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화. 내가 주인인데 왜 사과를 해? (3)
현종이 모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정적이 흘렀다. 중인들은 차오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화산의 장문인.
과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작은 문파의 장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감히 현종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사천당가가 그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새외의 지배자들이 예를 다해 고개를 숙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현종이 딱히 기세를 내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주위에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선 훈풍과도 같은 온화함과 함께 사위를 압도하는 무게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전부터 현종을 알고 있었던 이들은 그 달라진 위상을 새삼 실감했고, 모르던 이는 화산 장문인의 위엄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현종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
상황을 대충 파악한 듯, 그는 깊디깊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이 광경을 본 적 있는 것 같은지 모르겠구나. 내 착각인가?”
아니요, 장문인.
그거 착각 아닙니다……. 자주 봤죠. 암요.
조걸의 시선이 현종에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저……?”
“……와, 사숙.”
백천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현종의 뒤에 서 있었다. 나머지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멍청한 놈들. 당장 장문인부터 모셔 왔었어야지.’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따로 있다더니.”
“아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저 미친놈 말리느라 개고생 하는 걸 보고도 그냥 갔단 말이잖아?”
“좀 빡치는데?”
“쉿.”
속닥거리던 화산 제자들이 어느새 곁으로 온 윤종의 눈짓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흐음.”
현종의 시선이 양경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현종이오.”
“……저는 호남 청백문의 양경이라 합니다.”
양경이 살짝 주눅든 얼굴로 말했다. 이런 거물이 갑자기 등장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문파든, 일반적으로 장문인은 함부로 거동하지 않는다. 장문인이란 문파를 대표하는 이. 말 하나하나가 그 문파가 어떤 곳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화산의 장문인은 다른 제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급박하게 변해 가는 상황에 양경은 숨이 막힌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예, 장문인.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
양경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보니, 제 잘못은 적당히 줄였고, 청명의 패악은 살짝 과장……. 아니, 뭐 딱히 과장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있는 대로 말했다. 더 과장할 것도 없으니까.
“그리된 것입니다.”
“흐음.”
양경의 말을 모두 들은 현종이 미간을 확 구겼다. 그리고 여전히 제자들에게 붙들려 있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네.”
“문주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이더냐?”
“네.”
양경 쪽으로 쏠려 있는 이야기였지만, 청명은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답했다. 비슷한 일이 벌어진 건 사실이니까.
“그렇구나.”
현종은 당당히 선 청명을 바라보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묻겠다.”
“예, 장문인.”
“너는 네가 한 일에 일말의 부끄러움이 있느냐?”
“아니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인 대답이 나왔다.
현종은 그런 청명을 빤히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크게 외쳤다.
“운암!”
“예! 장문인!”
현종을 호위하듯 서 있던 운암이 즉시 포권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양경 문주를 비롯한 청백문의 사람들을 화산에서 내보내거라.”
“예!”
“금일부로 청백문의 화산 입산을 금한다. 그리고 앞으로 화산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음을 천명한다.”
“예, 장문인!”
양경의 얼굴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자, 장문인!”
그가 절박하게 현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종은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청명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도인이라는 놈이 좀 참을 줄도 알아야지.”
“참을 때가 있고, 참지 말아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구분해서 참지 않았던 것이냐?”
“그건 아니고……. 헤헤.”
청명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자 현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용히 말했다.
“잘했다.”
“…….”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때 역시 참지 않아도 된다.”
“네.”
청명이 거보라는 듯 배를 쭉 내밀었다. 제자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 아니, 장문인……. 말씀을 그리하시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한편 중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일들이 자꾸만 이어진다. 이런 일에 장문인이 곧바로 나서는 것도 처음이고, 그 장문인이 남의 문파 문주의 얼굴에 발길질한 제자를 두둔하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하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일문의 장문이 한 말에 어린 제자들이 딴죽을 걸고 나서는 일이었다.
응당 호통을 치며 나서야 할 장로들도, 그 뒤를 지키는 일대 제자들도 그게 당연하고 익숙한 듯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문제가 생기면 이번처럼 너희가 막으면 될 일이지.”
“……못 막았는데요.”
“그리고 못 막을 거예요…….”
“허허허.”
자애로운 웃음으로 제자들의 서글픔을 대충 얼버무리고 흘린 현종이 슬쩍 양경을 바라보았다. 온기를 가득 담아 제자들을 바라보던 눈에 돌연 날카로운 한기가 서렸다.
“뭣들 하느냐? 내보내라!”
“예!”
양경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일대제자들을 보다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소리쳤다.
“자, 장문인! 이게 정녕 화산의 뜻입니까?”
현종은 답하지 않았다.
“저 외인들을 비호하고, 중원의 문파를 핍박하는 것이 정녕 화산의 의도입니까? 이 많은 이들 앞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종의 눈이 슬쩍 가느스름해졌다.
“아무래도 오해가 깊으신 모양이군요.”
“예?”
현종이 입을 열자 양경의 주변으로 다가가던 일대제자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현종은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은 새외를 비호하지 않습니다. 아니, 새외가 되었건 중원이 되었건 출신과 성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 하면 어찌…….”
“화산은 그저 화산의 친우를 지킬 뿐입니다.”
“…….”
“똑똑히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은 화산의 친우이며, 그 뜻을 같이하는 곳입니다. 화산은 친우에 대한 모욕을 참지 않습니다. 저들을 모욕한다면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화산은 응당 맞서 싸울 것입니다.”
“그…….”
양경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무어라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산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장문인이 저 새외 문파의 편에 서서 양경에게 노화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압박을 이겨 내기엔 양경의 담이 너무도 작았다.
현종은 뒤이어 장내의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건 그저 양경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이.
“천우맹의 이름하에 있는 한, 화산은 친우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게 설사 화산에 손해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요!”
현종과 눈이 마주친 이들은 은근슬쩍 고개를 숙여 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은근슬쩍 양경에게 동조했던 만큼 감히 그 시선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현종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양손을 모아 포권 했다. 다시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중인 여러분들께서는 사소한 사고를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개파식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장문인!”
재빨리 여기저기서 대답이 돌아오자 현종이 허리를 쭉 폈다.
“양 문주.”
“예? 예!”
화들짝 놀란 양경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살짝 희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싸늘한 목소리뿐이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화산에서 나가시오.”
“자, 장문…….”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은 좋은 날이기 때문이오. 만일 다른 때에 오늘처럼 감히 화산의 앞에서 저들을 모욕했다면 나는 결단코 참지 않았을 거요.”
양경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화산 장문인의 발언이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순 없다. 다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 현종에 맞서 그의 편을 들어줄 이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소.”
그 싸늘한 목소리가 결정타였다.
고개를 푹 숙인 양경은 말없이 몸을 돌려 물러났다. 그런 그의 뒤로 마찬가지로 어깨를 늘어뜨린 청백문의 제자들이 뒤따랐다.
인파가 갈라지며 열린 길을 따라 산문으로 향하는 그들을 가만 보던 청명이 이를 갈았다.
“아, 좀 더 팼어야 하는 건데!”
“……충분히 팼어, 인마! 뭘 얼마나 더 패려고!”
화산에서 축객령을 받은 것만 해도 창피할 일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삼대제자에게 얼굴을 걷어차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마 한동안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물론 커다랗게 찍힌 발자국 때문에라도 얼굴 들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쯧. 뭐, 그래. 어쨌든 망신은 줬으니까.”
“그래, 그래. 그러니까 진정하고…….”
“이씨, 근데 생각하니까 또 열받잖아! 뭐, 야만인? 저 새끼 아가리를…….”
“아, 좀! 제발!”
“그만 좀 해라, 이 새끼야!”
제자들이 또 득달같이 청명을 붙잡았다. 현종은 그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허허. 역시나 사이들이 좋구나.”
“이게 좋아 보이십니까? 이게?”
“어,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허허허허.”
현종이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자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다 알면서 저러신다니까!’
‘한 번씩 진짜 밉다! 진짜!’
그때, 빙궁과 야수궁의 궁도들이 중인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현종의 앞에 섰다. 적잖이 겸연쩍은 얼굴들이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저희가 괜히…….”
“그런 말씀 마십시오.”
하지만 현종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되레 먼 곳에서 오신 분들께서 좋지 않은 말을 듣게 해 드려 너무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화산이 먼저 신경을 쓸 터이니, 기분을 풀어 주십시오.”
“……장문인.”
그런 그를 바라보는 궁도들의 눈에 감격이 가득했다. 친우로 생각한다는 화산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님을 온전히 느낀 것이다.
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감동…….
“그냥 함부로 입 터는 놈들 주둥이를 죽어라고 패서 이를 다 털어 버리면 말 못 하지 않을까? 아까 그놈들부터 시작하자.”
“…….”
감동이…….
거 감동이…….
“야, 이 새끼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왜 말이 안 돼? 헛소리하면 맞아야지! 그리고 이건 저 양반들만 무시한 게 아니라니까! 우릴 무시한 거지!”
“그게 왜 또 그렇게 되냐?”
“생각해 봐! 여기가 소림이었으면 저 새끼가 소림이랑 연합하는 문파에 대고 저리 입을 털었겠어? 되레 잘 부탁드린다고 굽실거렸을걸?”
“……어? 생각해 보니 그런데?”
“그래! 이건 우릴 무시한 거라니까! 껍데기를 벗겨 버려야 돼! 아까 그 새끼들 다시 잡아 와야겠다!”
“야!”
“왜? 또 말리려고?”
“아니. 우리도 같이 가자. 생각하니 나도 열받는다!”
“그렇지?”
어정쩡하게 서 있던 궁도들이 어색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종이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운검아.”
“예, 장문인.”
“……다 참회동에 밀어 넣어 머리를 식히게 해라.”
“……예.”
사고는 남이 아니라 화산의 제자들이 치는 거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 현종이었다.