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여기가 어디라고! (1)
한구석으로 끌려간 임소병이 시무룩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흡사 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가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앞에 선 청명과 백천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롭기만 했다. 임소병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니…….”
“뭐!”
하지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벼락같이 고함이 날아들자 임소병은 어깨를 움찔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뭐, 이 새끼야? 악의가 없어? 악의가? 남의 잔칫집에서 상을 뒤엎어도 정도가 있지! 어디 사파 새끼가!”
청명이 끝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고 하자, 백천이 재빨리 뒤에서 붙들며 움켜잡았다.
“처, 청명아! 일단은 그래도 녹림왕이신데…….”
“녹림왕이니까 패야지! 저 인간이 녹림왕이 아니면 내가 패겠어?”
“……그거 참 맞는 말인데.”
개소리로 들려야 할 말인데 상황이 말을 강제로 옳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씨바! 가만 놔두면 알아서 뒈질 인간을 영단 처먹여서 살려 놨더니 제 발로 뒈지러 와? 오냐, 이렇게 된 거 보내는 것도 내 손으로 보내야지! 대가리 딱 내밀어!”
“처, 청명아! 일단 진정해라!”
백천이 슬쩍 임소병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청명의 말이 틀리지 않지만, 그래도 임소병은 녹림왕이다. 지고한 신분을 가진 자. 사파와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면, 사실 저 상석에 앉은 강호의 명숙들보다 오히려 그 신분이 높다.
그런 이가 이런 막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리가…….
“헤헤.”
하지만 정작 임소병은 기분 나쁜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히죽히죽 웃으며 뒷머리를 겸연쩍게 긁적였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온 것 아닙니까?”
“……응?”
그러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군자는 은혜를 잊지 않는 법이지요. 제가 화산과 청명 도장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은인의 잔칫날에 축하하러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군자의 도리가……. 꺄울!”
끝내 청명의 발에 얼굴을 걷어차인 임소병이 저만치 뒤로 나가떨어졌다.
“군자는 뭔 군자야, 이 새끼야! 어디 산적 새끼가 군자를 논해? 산적이 군자면 세상에 공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냐?!”
임소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핫! 군자는 처한 상황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그 마음이 인의예지를 다한다면 지극히 군자라 할 수 있……. 아니, 차지 마시고! 에헤이!”
백천에게 양 어깨를 붙들린 청명의 발이 허공을 몇 번이고 휘저었다.
“……저기, 백천 도장. 은근슬쩍 한 발짝씩 데리고 오지 마시고 제대로 잡아 주십시오. 발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임소병에 대한 동정심이 싹 사라진 백천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청명을 뒤로 질질 끌고 갔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두 눈에 핏발이 선 청명이 임소병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틀이나 있었다고?”
“예. 간만에 지나는 사람들 보니 마음이 평온한 것이……. 하하하. 역시 산속에만 박혀 있기보다는 이렇게 가끔 사람도 좀 보고 해야 하나 봅니다.”
“…….”
청명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오르는 것을 본 백천이 기겁하며 얼른 말했다.
“녹림왕께서 조, 조금 성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녹림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면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리고 그냥 그렇게만 끝날 일도 아니다.
물론 화산이 녹림을 구원한 것은 사실이고, 미묘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천우맹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이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걸 짐작하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하, 그런 건 사소한 일이지요. 뭐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시고……. 어어? 그, 그 손 놓으시면 안 됩니다! 백천 도장님! 손!”
슬그머니 풀리던 백천의 손이 다시 마지못해 청명을 움켜잡았다.
‘죽빵 한 대만 갈기면 원이 없겠다.’
왜 화산에 얽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야, 이! 읍! 읍읍!”
청명이 발작을 하려 하자 결국 임소병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손에 들고 있던 술을 청명의 입에 꽂아 넣었다.
“자자.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시고. 일단 이 술 한 모금 쭈욱. 옳지, 옳지! 그렇지요. 아이구, 잘하시네. 쭉쭉!”
꼴깍. 꼴깍. 꼴깍.
술이 쭉쭉 넘어가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청명의 몸이 서서히 느슨하게 풀렸다.
“카아아아!”
이윽고 술병이 뽑혀 나오자 청명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죽이는데?”
“특별히 준비한 명주입니다. 제가 또 화산신룡께서 술을 즐기시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주도를 모르는 이를 어찌 군자라 하겠습니까?”
“한 병만 들고 왔어?”
“그럴 리가요! 몇 병 더 있습니다.”
“하핫. 역시 뭘 좀 잘 아시네요!”
“하하하핫! 그럼요, 그럼요!”
갑작스럽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이를 지켜보던 백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냥 둘 다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 두 놈은 염왕도 쉽게 데려가지 못하는 악질들이었다.
“그런데 왜 온 거예요?”
술로 분을 희석시킨 청명이 묻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축하하러 왔다니까요.”
“빤한 소리 마시고.”
“아니, 진짜라니까요? 사실 우리 녹림도 천우맹의 일원이 아닙니까!”
“……언제부터?”
“그런데 같은 일원인 다른 문파들은 다들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는데 우리는 참석도 못 하고!”
“……그러니까 언제부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천우맹의 개파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소림?”
“아니지요. 사파입니다.”
“엥?”
이제부터가 본론인 듯, 임소병의 눈빛이 살짝 진지해졌다.
“천우맹이 이름을 날리면서 영향력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구파나 오대세가 쪽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으십니까?”
“우리랑 싸우려 하겠지.”
상상만 해도 화가 치미는 듯 청명이 이를 갈았다.
“와 보라고 해! 중이든 도사든 아주 껍데기를 벗겨 버릴 테니까!”
“……청명아. 너도 도사다.”
“아, 맞다. 에이 씨, 한 번씩 잊어버린다니까.”
“…….”
그때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응?”
“화산신룡 청명 도장님 같은 분들은 체면이나 명분에 그리 얽매이지 않으시니 그리 생각하시는 게 당연하겠지만, 강호의 대문파들은 체면과 명분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정파가 눈에 거슬린다고 대뜸 짓밟으려 들 수는 없지요.”
“과연.”
백천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천우맹을 대놓고 적대한다면 그들이 이권에 집착하여 다른 문파들을 핍박한다는 말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화산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문파에게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구파일방처럼 강호를 지배하던 이들에게는 확실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니 은근하게 피해를 주려 할지는 몰라도, 대놓고 뭔가를 하기는 힘들 겁니다. 대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겠지요.”
“……그게 사파라는 겁니까?”
“예.”
임소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맹이 이토록 관심을 받는 것은 화산이 그동안 해 온 일들 덕분입니다. 명성을 올리고 좋은 말을 퍼뜨리는 데는 실적 이상의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죠.”
화산과 다른 문파들이 형제의 연을 맺으며 그 영향력이 확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그 광경을 지켜볼 만한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은 것은 화산이 지금껏 해 온 일들이다.
그건 구파도 다르지 않을 터.
천우맹의 영향력이 강해진다 싶으면 그들도 강호에 끼치는 영향력을 강화하려 애쓸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청명이 살짝 오묘한 시선으로 임소병을 보았다.
“구파가 자신들의 실적을 쌓기 위해 사파 사냥에 나설 수 있다?”
“정확합니다.”
임소병이 싱긋 웃었다.
“뭐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일이니까요. 그래서 사파 쪽에서도 이곳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 저 말고도 꽤 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저만치서 좌판을 깔고 앉아 술을 마시는 숱한 중인들이 보였다.
‘저중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리 몰려온 이들의 신분을 완벽하게 확인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저들이 어디의 누구인지 어찌 다 면밀히 알겠는가?
“저야 화산에 딱 붙으면 그만이지만.”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되냐고!”
“하하하! 화산의 ‘형제’인 녹림이 아닌 다른 사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지요!”
임소병은 껄껄 웃으며 능청스레 청명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발 좀 죽으면 안 될까? 내가 잘 부탁한다.”
하지만 임소병은 몸을 물리기는커녕 그대로 살짝 자세를 낮추었다.
“도장.”
“음?”
“일이 생각처럼 만만하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도장도 아시다시피 지금의 강호는 꽤 오랜 세월 힘을 비축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파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사파들 역시 오랜 세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아 힘이 넘쳐나는 상황이지요.”
“녹림은 비리비리하던데?”
“…….”
임소병이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청명은 그의 마음 따윈 먼지만큼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툭 밀치고는 어깨를 털었다.
“……여하튼…….”
살짝 시무룩해진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지금껏 강호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커다란 분쟁들이 꼭 대단한 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힘은 넘쳐나고 어디에든 풀고 싶은데, 사소한 시비가 걸린다?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는 거죠.”
“…….”
“이런 말로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천우맹의 개파는 강호라는 거대한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백천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천우맹의 개파가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저 마음이 맞는 문파 몇이 연합을 한 것뿐이건만…….
“그래서 뭐?”
“네?”
하지만 청명의 얼굴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쪽 말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나 아직 안 죽었다 과시하려고 사파 새끼들을 때려잡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청명이 무감하게 말을 이었다.
“사파 새끼들이 다 뒈지든 말든, 사파 새끼들 때려잡다가 구파 놈들이 다 뒈지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이라고.”
“…….”
“이왕이면 둘이 싸우다가 둘 다 뒈졌으면 좋겠네. 그럼 강호 싹 빌 테니까 우리가 다 먹으면 되잖아. 으헤헤헤헤헷!”
“…….”
“…….”
임소병과 백천의 눈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생각만 해도 좋아 죽겠다는 듯 낄낄대며 웃어젖히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대체 누가 사파이고 누가 정파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장……. 그, 이해를 잘…… 그러니까 이해를 잘 못…… 하신 모양인데, 이 일이 커지면 천우맹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뭐 빤한 소리를.”
“예?”
청명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럼 천우맹이 안 생겼으면 그럴 일이 없고?”
“…….”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게 세상의 이치죠. 천우맹이 아니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을 거예요. 아까 직접 말하셨다시피 계기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으음. 그렇긴 합니다.”
“게다가.”
“예?”
청명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마교가 온다.’
아무리 얌전히 살려 해도, 마교는 그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천우맹이니까.”
확신이 굳건히 자리한 청명의 눈을 보며 임소병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렇기에 그가 청명을 보러 온 것이다.
“예! 저희 녹림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댁들이 왜요?”
“그러지 마시고 한자리 껴 주십시오! 허드렛일! 귀찮은 일! 짜증 나는 놈 슥삭 하는 일까지 다 맡아서 할 수 있습니다! 한번 맡겨만 보시라니까요?!”
“아, 그냥 꺼지라고!”
임소병이 청명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 익숙한 소란을 본체만체하며 백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까?’
천우맹의 앞날이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한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