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여기에 모두가 있다. (5)
“여기 술 모자랍니다!”
“지금 간다!”
“고기! 고기도 더!”
“고기는 나를 사람이 없어! 네가 식당으로 뛰어!”
“예!”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간결했던 개파식이 끝나고, 곧장 연회가 이어졌다.
천우맹의 개파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마련된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워 댔다.
“막상 와서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내 말이 그 말일세……. 나는 천우맹이 중원의 서부를 지배할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할 줄 알았는데.”
“예끼, 이 사람아! 중원 서부에 어디 천우맹만 있는가? 청성이나 아미도 뻔히 눈을 뜨고 있고 곤륜이나 점창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공동파도 따지고 보면 서부지!”
“그야 그렇지.”
“게다가 봉문 했지만 종남도 아직 있지 않은가! 천우맹이 아주 힘을 쓰기는 어렵지!”
“그렇지……. 그렇긴 한데…….”
무어라 답하려던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묘한 얼굴로 말을 아꼈다.
사실 개파식을 보기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다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청성이나 아미, 공동, 점창, 그리고 종남까지.
구파일방 중 다섯 문파가 아직 천우맹에 참가하지 않은 채 서부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점창이나 곤륜은 워낙 거리가 멀어서 웬만해서는 중원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 편이고.’
게다가 두 문파는 거리로만 보자면 새외의 문파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곳이다. 구파일방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중원까지 미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청성이나 아미는 구파일방 중에서도 좀 처지는 편이지.’
개파식을 보지 않았다면 청성이나 아미를 천우맹의 아래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청성과 아미가 과연 천우맹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각 문파의 힘을 보자면 청성과 아미가 천우맹의 주축인 네 문파보다 우월할지도 모른다. 행여 그렇지 않다 해도 크게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파일방은 느슨한 연합이고, 천우맹은 한 몸처럼 얽혀 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여하튼 묘하구만.”
“그렇지.”
중인들은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할 생각에 각자 잠긴 채 말을 아꼈다. 살짝 기묘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천우맹의 존재가 중원에 새바람을 불러올 거라 확신하고 모였지만, 그들이 예상했던 변화의 시작은 최소 십 년, 아니. 이십 년이었다.
개파와 동시에 중원 서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다.
온화하기 짝이 없는 선언과 간결하디간결한 개파식.
하지만 그 이면에 숨은 의지는 모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올곧고 단단했다.
“……온건하게 말하긴 했어도, 결국 이건 생각해 보면 패도 선언이나 별다를 게 없어.”
“그래도 그렇게까진……. 중원의 명가인 사천당가와 도가문인 화산이 중심인데 어찌 패도를 선언한단 말인가?”
“꼭 그렇게만 볼 게 아니라니까? 이게…….”
하지만 무어라 말하려던 그는 주변을 살피다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천우맹의 맹도들이 이리저리 오가는 곳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우둔한 사람들. 안일하기는…….’
그는 태평한 생각에 빠진 다른 이들을 보다 혀를 찼다.
‘형제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군.’
그럴 일이 흔치야 않겠지만, 만일 구파일방의 일원인 곤륜파가 주변 문파와 문제가 생겨 전쟁을 벌인다면?
다른 구파일방들이 도우려 발 벗고 나서겠는가?
천만에.
구파 중 누구도 곤륜을 돕기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다. 각 문파의 일은 각 문파의 것. 결국 구파일방이란 강호에 커다란 일이 벌어졌을 때, 적당히 한 이름으로 움직이기 위한 느슨한 연합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만야수궁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사천당가와 화산이 바로 구원에 나설 것이고, 심지어는 먼 북해빙궁마저 이를 악물고 달려올 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저들 중 한 문파만 적으로 돌려도 다른 세 문파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그런 엄두를 쉬이 낼 수 있을 리 없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또 한편으론 모든 게 달라진 거지.’
중원을 오시하는 네 문파의 수장들이 형제의 잔을 나눈 순간 이 개파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문파와 문파가 서로 형제의 잔을 나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 한 일이다. 세상일이라는 건 당장 다음 날 어찌 변할지도 종잡을 수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 적이 되어 내 등을 찌르는 것도 놀랍지 않은 곳이 강호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대 문파의 수장들이 형제의 연을 맺는다? 이는 평범한 상황에선 절대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요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새외의 문파들이 그것만으로 형제를 자처할 만큼 순진하진 않을 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응? 아, 아니. 아닐세.”
“마시게! 일단은 마셔야지! 생각은 나중에 하고. 좋은 날 아닌가?”
“그, 그러세! 하하핫! 그래야지!”
다시 왁자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딱히 깊은 생각이 없는 이들은 그저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했고, 나름 생각이 있는 이들은 술잔을 나누면서도 주변의 분위기와 맹도들의 상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생각이 많은 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주변 분위기에 조금도 어울리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 상황을 이렇게 만든 요인……. 아니, 괴이하게 꼬아 버린 원흉은 세상 짜증이 다 어린 얼굴로 신경질을 부려 대었다.
“아니, 내가 틀린 말 했어?!”
“…….”
“볼 거 다 봤으면 집에나 갈 것이지. 왜 제집 안방처럼 퍼질러 앉아서 술을 퍼 대, 퍼 대기를! 속 시끄럽게!”
“……알았으니 조용히 좀 말해라, 청명아. 누가 듣겠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데 들어야지! 이 양반들은 여기 놀러 왔…….”
그때 돌연 청명이 말을 멈추고 입을 헤 벌렸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새하얀 자기 병을 보는 눈빛이 한껏 빛나고 있었다.
“……이거 가지고 저기 올라가서 술이나 퍼라.”
“그, 그래도 돼?”
“……제발 가라. 부탁이다.”
“헤헤. 그럼 뭐.”
청명은 잽싸게 백천이 내민 술병을 낚아챘다. 백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습니까, 사숙? 그래도 문파의 행사인데.”
“……그럼 네가 쟤 옆에 따라다니면서 말리든지.”
“굉장히 현명하고 영민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사숙.”
“…….”
그때 술병을 보며 군침을 흘리던 청명이 돌연 뚱한 얼굴로 백천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 양반들은 언제 간대?”
“원래 이런 큰 행사는 연회가 사흘 밤낮 동안 이어진다고 하더구나.”
“뭐? 사, 사흘? 술 못 처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어? 사흘 내내 술을 푸게?”
“……참 옳은 말이긴 하지만, 그게 네 주둥이에서 나오니 내가 이 서글픈 심정을 표할 길이 없다.”
“헤헤. 그래도 서글퍼하진 마. 이 좋은 날에.”
“…….”
진짜 그냥 죽일까?
백천은 텅 빈 눈으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원래는 사흘 밤낮 열곤 하지만, 장문인께서 도문에서 잔치를 오래 벌이는 것도 좋지 않다 여기셔서 오늘까지만 연회를 열기로 했다.”
“크으! 역시 장문인이시네. 모르는 양반들이 우리 집에서 술 푸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졌는데.”
“……축하하러 오신 분들이잖아.”
“축하는 얼어 뒈질. 술이나 얻어먹으러 왔겠지. 사형은 이런 자리 가서 진심으로 뭘 축하해 본 적 있어?”
“있지.”
“응? 있다고?”
청명이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이상한 건가?’ 하고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백천이었다.
‘대체 이 새끼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화산에 들어오기 전에 대체 뭘 겪었으면 이리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냥 천성이라고 봐야 하나?
“여하튼 빨리빨리…….”
청명이 막 무어라 짜증을 더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불쑥 내밀어진 손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엥?”
휘황찬란한 비단옷을 입고 화려한 관까지 쓴 유려한 귀공자가 둘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 싸우지 마시고, 한잔하십시오. 아주 귀한 술입니다.”
“어…….”
“어어……?”
잠깐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너…… 너! 이…….”
“아니…….”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져도 ‘아니, 저게 왜 처무너져? 짜증 나게!’ 하고 외치며 혀를 찰 청명이지만, 지금 나타난 이를 보고는 입을 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 아니 미친……. 아니, 진짜 미쳤냐고…….”
화산에 딱히 오르지 말아야 할 이는 없다. 하지만 제 목숨을 생각한다면 오르지 말아야 할 때를 고민해야 할 이는 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이 딱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후후. 이런 좋은 날 제가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지……. 쿨럭! 아오, 망할 산! 뭔 한기가 이렇게 들어! 쿨럭!”
입을 가리고 격하게 어깨를 들썩여 가며 기침을 하는 귀공자의 모습에, 백천의 턱이 덜덜 경련을 일으킨다.
“하핫. 그렇게 떨 만큼 반가워하시니 저도 감개가 무량…….”
“아니! 이 인간이 진짜 정신이 나갔나!”
청명이 귀공자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냅다 소리치는 대신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다행히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데에 바빠 이쪽을 눈 여겨 보는 이는 없었다. 청명은 그를 획 끌어당겨 속삭이듯 윽박질렀다.
“뒈질 뻔했다가 살아나더니 겁대가리를 상실하셨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 미쳤어?”
“후후! 진정한 친우란 목숨을 걸고…….”
“뭐래, 미친놈이!”
당황한 청명이 반사적으로 귀공자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렸다.
“켁! 추, 축하를 하러 온 사람을 패기 있습니까?”
“나니까 패지! 다른 놈이면 죽였지, 이 미친놈아!”
화려한 차림새의 귀공자.
녹림왕 임소병이었다.
“아니, 어디 사파 새끼가 여길 기어들어 와? 여기 지금 너 잡아 죽이겠다고 드릉드릉 할 애들이 개미굴 안의 개미처럼 깔려 있는데!”
지금 화산에는 천하 명문의 명숙들이 모조리 몰려와 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거기에 어디에서 칼춤 좀 춘다는 양반들이 득실대는 곳이 지금의 화산이다.
정파인에게는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겠으나, 사파인에게는 용담호혈을 넘어 십팔 층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다.
평소에는 임소병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이들조차도, 지금 이곳에 임소병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날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단 말인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너 미쳤어?”
“아, 아니. 잠시만, 그리 흥분하지 마시고.”
임소병이 손을 내젓더니 이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변장까지 하고 왔잖습니까!”
“…….”
“후후.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는 하나, 제가 이런 복장으로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하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녹림왕이라 하면 응당 다들 털가죽을 걸친 우락부락한 장한이라고 생각할 텐데.”
“…….”
“그 증거로, 벌써 이틀 전부터 와 있었지만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안전하다 이 말씀이죠!”
청명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니…….’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근데 못 알아보는 건 또 맞는…….
‘하하, 모르겠다.’
여하튼 정상적인 새끼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청명의 살짝 체념한 듯한 질문에 임소병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대외적으로 선언을 하지 못한 것뿐이지, 녹림 역시 화산과 형제의 연을 나눈 문파 아닙니까.”
“……누가?”
“천우맹이 개파를 하는데 천우맹의 중심인 우리 녹림이 오지 않을 도리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누가…….”
“후후.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산의 사정은 다 이해합니다. 적당히 뭉개다가 다른 문주님들만 슬쩍 뵙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한잔? 어떠신지?”
청명은 경쾌하게 술병을 흔드는 임소병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썩 나가, 이 사파 새끼야!”
고작 산 하나를 넘었다고 편해질 리 없는 게 또 인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