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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70화 (668/1,567)

670화. 내가 주인인데 왜 사과를 해? (4)

청명을 바라보는 현종의 눈빛이 실로 허망했다.

그 옆의 장로들과 다른 제자들의 시선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뭔가 말을 하려던 현종이 말없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청명아.”

“네?”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던 청명이 태연스레 대답했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것이다만.”

“네.”

“……네가 도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네, 물론이죠!”

내가 도문에서만 몇 년을 살았는데!

“그래……. 아는구나. 알아……. 아는데…….”

현종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있는 청명은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양경의 얼굴을 걷어차 버린 청명이 아니다.

그 후 참회동으로 가는 와중에 탈출하여 끝끝내 양경을 더 패러 가다가 백천과 운검의 손에 포박되어 끌려온 청명이다.

두 사람이 청명이 없어진 걸 조금만 더 늦게 눈치챘다면 지금쯤 양경은 화산을 떠나지 못하고 의약당에 누워서 당소소의 침에 고슴도치가……. 아, 아니. 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제발……. 제발 도사답게 살자꾸나. 제발…….”

“아니, 장문인! 들어 보세요. 그 새끼가 화산을 무시한 거라니까요?”

“네가 제일 화산을 무시해! 네가 제일!”

“제가요? 에이, 설마요.”

“끄으으응!”

“헤헤.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인데, 저는 그냥 좋게 말로 하려고 했어요. 제가 설마 패기까지…….”

“팔! 팔 똑바로 올리거라, 팔!”

“……쳇.”

청명은 입술을 삐쭉이며 다시 팔을 귀 옆에 붙여 번쩍 올렸다.

현종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천하제일후기지수라는 놈이…….’

지금 화산으로 몰려드는 이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이는 현종도 아니고, 당군악도 아니다.

현종에게 간단히 인사를 마친 이들이 산을 내려가지 않고 하나같이 청명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소문의 화산신룡이 어찌 생겼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저러고 있으니…….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들어야 하는데…….”

“아. 그거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

“으응?”

“헤헤.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서로 깔끔하게 포기하면 마음에 평안이 깃들지 않을까요?”

“……청명아.”

“예?”

“팔 더 바짝 올려라.”

“…….”

“팔, 팔! 더 바짝!”

청명이 시무룩한 얼굴로 팔을 더 바짝 들었다. 그때 한쪽에서 영 못마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애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크게 잘못했다고 벌까지 주십니까? 청명아, 내려라! 팔 아프겠다.”

청명쯤 되는 무인이 잠깐 벌 좀 섰다고 팔이 아플 리야 있겠냐마는 현영은 그마저도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네가 자꾸 그렇게 감싸고도니까 애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게 아니냐!”

“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현영이 두 눈을 부릅뜨자 현종이 슬쩍 움찔했다.

‘내가 말이 심했나?’

현영은 눈에 불을 켠 채 말했다.

“청명이 녀석이 언제 더 심해졌습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하기만 하구만! 하나도 안 달라졌는데!”

“…….”

어……. 그래……. 그건 맞지. 그래, 처음부터 이랬지.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심지어 좀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대밖에 안 때렸잖습니까!”

“……자랑이다.”

퍽이나 자랑이다, 새끼야.

화산 장문인의 신분이라 차마 욕지거리를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게 현종의 깊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참는 게 더 문제지요! 어디 화산에서 감히 그딴 말을 입에 담는다는 말입니까? 청명이 말대로 그건 단순히 새외인들을 야인이라 무시한 게 아닙니다. 그들과 맹을 만든 화산을 비웃고 무시하며 조롱하는 거지요!”

“그렇죠!”

청명이 좋다고 찬동하고 나서자 현종이 돌연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냥 뭐……. 어……. 네.”

청명은 다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에 지켜보던 화산오검이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청명이를 눈빛만으로 제압했어.’

‘역시 장문인이시다!’

‘와……. 저게 된다고?’

일문의 장문인이 사람 하나 눈빛으로 찍어 누르는 게 뭐가 대단하겠냐마는 그 상대가 청명이라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 되어 버린다.

“너는 좀 가만히 있어라.”

그때, 잠자코 있던 현상이 한숨을 쉬며 현영을 만류하고 나섰다. 현영이 발끈했다.

“아니,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가만히 좀! 어? 가만히!”

현영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쌍으로 입을 삐쭉대는 장로와 삼대제자를 바라보는 현종의 가슴은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되어 흩날릴 지경이었다.

계속 아웅다웅하는 두 장로를 보던 운암이 미소 짓더니 입을 뗐다.

“장문인.”

“음?”

“제가 평소 현영 장로님의 편을 드는 일은 드무나, 이번만큼은 장로님의 말씀이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도 청명이가 딱히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걸 굳이 또 패겠다고 화산을 빠져나갔는데?”

“그건 잘못이라기보다는 인성의……. 크흠.”

아니. 뭐 그건 일단 접어 두고.

“응당 단호했어야 할 일입니다.”

운암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건 단순히 새외사궁에 대한 거부감에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설사 그들이 새외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화산을 존중했다면 이곳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니까요! 소림이었으면 이 새끼들 입도 벙긋 못 했…….”

“좀 조용히 해라!”

“넌 입 좀 다물고!”

“낄 데, 안 낄 데 보고 껴! 인마!”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얻어맞은 청명이 문에 바짝 붙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상처받은 척하지 말고!”

“쳇, 안 통하네!”

청명이 구시렁대거나 말거나 대화는 이어졌다.

“우선은 이 먼 화산까지 찾아와 준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에 화산의 입장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청명이가 조금만 늦게 나섰더라면 결국 화산도 과거 그들을 배척했던 중원의 문파와 다를 것이 없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음,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아직 중원과 새외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화산이 그 벽을 뚫고 친교를 맺기는 했지만, 관계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무릇 관계란 지속적으로 가꾸어 나가야 하는 법.

이미 좋은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그들을 소홀히 대한다면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의 감정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조금 과격하기는 하지만, 빙궁과 야수궁의 궁도들에게 청명이의 행동은 확실한 신호가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화산은 다른 중원인들과는 달리 정말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호 말입니다.”

“……그보다 확실한 신호는 없겠지.”

“너무 지나치게 확실해서 문제 아닙니까?”

“……신호도 적당히 줘야지.”

하지만 적어도 이번 청명의 행동이 천우맹을 단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건 분명했다.

“장문인.”

“계속하거라.”

현종의 말에 운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의 중진과 남만야수궁의 궁주께서는 화산을 더없이 믿는 듯하나 수장의 뜻이 반드시 문파의 뜻과 일치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 장문인의 입장에서는 듣기 껄끄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현종의 얼굴에는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빙궁도들과 야수궁도들에게는 여전히 화산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서로 배척하며 살아온 세월을 감안한다면 불신이 그리 쉬이 가실 리는 없겠지요.”

“그러니 말로 하기보다는 보여 줘야 했다는 것이더냐?”

“예. 저는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종의 묘한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물론 현종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되레 청명을 두둔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생각을 하고 움직인 것인가?’

청명이 놈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우둔한 녀석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아는 청명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기는 하지만 똑똑한……. 음……. 이거 별 의미가 없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문파들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음?”

운암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인들은 천우맹이 새로이 생겨난다는 것만 알지, 그게 어떤 곳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

“만약 이번 일에서 양측 궁과 화산이 저들에게 굽히고 들어갔다면 천우맹을 얕잡아 보는 곳이 반드시 생겨났을 것입니다.”

“…….”

“저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호의가 반드시 호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베풀었던 것을 다시 호의로 받아 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힘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네 말이 옳구나.”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다. 힘없는 자의 호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말이다.

새삼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 화산의 문도들이 얼굴을 굳혔다.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천우맹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며, 무례를 참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 되는 거죠!”

진지하게 잘 듣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리며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 일사불란한 시선에 청명이 떨떠름하게 말한다.

“……오늘 나 몰래 다들 짰어요?”

“……그 와중에 자기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정말 하나도 안 하는구나.”

현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영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놈은 정말 초지일관한 게 한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때 청명이 말했다.

“원래 세상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응?”

“한번 얕잡히기 시작하면 문제가 계속 생겨요. 원래 인간이라는 게 만만한 놈들을 앞에 두면 간을 보거든요. ‘이 정도는 너희가 참아 주겠지?’ 하면서요.”

“…….”

“그러니까 처음에 제대로 한번 잡아 놔야죠. 그럼 어설픈 놈들이 대거리를 못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일단 초면에 멱살을 딱 잡고!”

“……거기까지.”

“넵.”

현종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그 맞는 말을 속 터지게 하고, 맞는 행동을 뒷목 당기게 하니 문제지.

쓰게 입맛을 다신 현종은 다른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할 말이 정리된 듯 눈빛이 간명해졌다.

“사람이든 문파든 위치에 따라 처신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화산의 위치는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바뀌었으니 너희 역시 혼란스럽겠지.”

“…….”

“하나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하나만 기억하거라.”

모두의 시선이 현종에게로 집중되었다.

“바뀌어 가는 것을 위해 굳이 무언가를 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조금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만한 말이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제자들의 올곧은 시선을 보며 현종은 빙그레 웃었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 너희가 해야 할 온당한 행동은 이미 지난 가르침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너희의 마음이 가는 곳이 곧 화산이 갈 길이니 스스로를 믿고 흔들리지 말거라.”

“예, 장문인!”

“명심하겠습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숱하게 벌어질 것이다. 화산의 영향력이 커지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나아간다면 삐뚤빼뚤 굽이진 길일지언정 결국은 닿아야 할 곳에 닿지 않겠는가?

“변화란 불안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현종의 목소리가 제자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굳게 나아가자꾸나.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믿고.”

“예, 장문인!”

실로 힘찬 대답에 현종이 가만히 웃었다.

“드디어 내일이 개파식이로구나. 준비에 만전을 기하자꾸나.”

“예!”

마침내 천우맹이 발족하는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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