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여기에 모두가 있다. (1)
이른 아침.
간밤에 화음에서 묵었던 이들이 해가 뜨기 무섭게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가득 채운 그들의 얼굴은 모두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이다.’
‘오늘 마침내!’
굳이 이 먼 섬서까지 찾아와 천우맹의 개파를 두 눈으로 지켜보려 하는 이들이다.
물론 단순히 화산에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온 이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천우맹의 개파가 강호에 커다란 파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처럼 수많은 이들이 산에 올랐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 인파들 중 강호인이 아닌 이들도 눈에 띈단 점이었다.
“몇 번을 올라도 가파르구나.”
고용한 무인들이 둘러멘 가마 위에서 황문약은 허허 웃었다. 그리고 비좁은 산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마 옆에서 걷던 황종의가 말했다.
“사람들이 가득하니 더욱 오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어려운 길을 마다 않고 오르는 이들이 이리 많으니, 이게 지금 화산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느냐.”
황문약의 얼굴에 주체하지 못한 감정이 들어찼다.
과거 그가 화산과 첫 거래를 트기 위해 이 길을 올랐을 때는 화산에 오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 뒤에 다시 화산에 올랐을 때는 섬서의 유력자들과 함께였지만, 그들 역시 화산에 딱히 기대를 거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불과 몇 년이 흘렀다.
‘상전벽해라는 말보다는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
“많이도 바뀌었어.”
“아버님의 안목이 빛을 발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때의 화산에서 뭘 보신 것입니까?”
“허허. 그건 오해다.”
“예?”
황종의의 의문 어린 얼굴에 황문약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내가 화산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
황문약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평범한 상인은 돈과 물건에 투자를 하지만, 거상이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가치에 투자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예, 아버님. 그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대로 된 거상은 아닌 모양이다. 화산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곳이 될 줄 알았더라면 전 재산을 모조리 투자했을 것을. 쯧쯧. 눈앞에 보석이 있는데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다니.”
황문약의 말에 황종의는 쓰게 웃었다.
황문약과 은하상단은 화산에 투자를 한 덕에 막대한 이문을 손에 넣었다. 하나 그건 화산을 통해 만들어 낸 거래선에 비하면 이득이라고 볼 수도 없을 정도다.
중요한 것은 당장 손에 떨어지는 돈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이익을 낼 수 있을 미래를 손에 넣었다는 것. 그건 헤아리기도 불가능한 가치다.
은하상단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도전이자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문약은 아쉬움이 남은 듯 보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돈을 벌어서 말이냐?”
“아니요. 화산이 잘되어서 말입니다.”
황문약이 이채를 띠고 황종의를 바라보았다.
“상인답지 않은 말이구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황종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아버님께 미치지는 못하나 어쨌든 상인으로 나름 오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의 시선이 산 위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 보았고, 수많은 이들과 거래를 해 왔습니다. 때로는 이문을 좇고, 때로는 사람을 좇고, 때로는 흐름을 따라서 말입니다.”
“음.”
황문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황종의도 적은 나이는 아니다. 나이로 따진다면 지금 당장 황문약이 은퇴하고 그가 상단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한데 참 이상하지요.”
“으음?”
“세월이야 이제 몇 해씩 되었다고는 해도, 산속에 머물며 두문불출하는 화산 분들을 만나 볼 일이 그리 자주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저분들이야 도인들이시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황종의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탈속한 도인들을 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화산이 아닌 다른 도인 분들도 몇 번이고 만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화산 분들은 뭔가 다릅니다.”
“어떤 점이?”
“글쎄요. 딱 집어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그저 어리숙한 것 같고, 때로는 황당할 정도로 막무가내고, 그리고 때로는 대책 없이 올곧고…….”
말끝을 살짝 흐린 황종의는 이내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상인으로서 해선 안 될 말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화산 분들이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화산의 위상이 날로 높아짐에 마냥 기분이 좋습니다, 아버님.”
진지하게 듣고 있던 황문약이 껄껄 웃었다.
“거상. 그래 거상이니라.”
“예?”
황문약이 애정 어린 눈으로 황종의를 바라보았다.
“거상이란 미래에 투자할 줄 아는 이라고 했느냐?”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미소를 머금은 황문약이 말을 이었다.
“상계에는 이런 말이 있지. 돈을 얻는 이는 상인이 되지만, 마음을 얻는 이는 거상이 된다.”
“아…….”
“네가 정녕 나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지금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말거라. 네가 저분들을 진심을 다해 대한다면 저분들도 너를 진심으로 대할 터. 이문이 아닌 진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언젠가 너를 거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단정한 대답에 황문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 낼 것이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나이가 있다.
저 화산이 천하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앞으로도 쭉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화산의 곁에서 함께 발을 맞추기가 어렵다.
세대는 결국 흘러가고 교체된다.
이제 그도 슬슬 황종의에게 상단을 맡겨야 할 때였다.
아직은 못미덥다 해도, 미련이 남는다고 해도 물러날 줄 알고 믿어 줄 줄 알아야 한다. 저 화산이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나 역시 궁금하구나.’
이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지. 훗날의 화산과 은하상단이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부지런히 가자꾸나. 늦기 전에 도착해야지. 화산이 천우맹의 맹주에 오르는 날인데 우리 은하상단이 늦어서야 되겠느냐?”
“예, 아버님!”
황종의는 크게 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흐음.”
산문에 도착한 황문약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준비했구나.”
“저희가 한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천당가 분들이 전각을 개보수하고 꾸며 주셨습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지.”
산문에 들어서자마자 너른 연무장이 보이고, 그 뒤와 좌우로 전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 쓰러져 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하나같이 웅장하기 짝이 없다.
전각 앞으로는 커다란 단상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중요 내객들이 자리할 상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손짓을 한 황문약이 천천히 가마에서 내렸다.
“저기까지는 가마를 타고 가시는 게…….”
“아니 될 말. 이곳이 어디라고 가마를 타고 다닌단 말이더냐? 상인은 예의와 본분을 잊는 순간 끝나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화산에서 이 늙은이에게 상석 하나는 내어 주었으니 어찌 기껍지 않겠느냐. 가자꾸나.”
“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준비된 자리를 향해 다가가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상단주님!”
“장로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황문약이 현영의 손을 맞잡았다.
화산의 재경각주인 현영과 은하상단주인 황문약은 그간 많은 대화를 나누고 수많은 거래를 해 온 사이다.
“맹을 창설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화산이 이토록 나날이 달라지니 이 황모는 참으로 기껍습니다.”
“다 상단주님께서 화산을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이건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화산의 모든 이들은 상단주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하핫. 한 사람은 빼야 할 것 같은데.”
“……그, 그렇긴 한데…….”
분명 청명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지들이 고마워해야지, 왜 우리가 고마워해요! 누가 돈 벌게 해 줬는데!’ 하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을 것이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니고.’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해서 황문약은 허허 웃었다.
그에게 있어 청명은 더없는 은인이자, 제 발로 굴러 들어온 복덩이와도 같았다. 아닌 말로 청명이 갑자기 수염을 잡고 뽑아 댄다고 해도 황문약은 그저 껄껄 웃어 줄 자신이 있다.
“장문인께서는?”
“식을 준비 중이시라 지금은 뵙기 어렵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상단주님. 좋은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그렇게까지……. 저도 제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말석이나마 자리를 내어 주시면 그거로도 충분합니다.”
“절대 아니 될 일이지요! 어디 상단주께서 말석에 가신단 말입니까! 이리! 이리로 오십시오!”
현영은 황문약을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현영이 아무리 무학을 본격적으로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결국에는 무인. 무학을 조금도 익히지 않은, 늙은 황문약이 그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현영이 황문약을 끌고 간 것은 단상 옆에 마련된 상석의 가장 앞자리였다. 황문약은 기겁을 했다.
“자, 장로님! 여긴…….”
그의 옆과 뒤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중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도 기겁할 일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앞자리라니!
정말이지 지나치게 상석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에 황문약은 현영을 붙들고 애원했다.
“자, 장로님. 저 뒷자리로 가게 해 주십시오.”
“결코 아니 될 말입니다! 귀빈의 자리를 어찌 그곳에 마련한단 말씀이십니까?”
“제,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이런 곳에 앉으면 심장이 벌렁거려 버티지를 못합니다.”
“……허어.”
“뒤쪽! 뒤쪽이면 충분합니다! 저를 생각하신다면 제발 그리해 주십시오.”
“끄응. 알겠습니다. 하, 장문인께서 화를 내실 터인데.”
“제,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릴 테니, 부탁드립니다.”
“예. 그리하시지요.”
진땀을 빼며 겨우 뒤쪽으로 안내를 받은 황문약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께를 부여잡고 몇 번이고 심호흡한 후에야 진정이 되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허허 웃어 버렸다.
‘화산이라…….’
사람이란 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이 모여 만든 것이니 문파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화산에 올랐던 과거에는, 분명 그가 큰 손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화산에게 그토록 중요한 손님일 수 있겠는가?
그도 상인이고 세상의 생리는 알 만큼 안다.
설사 지금의 화산이 그를 상석이 아닌 저 아랫자리로 안내했다고 해도 그는 조금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석, 그것도 가장 앞이라니.
‘순진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새삼 이곳에 오르며 황종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리숙하면서도 막무가내고…… 대책 없이 올곧다…….”
황문약의 얼굴에 결국 미소가 어렸다.
‘그래서 그저 좋은 사람들이구나.’
화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강호의 중진들이 그의 앞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그 속내야 어떻든 이 자리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이다.
이들을 불러다 이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천우맹의 힘을 극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인파까지.’
단상 아래쪽, 연무장의 좌우로 물 샐 틈 없이 들어찬 이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황문약의 가슴에 묘한 감흥이 넘실거렸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후로 시간이 꽤 흘렀지만, 주변 광경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시작한다!”
“저기 온다!”
좌우에 미리 확보되어 있던 길을 따라, 천우맹의 맹도들이 마침내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