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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77화 (675/1,567)

677화. 여기가 어디라고! (2)

세상에는 불편한 자리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이를 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곤 한다.

지금 현종이 딱 그랬다.

‘위장이 아프군.’

청명이 놈이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위장이 따끔거리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는 자신에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화산의 제자들이 둘러앉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봐 오던 곳에서, 지금은 각 문파의 명숙들이 앉아 그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딱히 적의가 어린 시선은 아니었지만, 호의도 결코 아니라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현 강호를 지배하는 명문들.

물론 현종은 이미 천하비무대회에서 각 문파의 장문인들을 한자리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입장이 다르다.

그때는 딱히 그에게 관심이 없는 장문인들 사이에서 화산의 제자들을 응원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 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좌우를 천우맹의 수장들이 지켜 주고 있지 않았다면 이 무거운 눈빛을 이토록 의연하게 받아 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미타불.”

중앙에 앉은 법계가 가만히 불호를 외고는 그윽한 시선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먼저……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드립니다, 맹주님.”

장문인이 아닌 맹주라 칭했다. 이건 소림이 현종을 천우맹의 맹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어 버렸으니 소림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하튼 소림의 공증을 받는다는 것은 강호에서는 그 의미가 컸다.

“감사합니다.”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장로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빈도의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법계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덕분인지 장내의 분위기가 아주 살짝 풀리기 시작했다.

“강호의 동도들이 천우맹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

“부디 강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 주시기를 강호의 동도들을 대신하여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법계는 딱히 천우맹에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법정부터가 천우맹에 그리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은 이미 청명과의 거래로 천우맹의 개파를 인정하고 공증하기로 해 둔 상태다.

게다가…….

‘확실히…….’

법계는 이곳에 오기 전 법정이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좌우를 채우고 앉은 명숙들의 표정에서 옅은 긴장이 느껴졌다.

그간 강호의 명문들은 서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제대로 된 연합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심이 되어야 할 소림 역시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상실한 상황이다.

‘맞설 이가 없다면 뭉칠 이유도 없을 터.’

이들이 소림의 말을 듣는 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 판단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소림이라 해도 모두를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천하비무대회에서 망신을 당한 덕분에 구파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 가던 소림의 입장에서 천우맹이라는 외부의 연합이 생기는 게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중과 도사가 이토록 정치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반듯하고 깨끗하게만 살 수는 없는 법 아니던가?

“아미타불.”

어쨌든 이 모든 건 내색할 수는 없는 내심이었다.

“본사의 방장께서도 천우맹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부디…….”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법계 장로님께서는 너무 온화하신 것 같습니다. 불법을 따르는 이들께는 이 일이 그리 큰일이 아닌지 모르지만, 세속의 법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 쉽게 넘길 수만은 없습니다.”

법계를 비롯한 이들이 말이 나온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청성의 이벽(李碧)이 차가운 눈으로 현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내 현종을 떠나 당군악에게로 꽂혔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지요. 저는 천우맹이 이 평화로운 강호에서 굳이 서로 연합하여 긴장을 불어넣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긴장이라기보다는…….”

“그 의도가 패도(覇道)가 아니라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마지막은 현종이나 당군악이 아니라 다른 명숙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음.”

“으음.”

다른 명숙들의 입에서 슬쩍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성은 사천에 위치한 문파다. 천하 어떤 곳보다 사천당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명문.

물론 사천당가와 청성의 사이가 화산과 종남처럼 서로 마주치기만 해도 이를 갈고 검을 뽑아 대는 정도는 아니지만, 애초에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문파가 사이가 좋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하다.

거리가 가까우면 영역이 겹치니 이권을 나눠 먹어야 하며, 같은 것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 처음에야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쌓이다 보면 앙금이 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청성의 이벽이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마음 맞는 이들이 모여 맹을 만드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맹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축하만 하긴 어렵겠습니다.”

과히 직설적인 언사에 현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천우맹은 결코 패도를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장로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

이벽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본문이 저 사천당가와 문제가 생겨 서로 칼을 겨누는 일이 생겨도 화산은 그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옳고 그름을 떠나 문파의 일은 문파의 일로 남겨 두겠다는 말씀이냐 묻습니다. 제가 본 천우맹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순간적으로 잠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은 현종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간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천우맹의 문파들이 서로 형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서로가 무도한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전제로 가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천우맹에 소속된 문파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시에는 천우맹이 먼저 나서서 막겠습니다.”

“…….”

“형제란 그릇된 것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막아서는 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맞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벽에게는 충분한 대답으로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천우맹이 시작부터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현종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자 이벽은 슬쩍 코웃음 치며 말한다.

“한낱 어린아이도 칼을 손에 쥐면 휘둘러 보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천우맹이라는 강력한 뒷배를 손에 넣은 문파들이 정말 지금처럼 얌전히 지낼 것이라 보시는 겁니까?”

“…….”

“처음에는 당연히 자중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그 힘을 휘둘러 보고 싶어질 겁니다. 그때에 가서도 정말 천우맹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자리에 모인 이들이 묘한 눈으로 이벽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어쨌든 개파를 축하하는 자리이다. 불만이 있다 해도, 혹여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드러내어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하나 딱히 이벽을 만류하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이 말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써늘한 이벽의 눈빛을 마주한 현종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잠자코 옆을 지키던 당군악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벽 장로께서는 그리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무슨 의미십니까?”

당군악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청성이 걱정하는 건 사천당가겠지. 그렇지 않소?”

“…….”

이벽이 입을 꾹 닫았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청성은 사천당가에 비해 그리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천당가가 천우맹의 위세까지 등에 업었으니…….

당군악의 칼날 같은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당가가 청성을 상대하는 데 굳이 천우맹의 손까지 빌릴 필요가 있겠소?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소이다.”

“뭐, 뭐…….”

이벽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는 청성의 장로이고 당군악은 당가의 가주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말이 지나치다?”

당군악이 이를 드러내며 차게 웃었다.

“청성의 장문인도 아닌, 한낱 장로가 천우맹의 맹주께 따져 묻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 일이고, 이 내가 청성의 장로에게 하는 말은 지나친 거요?”

순간적으로 낯을 굳힌 당군악의 몸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대답해 보시오.”

“그, 그건…….”

이벽이 입을 다문다.

당군악의 논리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독왕 당군악이 지금 그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우맹이 결성되기 전이었다고 쳐도 이벽은 감히 당군악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무슨 수로 당군악의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뜰 수 있겠는가?

“위세를 믿고 힘을 휘두른다?”

당군악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그대들을 두고 해야 할 말이지. 구파일방이라는 위세를 등에 업지 않았다면 감히 이 자리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댈 수 있겠는가?”

“가주님. 말씀이 과하십니다.”

보다 못한 법계가 중재에 나서자 당군악이 모두를 노려보며 말했다.

“똑똑히 들어 두시오. 현종진인께서는 화산의 장문인이시자 천우맹의 맹주시오. 맹주께 언사를 함부로 한다는 것은 천우맹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더 나아가 사천당가와 남만야수궁, 북해빙궁을 모조리 무시하는 일이오.”

딱히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나지막하고 무거운 음성이 어떤 고함보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내 앞에서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벌어진다면 사천당가는 절대 그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옳은 말이지.”

상황을 지켜보던 맹소가 팔짱을 낀 채 명숙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태산과도 같은 덩치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방 안에 있는 모두를 강하게 짓눌렀다.

“나는 중원의 법도 같은 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맹주께서는 감히 너희 같은 이들이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라는 것뿐. 거꾸로 맹주께서 너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라. 이곳에 맹주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손을 썼을 것이다.”

당군악의 말이 충고라면 이 말은 협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쉬이 반발하지 못했다.

‘저 멍청한 놈이 명분을 주었구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예를 먼저 어긴 것은 이벽이다.

그러니 저쪽이 이렇게 예의를 내려놓아도 탓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이벽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든다.

“북해빙궁 역시 패도를 걷는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북해에서는 무례한 이를 말로 타이르는 법은 없지요.”

설소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과한 것이 뭔지 알고 싶다면 저희가 알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무위만 놓고 보자면 설소백은 강하지 않다.

그렇기에 당군악이나 맹소와 같은 위압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등 뒤에 있는 북해빙궁을 감히 무시할 수 있는 곳이 천하 어디에 있겠는가?

세 문파들이 본격적으로 현종을 비호하고 나서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삭막해졌다.

“아미타불.”

법계가 낮게 불호를 외었다.

“맹주께는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라니요. 그게 어찌 무례겠습니까.”

현종이 살짝 좌우로 팔을 뻗자, 중인들을 위압하던 당군악과 맹소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온화하고 청량한 현종의 기운이 부드럽게 중인들을 감쌌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빈도 역시 천우맹의 개파로 인해 여러분이 느끼실 불안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종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빈도를 믿어 주십시오.”

법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맹주께서 천우맹을 잘 이끌어 주길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서로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을 보며 당군악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선은 잡았다.’

천우맹이 결코 구파와 오대세가의 위압에 굴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준 것만으로도 이 자리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저들의 표정은 무척 좋지 않지만…….

‘이제 마무리만 잘 하면 되겠지.’

하지만 이때 당군악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아니 천하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지금 화산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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