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화. 여기에 모두가 있다. (2)
척! 척! 척! 척!
중인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이미 화산과 사천당가, 그리고 새외의 궁도들을 그 두 눈으로 지켜본 바 있다. 앞서 있었던 접견에서 이미 저들의 응대를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들을 지켜보는 것과 제대로 복장을 정제하고 도열하여 걸어오는 이들을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차이였다.
일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디뎌지는 발걸음이 지켜보는 이들의 호흡마저 통제하는 것만 같았다.
“다, 당가!”
“사천당가다!”
전각 뒤쪽에서 녹색의 무복을 입은 이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천의 패자(霸者)이자 독과 암기의 조종(祖宗).
오랜 세월 동안 사천 무림을 지배해 온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완벽하게 줄을 맞춰 천천히 연무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우와.”
명불허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다.
가문 전승의 법칙을 따르는 사천당가는 그 특성상 세가원의 수가 타 명문세가에 비해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웬만큼 강호를 누빈 경험이 있는 이들도 이만한 수의 당가인들을 한눈에 보는 건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그래서일까.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천당가를 상징하는 녹색 장포가 바람에 흩날렸다. 당가의 무인들은 길 좌우로 선 중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무장으로 진입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정당당함을 숭상하는 강호에서 독과 암기로 명문이라는 이름을 쟁취한 이들. 그렇기에 모두가 꺼리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고, 무게감을 주는 데 있어서 사천당가보다 더 적절한 문파는 없을 것이었다. 매서운 기세가 사위를 압도했다.
그리고.
“비, 빙궁이다! 북해빙궁도 온다!”
사천당가가 등장한 길의 반대편에서 새하얀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칼날 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걸어 나왔다. 모두가 그 모습에 북풍한설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티 한 점 묻지 않은 새하얀 백의는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지켜보는 이를 위압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북해의 왕.
저 척박한 혹한의 땅을 지배하는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한 자루의 검처럼 서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선두의 한이명의 얼굴에선 평소와 같은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북해의 찬란한 영화와 고통스러운 인내를 모두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선 다른 이들에게선 볼 수 없는 어려운 깊이가 있었다.
북해빙궁의 총관이라는, 무겁고도 막중한 자리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기세에 눌린 사람들이 힘겹게 뱉는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누구나 쉽게 말한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신주오패. 새외사궁.
강호를 대표하는 이름들이지만, 천하에 퍼져 있는 강호인들의 수에 비한다면 사실상 그저 한 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한 줌의 무인들이 정점에 서서 강호를 이끌어 나간다.
그런 이들이 이리 한곳에 모이는 광경을 본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이다. 특히나 마교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로 백 년 동안은 이럴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바로 이 모습, 바로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든 이들은 북해빙궁과 사천당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저들의 강함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보이는 것은 저들이 실제 가진 것의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도 이들이 어째서 강호의 정점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이들이 손을 잡는다는 거로군. 이들이!’
한 문파만으로도 각 지역을 호령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천우맹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그 맹이 단순한 감투나 요식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이미 아는 사실이다.
“야수궁!”
“남만야수궁이 온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일제히 돌아갔다.
“오…….”
“아니…….”
사천당가가 진입했던 길로 남만야수궁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던 중인들의 얼굴이 그 모습을 본 순간 조금 풀렸다.
사천당가와 북해빙궁이 보여 주었던 엄정함은 없다. 딱히 제대로 줄을 서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전의 문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기세를 흘려 대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오합지졸 같았다.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두고 그저 오합지졸이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까닭은, 표정 하나하나에 숨길 수 없는 자신감과 패기가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수가 자그마치 얼마인가.
심지어 저 단상 주변으로는 현 강호를 지배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중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일개 궁도들이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은 웬만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무학에 대한 확신과 단단한 결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감히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누구도 그 모습을 폄하하려 들지 않았다.
실력이 없는 이의 자신감은 꼴불견에 지나지 않지만, 실력을 갖춘 이의 자신감은 인정받는 법. 새외사궁의 일원인 남만야수궁이라면 자신감을 가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살짝 건들대는 걸음으로 연무장에 들어선 야수궁은 좌측의 사천당가, 우측의 북해빙궁 사이로 진입하여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다.
줄을 지어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마지막의 도열만은 완벽했다. 그들 역시 이 자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아미타불.”
법계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상석에 앉은 그의 눈에는 도열한 세 문파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다르구나.’
당금 강호에서 저 세 문파가 연합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으랴.
하지만 그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천하를 웅비하는 세 문파가 한곳에 도열한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은 그 감상이 달랐다.
‘구파가 한데 모인다면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법계는 안다. 이보다 강한 문파가 더 많이 모인다고 해도 지금 그가 받은 느낌을 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연합이 가지는 속성의 차이 때문이었다.
구파일방이 아무리 하나의 이름 아래 엮여 불린다고 해도, 결국은 구속력이 없는 느슨한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이익과 세간의 평가로 뭉쳐 같은 자리에 앉을 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위협하는 사이에 불과하다.
오대세가 역시 마찬가지다. 신주오패는 언급할 가치도 없고, 새외오궁조차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이들은 다르다.
훗날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은 여러 문파가 같은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라 한 문파 안에 있는 여러 조직이 모인 것만 같다.
‘천우맹…….’
힘으로 복속시킨 것도 아니고, 확실한 목적을 위하여 손을 잡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느슨하기 짝이 없는 목적성이 되레 이들을 끈끈하게 만든다.
명확한 이유가 없는 이들이 한 마음으로 뭉쳤다는 건, 거꾸로 말해 딱히 반목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맹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이득을 따지지 않는 연맹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문파라 해도 그리 그릇되지 않다. 어쩌면 지금 법계는 천우맹이라는 연맹이 아니라, 천우맹이라는 문파의 창설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법계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이 어마어마한, 다른 문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이뤄 낸 이들이 이제 저기에서 나올 것이다.
화산.
강호의 역사상 이리 짧은 기간 만에 이토록 눈부신 성장을 이뤄 낸 곳이 과연 존재했던가?
‘방장. 어쩌면 화산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기이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사천당가.
북해빙궁.
남만야수궁.
반목을 하면 했지, 서로에게 등을 맡길 일이 조금도 없을 문파들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화산이 끼는 순간 모두 하나로 녹아들었다.
‘이 어찌 대단하지 않은가.’
화산이 그동안 보여 준 활약도 대단했지만, 이 문파들을 하나로 엮어 낸 것에 비하면 그동안의 공이 빛바랠 정도였다.
“……대단합니다.”
“눈으로 보니 그 위세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 아닙니까.”
“으음……. 확실히.”
상석에 앉은 이들에게서 불편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잔칫집에서 패악을 부릴 수야 없는 노릇이니 다들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천우맹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불안한 마음을 더 누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허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더니, 화산이…….”
“……종남이 봉문을 한 게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습을 봤다면 아마 사흘은 앓아누웠을 테니.”
“어디 사흘뿐이겠습니까?”
위협이 되지 않는 이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이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온다는 건, 결국 이 광경이 저들에게 확실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다름 아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에게 말이다.
‘오늘 이후로 천하의 누구도 감히 화산을 무시하지 못하겠구나.’
그런 움직임이야 진즉부터 있었지만, 오늘의 개파식으로 확실해졌다.
섬서의 화산을 폄하하는 이야 감히 있을지 모르지만, 천우맹의 화산을 폄하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천당가가 상석을 내어 주고 새외사궁의 두 문파가 예를 표하는 문파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이는 소림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미타불.”
법계는 어쩔 수 없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물론 화산에 대한 그의 감정이 그리 기꺼운 것은 아니다. 하나, 어찌되었건 화산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순수한 호기심과 기대가 드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화산이 나올 곳으로 향해 미리 기다렸다.
기대감이 부풀었다.
부풀고.
부풀었는데.
그런데…….
“……왜 안 나오지?”
“그러게 말입니다.”
“뭐지?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가?”
나올 시간이 지났건만 이상하게도 화산파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뜸들이는 것 같은데…….”
긴장감과 기대감 고조를 위해 적당히 시간을 끄는 것이야 행사의 관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섰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살피는 법계의 귀에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위가 낮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소리였지만 확실히…….
“야, 이 새끼야! 오늘 같은 날에도 늦게 처오냐! 죽어! 그냥 죽어, 이 새끼야!”
“에휴,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수선이야.”
“아아아악!”
“사숙, 참으십쇼! 지금은 안 됩니다!”
“빠, 빨리 나가야 됩니다! 빨리!”
법계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뭔…….”
당황한 나머지 살짝 사레든 그가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군중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온다아아아아!”
“화산이다아아아아아아!”
“화산이 온다! 화산이!”
장내에 커다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상석에 앉은 이들조차 순간 터져 나온 환호에 당황하여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이렇게까지…….”
앞서 등장했던 세 문파와는 그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지금의 강호에서 화산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확연히 보여 주는 현상이었다.
구파와 오대세가의 장로들의 안색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표정을 수습할 틈도 없이 전각 뒤쪽에서 화산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열렬히 소리치고 환호하는 중인들. 그 위로 솟아오른 전각에 새겨진, 분분히 흩날리는 매화 문양.
드디어 검은 무복을 입은 화산의 제자들이 견정한 의지 가득한 얼굴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