 하자, 살짝 떨어져 지켜보던 청자 배 중 하나가 다가와 도운찬에게 말했다.
“문주님. 장문인을 봬야 하실 테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도장, 그럼 저는 장문인을 뵙고 올 테니, 이따 뵙시다.”
“……예. 그…… 손님들 가고 나면 저희끼리 한잔할 생각이니 그때 참석해 주세요.”
“끄응. 그럼 시간이 더 지체되는데. 안 되는데……. 그럼 한 탕 더 못 뛰는데.”
“…….”
“하지만 청명 도장께서 하신 말씀이니 제가 특별히 손해를 감수하겠습니다. 대신 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예.”
“꼭이요!”
“…….”
“그럼.”
도운찬은 청자 배 제자를 재촉하며 후다닥 달려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청명이 멍하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백천과 윤종이 청명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했다.
“괜찮다, 청명아. 네 잘못 아니다.”
“……아니.”
“행복하면 된 거지. 인생 뭐 있겠느냐. 좋은 게 좋은 거지.”
“허허허허.”
그래, 뭐.
그럼 다행이지. 다행이야…….
청명은 장내의 상황을 가만 살폈다.
이제는 대충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듯했다. 불콰하게 취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지만, 슬슬 자리를 뜨려는 사람도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한 시진쯤 지나면 찾아온 객들도 모두 떠날 것이고 그럼 천우맹의 개파식이 진짜로 끝나는 것이다.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여하튼 이제는 한숨을 돌릴 만한 상황이다.
“청명아.”
“응?”
“고생 많았다.”
청명은 대답 대신 슬쩍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실 으레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사뭇 진중한 탓이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새삼스럽지. 하지만 그건 네가 그동안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과 같지 않겠느냐.”
“…….”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 왔는지, 화산의 모두가 알고 있다. 겸연쩍어서 말을 하지 못할 뿐, 모두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너도 꼭 알아주면 좋겠구나.”
“사숙……. 뭐 잘못 먹었어?”
“……이 새끼가.”
사뭇 진지하게 말을 잇던 백천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여튼 이건 칭찬을 해 줘도!”
“칭찬도 할 만한 인간이 해야 의미가 있지!”
“끄으응.”
백천이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마무리 잘하자꾸나. 다들 돌아가고 나면 우리끼리 코가 삐뚤어지게 한번 마셔 보자.”
“이야. 동룡이 화통하네?”
“동룡이라 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청명은 달려드는 백천에게서 몸을 미꾸라지처럼 빼내며 낄낄 웃었다.
딱히 뭐 대단한 걸 이룬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절로 누그러지고 풀어졌다.
“어쨌든 이제 하나는 좋겠네.”
“뭐가?”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누굴 만나도 화산을 무시하지는 못할 거 아냐?”
“……그렇겠지.”
“일단은 그거면 됐지.”
생각만 해도 속이 후련한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동안 죽빵 갈겨 버리고 싶은 것 참느라 혼났는데.”
“……네가 참은 적이 있다고?”
“…….”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다는 백천의 반응에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안 참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줘?”
“……진정해라.”
백천은 살짝 질린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청명은 피식 웃어 버렸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바로 그때였다.
“응?”
말을 하려던 청명이 순간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기이한 분위기가 감지된 것이다.
‘뭐지?’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저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산문 쪽인가?’
그가 선 쪽에서 가까운 곳들은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산문 쪽에 좌판을 깔고 있는 이들 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졌다.
아니, 고요하다기보다는…….
‘질려 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모두가 산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으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면면들을 봐서는 무언가에 확연하게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하지만 겁이라니.
이곳에 모인 건 강호에서 칼 좀 쓴다는 이들이다.
게다가 지금 화산에는 구파일방의 명숙들과 오대세가의 장로들마저 와 있지 않은가. 분쟁이 일어날려야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겁낸다는 말인가?
“와……. 와, 왔다…….”
그때 누군가가 흘린 신음 같은 소리가 청명의 귓가를 똑똑히 파고들었다.
산문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덜덜 떨던 이들 중 하나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 마…… 마…….”
공포에 질린……. 아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황망함이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수많은 감정을 품은 목소리가 한참을 떨리다 일순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마, 만인…… 만인방이다! 만인방이 온다아아아아아아아!”
그 말이 화산을 순식간에 정적으로 물들였다.
상황을 모르고 술을 마셔 대던 이들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빛살처럼 시선을 돌렸다.
“뭐, 뭐라고?”
“누가 온다고?”
이 자리에서 결코 들려선 안 될 이름이었다.
그러나 산문 쪽을 확인한 이들은 모두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했다. 산문 쪽을 채우고 있던 이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뒤로 우르르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확 트인 시야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만인방.”
누군가가 신음처럼 흘린 목소리가 정적으로 채워진 화산에 나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